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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37화 (3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7화

한참을 걸어 메인 스트릿으로 나온 그는, 얼마 후 인적이 드문 샛길로 빠졌다.

띄엄띄엄 세워져 있던 건물들을 지나치니, 어느 순간 경사로가 나왔다. 그 너머로 무성한 나무와 풀숲이 보였다.

하지만 보통의 노상길은 아닌지, 섬세하게 세공된 작은 전등이 곳곳에 길을 밝히고 있었다. 꼭 반딧불이라도 되는 양 예뻤다.

불빛에 비친 나무와 수풀들을 자세히 보니, 관리가 잘된 정원처럼 정갈했다.

초입에 있는 ‘이스트 힐’이란 표지 판을 발견한 나는 의아해졌다.

‘여긴 갑자기 왜 왔지?’

나도 어렴풋이 아는 곳이었다. 이곳은 공작저 소유의 동산을 깎아 만든 산책로였다.

또한 노멀 모드에서 여주와 남주들 간의 주 데이트 장소기도 했다.

물론 남주 놈들과 데이트 할 일이 없던 나는 처음 오는 것이었다.

이 산책로는 호화스러운 만큼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다. 일반 평민들은 이용하지 못한단 소리다.

‘설마, 인적 드문 곳에서 찔러 죽이려고?!’

표지판을 지나던 나는 불쑥 든 생각에 걸음을 번뜩 멈췄다.

“자, 잠깐만요!”

그러자 데릭이 차갑게 나를 돌아보았다.

“……뭐지?”

“여, 여기는 왜 올라가는 거죠?”

“벌을 받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잠자코 따라와.”

놈이 다시 뒤돌아 먼저 걷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입구를 지나쳐 경사로에 올랐다.

내가 먼저 한 말이 있어서 반항할 수도 없었다. 가기 싫다고 했을 때 나올 놈의 반응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데, 비루먹은 가짜 공녀의 몸뚱이는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금방 숨이 찼다.

게다가 빠른 속도로 무지막지하게 걷는 놈을 따라가느라 나는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헉, 허억…….”

가면 속으로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나는 생각했다.

‘설마, 그 벌이란 게 등산으로 굴리는 걸 말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잔인한 새끼였다.

레이디에 대한 배려 따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는 놈에게 질질 끌려가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멈췄다.

“헉, 잠깐만요!”

“또 뭐냐.”

이번엔 아예 걸음도 멈추지 않은 채 데릭이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나는 더럭 겁을 먹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질질 끌려갈 순 없었다. 벌써 로브 자락이 잔뜩 끌려 더러워졌다.

“……그렇게 빨리 걸으시면 따라가기 힘들어요.”

나는 소심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솔직히 놈이 내 말을 무시할 줄 알았다. 아니면 매번 그랬듯 재수 없는 말을 쏘아붙이든가.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발걸음이 차차 늦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보폭에 맞춰 그와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됐다.

‘……괜찮은 거 맞지?’

나는 연신 그의 머리통 위를 흘깃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지표처럼 [호감도 13%]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얼마쯤 걸었을까.

멀찍이 아름다운 가제보(Gazebo)가 보였다. 드디어 동산의 꼭대기에 오른 것이다.

서둘러 그 안을 들여다본 나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데이트 명소라며!’

게임에선 분명 남녀 간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나왔는데, 막상 와 보니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난 얘랑 단둘이 있기 무섭다고요…….’

깊이 상심한 채 비척비척 벤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길 올라오느라 모든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내겐 간절히 휴식이 필요했다.

“이쪽으로 와.”

그러나 한 발자국 떼기도 전에 데릭이 다시 나를 질질 끌고 갔다.

기어이 언덕의 끄트머리에 도달한 후에야 놈의 걸음이 멈췄다.

“아래를 내려다보도록 해.”

나는 반쯤 해탈한 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점점 눈이 커다래졌다.

경사가 완만하다고 우습게 여기다간 큰코다칠 것이다.

언덕 아래로 축제가 한창인 화려한 수도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색색의 등불로 수놓아진 밤거리,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그 사이로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수많은 사람들.

노멀 모드에서는 축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드 모드에서는 축제의 ‘축’ 자도 구경하지 못했고.

때문에 지금 보는 장면은 게임에서도 보지 못한 절경이었다.

“와…….”

나는 넋을 잃고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곳을 직접 누비고 다닐 때는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걸 느낄 새가 없었다. 나는 항상 바짝 긴장해 있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건 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인생은 언제나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발자국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니까…….

‘왜 이렇게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기분이 너무 이상해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고작해야 게임 속 한 장면일 뿐인데…….’

그때였다. 문득 데릭이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길 보아라, 페넬로페.”

나는 쓸데없는 감상에서 벗어나, 시선을 돌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언덕에서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커다란 대로변.

인파를 뚫고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두 명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저건…….”

한 남자가 뒤를 쫓는 기사들을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그는 기사들만큼 요령 있게 인파를 뚫고 달리지 못했고, 결국 잡혀서 제압당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흔히 나타나는 소매치기 같았다.

‘현실이건 게임 속이건,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던 데릭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런 좀도둑은 약과다. 축제 기간에는 수도 사방에서 온갖 범죄들이 들끓지.”

“…….”

“눈이 닿지 않은 곳엔 더 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헤밀튼 스트릿에 있는 술집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지.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넌 모르겠지만.”

‘앞담 하는 거니?’

나는 의아한 눈으로 데릭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이런 소리를 내게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공작가의 관할 구역에서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질 나쁜 범죄자나 용병들이 자주 드나드는 상단 거리는 어떨 것 같지?”

그러나 덧붙여지는 물음에, 나는 이것이 아까 전 개구멍 앞에서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건 훈계인가, 조롱인가.’

이젠 여기까지 끌고 온 목적 파악만 남았다.

“이젠 하다못해 그런 저급한 놈들이랑 어울기라도 할 심산인가?”

답은 곧바로 나왔다. 조롱이었다.

‘에휴. 이놈이 그럼 그렇지.’

한숨을 한번 내쉰 나는 잠시간의 틈을 두고 입을 열었다.

“……맹세코 가문에 누가 되는 짓은 한 적 없어요.”

“평판이란 것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저지르는 행동마다 따라붙는 것이지.”

“그래서 가면을 썼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데릭이 서늘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처럼 널 단번에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아니, 그전에 천것들이 네가 계집임을 눈치채고도 가면을 고이 씌워 둘 것 같나?”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소공작님.”

나는 단호하게 그의 가정을 잘랐다.

“지금까지 주제를 모르고 추태를 부려 온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제 발로 위험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바보 천치는 아니에요.”

이런 말을 하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무섭긴 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진 공작을 상대하느라 데릭과 제대로 대립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레널드처럼, 지금을 기회 삼아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천치가 아니라 공녀씩이나 돼서 개구멍을 기어 나간 건가?”

“오늘 말도 없이 몰래 나간 이유는…….”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과하지 않지만, 공작보다 더 어려운 데릭을 납득시킬 만한 적당한 변명.

“……앞으로 신경 쓰실 일 없게 쥐 죽은 듯이 산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소공작님께서도 그러길 바라셨고요.”

“…….”

“그래서 소란 피우지 않고 조용히 나갔다 돌아온 것뿐이에요.”

그래. 네가 쥐 죽은 듯 살래서 조용히 나갔다 온 거야.

훌륭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썩 좋지 않은 발언이었는지, 데릭의 파란 눈동자가 더욱 시퍼렇게 얼어붙었다.

“……상단 거리에 간 목적이 뭐지?”

그는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문득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그것까지 보고드려야 하나요?”

“대답하는 게 좋을 텐데.”

“정보상에서 사람을 찾을 일이 있었어요.”

레이디의 비밀 운운하는 건 뷘터에게나 통하는 말임을 잘 알았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적당히 사실과 거짓말을 버무렸다. 데릭 앞에서 늘 하는 일이었다.

“황궁에서 도움을 주셨던 분이 있는데, 그분이 준 소지품을 제가 잃어버려서 따로 사과를 드리고 싶었거든요.”

“…….”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따져 묻던 데릭이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통쾌함을 느꼈다.

그가 버리라고 지시했던 뷘터의 손수건 얘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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