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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38화 (3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8화

데릭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면 아랫것들을 시키면 될 일 아니냐.”

“아직 혼담도 오가지 않는 귀족 영애가 미명의 남자를 찾는다는 소문이야말로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겠지요.”

나는 매끄럽게 읊조리며 쐐기를 박았다. 데릭의 시선으로 보는 페넬로페도 변화가 필요했다.

매번 괴성을 지르며 말도 안 되는 패악과 억지를 부리는 기생충이 아니라, 조금쯤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 미물 정도로.

‘그래야 내가 뭘 하든, 네가 나한테 완전히 신경을 끄지 않겠어?’

나는 냉정한 눈으로 [호감도 13%]를 바라보았다.

최대한 나를 낮추고 공손히 말했으니 하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상승을 원하지도 않았다.

“……페넬로페.”

그런데 왤까. 데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곧 성인이니, 목적지를 알리고 싶지 않은 외출까지 굳이 막진 않겠다.”

“…….”

“하지만 어딜 나갈 거면 채신머리 없이 개구멍이나 이용하지 말고, 그냥 당당하게 정문을 이용해. 집사에게 일러 둘 테니까.”

[호감도 17%]

“아니면 네가 끌고 온 그 거지 같은 놈이라도 데리고 나가든지.”

데릭의 호감도가 올랐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호감도는 물론이고, 내게 하는 말까지.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으면 오히려 달가워할 놈이, 왜 호의를 베푸는 거지?’

과거의 페넬로페를 생각해 보면 비밀스러운 외출에 대한 그의 추궁은 정당했다.

또 어디 가서 미친개처럼 날뛰고 오기라도 한다면 그 뒷수습은 온전한 그의 몫일 테니까.

하지만 그가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외출을 인정하겠다는 건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였다.

“……벌은 안 주세요?”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데릭은 답변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멍청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저택 안까지 돌아다닌 건 아니겠지?”

“……네?”

그가 불쑥 내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와락 붙들었다.

“에카르트의 위상을 떨어뜨린 죄로, 이건 압수다.”

“어…….”

아차 할 새 없이 가면이 벗겨졌다. 온종일 갑갑하게 가려져 있던 얼굴 위에 시원한 밤바람이 닿았다.

좁은 시야로 올려 보던 데릭은 무척이나 차갑고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트인 눈으로 내 하회탈 가면을 들고 있는 그를 보니, 왠지…….

“이게 오늘의 벌이야.”

즐거워 보이는 건 착각일까?

“레널드가 사 준 건데…….”

나는 그의 얼굴과 빼앗긴 내 가면을 번갈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자.”

그러자 그가 불쑥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보석들에 마법을 새겼다. 끼고 있으면 보호 마법과 외양 변화 마법이 발동되지.”

“…….”

“시행한 마법사가 말하길, 다른 이의 눈으로 볼 땐 네 또래 소년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더군.”

건틀릿을 낀 커다란 손바닥 위에, 진분홍빛 보석들이 자잘하게 달린 백금 줄 팔찌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원래 달려 있던 것들은 싸구려라 그런지 자꾸 깨져서, 아예 최상등품의 가넷으로 바꿔 달았다.”

데릭이 덧붙였다. 꼭 투덜거리기라도 하는 말투였다.

나는 우두커니 그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클리스를 구하기 위해 몰래 나온 축제 첫날, 내가 가면을 고를 때 데릭이 골랐던 팔찌였다.

잘 익은 자두색의 보석들을 보며 내 머리 색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 그가 이것을 내게 선물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왜냐면 충분히 분홍색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색이었으니까.

갖고 있다가 나중에 여주에게나 주겠지 싶었는데.

그랬는데…….

‘그러고 보니 벌써 두 번째 선물이잖아.’

값비싸 보이는 스카프와, 마법까지 새겨진 팔찌.

고개를 들어 다시 데릭의 푸른 눈을 보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왜요?”

그래서였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 나간 건.

“……뭐?”

“왜 제게 이런 걸 주세요?”

나는 그렇게 물어보며 다시 한번 팔찌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최상등품의 가넷으로 바꿨다더니, 어둠 속에서도 진분홍빛의 작은 보석들이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액세서리에 별로 관심 없는 나조차도 혹할 만큼 팔찌의 자태가 참 고왔다.

하지만 팔찌를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의문과 의심부터 앞섰다.

이미 놈과 레널드에겐 전적이 있었으니까.

- 천박한 것.

페넬로페의 기억에 새겨진 그 오물 보는 것 같던 눈빛.

“제가 사치를 부리는 것을 싫어하셨잖아요.”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내 말에 왜인지 데릭은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좋아해요.”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게임에서도 페넬로페는 화려한 액세서리라면 사족을 못 썼다.

하지만 그건 고독과 서러움을 채우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뿐.

“남의 것을 훔치지도, 빼앗지도 않은 온전한 제 보석들을요.”

그런 나를 그토록 경멸하던 네가, 왜 이런 걸 주는지 모르겠어.

데릭이 내 말을 어디까지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내 말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지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는 것과.

“갖기 싫으면,”

“…….”

“버려.”

그는 팔찌를 얹어 놓았던 건틀릿을 손쉽게 뒤집었다.

반짝이는 백금 줄이 땅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대로 더러운 흙바닥을 뒹굴었다.

황당한 그의 행동에 버벅대는 사이, 데릭은 몸을 돌려 빠르게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따라가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는 순간이었다.

〈SYSTEM〉 [데릭]과 함께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 성공!

〈SYSTEM〉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불현듯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허.”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퀘스트 아직도 안 끝났어?”

분명 이전에 또 한 번 하겠냐는 물음에 확실하게 ‘거절’을 눌렀었는데, 왜 멋대로 성공이 되냔 말이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예.]를 눌렀다. 네모 창 안의 글씨가 빠르게 바뀌었다.

〈SYSTEM〉 보상으로 [데릭]의 [호감도 +3%]와 [마법 팔찌]를 얻었습니다.

“참나, 이게 기타 보상이라고?”

‘호감도 외 기타’라고 적혀 있는 건 기억하고 있었지만, 호감도 말곤 필요한 게 없었기에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었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흙바닥을 뒹굴고 있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못 돼먹은 놈.”

결국 바닥에 쭈그려 앉아 떨어진 팔찌를 주웠다.

“그렇다고 진짜로 버리냐?”

‘후, 후’ 하고 바람을 불어 묻은 흙을 털어내던 나는, 갑자기 보상이랍시고 이런 거나 받아야 하는 내 처지가 너무 처량 맞아 서글퍼졌다.

“그냥 좋게 선물이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냐고.”

[호감도 20%]

나는 점점 더 작아지는 흰 글씨를 보며 불만스럽게 꿍얼거렸다.

* * *

근 한 달간의 길고 길었던 축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지금껏 행해졌던 것보다 더욱 화려한 퍼레이드, 곡예단, 불꽃놀이 등등 갖가지 볼거리가 열릴 것이라고 에밀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같이 나가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가볍게 무시하고 늦잠을 잤다.

느지막이 일어나 샌드위치로 간단히 아침을 때운 나는,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았다.

이곳으로 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자의든 타의든 축제 기간 내내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다 부딪힌 것을 보니, 게임의 큰 에피소드 하나를 넘긴 시점 같았다.

“……그래도 아직 목이 붙어 있긴 하네.”

처음에 왔을 땐 정말이지 하루하루 가죽을 고비 같았다.

물론 요즘도 썩 고비를 넘겼다곤 할 수 없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

‘중간 점검을 해 둬야겠어.’

나는 서랍을 열고 깊이 숨겨 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처음 이곳에 와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적어 뒀던 남주들의 기본 설정이었다.

나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 기존에 적어 뒀던 초기 호감도와 최근 근황을 적기 시작했다.

「 데릭 에카르트 0%→20%

레널드 에카르트 -10% → 10%

칼리스토 레굴르스 0%→2%

이클리스 0%→25%

뷘터 베르단디 0%→15% 」

이렇게 한눈에 볼 만큼 적어 두고 보니 확실히 처음과는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였다.

“의외네.”

데릭과 레널드의 호감도를 보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레널드.

다른 남주들에 비하면 턱없이 저조한 호감도였지만, 마이너스로 시작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20%’나 상승한 것이다.

데릭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자주 마주쳐서 그런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의 의외의 선방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에 적어 둔 종이만 봐도 놈들의 이름엔 두 번 고려한 흔적 없이 엑스를 쳐 놨었다.

하지만 이 둘의 호감도가 앞서가고 있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만나지 않았을 때 호감도가 소폭 상승했었으니까…….”

페넬로페를 ‘극혐’하는 감정에서 그냥 ‘싫어하는 것’쯤으로 완화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본래의 가짜 공녀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계속 마주치는 횟수를 최소화하면 유지는 할 수 있겠어.”

노멀 모드에서 기본으로 주어지는 호감도가 ‘30%’였던 걸 생각하면 둘 다 안정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겐 ‘리셋’이 없으므로, 위험을 감수하고 더 나서서 호감도를 올릴 생각도 없었다.

찍찍- 나는 전과 같이 데릭과 레널드의 이름 위에 단호하게 엑스를 그었다.

“다음, 황태자.”

이놈은 뭐, 잠깐의 고려 대상조차 못 된다.

나는 틈도 없이 바로 엑스를 여러 번 쳐 놓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곧바로 펜을 든 손이 멈칫했다.

“이클리스…….”

계획대로 이클리스는 현재 호감도 1위였다.

이제 5%만 더 올리면 노멀 모드의 기본 호감도는 채운다.

다른 남주들에 비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클리스의 호감도는 상승 폭이 매우 큰 편이었으니까.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엔딩을 보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 이후로 바빠서 통 찾아가질 못했네…….”

지이이익, 지이이익.

이클리스의 이름 주변으로 날카로운 펜촉이 끊임없이 원을 그렸다.

사실 입으로는 바쁘다고 했지만, 뷘터를 만난 날을 제외하곤 그렇게 바쁜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찾지 않은 것은.

‘……왜 이렇게 찜찜하게 느껴질까?’

호감도와 달리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눈 깜짝할 새 겨눠진 목검, 당장이라도 죽여야 할 적처럼 보는 섬뜩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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