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9화
‘으으.’
반사적으로 몸서리가 쳐진 나는, 왼손에 끼어 있는 루비 반지를 어루만지며 애써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개가 주인을 물려는 순간 목줄을 잡아당기면 돼.”
물론 목줄이 개의 목을 조르는 순간 호감도 폭락도 감수해야 했지만.
‘하나뿐인 돌파구인 줄 알았는데 왜 자꾸 모 아니면 도처럼 느껴지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불안한 생각을 떨쳐 냈다. 그리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뷘터 베르단디.”
처음으로 호감도 폭락의 공포를 맛보게 해 준 캐릭터였다.
이미 그 순간 뒤도 돌아보지 말자고 마음먹었었는데, 막상 ‘15%’란 수치를 보니 좀 고민이 들었다.
뷘터는 여주와 가장 빨리 접촉한다는 단점도 컸지만, 이 다섯 명 중 가장 정상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장점도 컸다.
톡, 톡, 톡, 톡. 펜 끝으로 종이를 찍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하…….”
나는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펜을 집어 던졌다.
“왜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 거야…….”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남들한테 들키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들을 끄적이던 중이라 나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목소리가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누구지?”
“펜넬입니다, 아가씨.”
집사였다.
“……기다려.”
나는 비죽 웃으며, 여유롭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들을 정리하여 서랍 깊숙이 집어넣었다.
들고 있던 펜까지 펜꽂이에 꽂아 넣은 후에야 방문을 허락했다.
“들어와.”
달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면서 집사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공작님께서 오랜만에 같이 오찬을 들자 하신다는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오찬?”
눈을 껌뻑였다. 생소한 말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나는 매번 방에서 홀로 식사를 해결해 왔다.
내가 아는 귀족의 정찬에 비하면 솔직히 터무니없는 식단의 연속이었지만 나름대로 만족했다.
처음처럼 썩은 음식을 먹거나 굶는 것보단 나았기 때문이다.
괜히 공작, 그리고 그의 아들놈들과 부딪힐 일 없고. 내게 찔리는 것이 많은 에밀리가 성심성의껏 시중도 들어 준다.
‘얼마나 완벽한 혼밥이야.’
굳이 1층 식당까지 내려가 불편한 사람과 마주하며 꾸역꾸역 점심을 먹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공녀 자리를 꿰찬 나를 극히도 싫어하는 고용인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먹는단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더부룩했다.
“……지금껏 그래 온 것처럼 난 그냥 방 안에서 혼자 먹어도 상관없는데.”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서 적당히 거절을 돌려 말했다.
“아직 자숙 기간이 확실하게 끝난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아가씨께서도 꼭 참석하라 명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도’라면…… 오라버니들도 모두 참석한다는 소리야?”
“물론이지요.”
망했다. 나는 와작 구겨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다잡았다.
공작과 데릭의 최측근 앞에서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후……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 식당으로 가기 전에 시킬 일이 하나 있는데…….”
“하명하십시오, 아가씨.”
내 말에 노 집사는 눈빛을 달리했다.
“혹시 소화제 있으면, 오찬이 끝나고 내 방에 가져다주겠어?”
“……소화제 말입니까?”
아직 밥도 먹지 않았는데 뜬금없는 소화제 타령에 집사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응.”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난 지금부터 급체할 예정이거든.
집사를 따라 방을 나섰다.
이미 오찬 준비가 모두 끝나고 아래에서 다들 나를 기다리는 상황이라 했기 때문이다.
거절할 수 없는 일방적인 통보에 준비를 핑계로 미적거릴 새도 없었다.
“요즘 공작님께서 황궁의 일로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침묵에 잠긴 채 복도를 걸어가던 중, 집사가 문득 내 보폭을 맞추며 말을 걸었다.
공작이 바쁜지 몰랐다. 귀가가 늦는 눈치긴 했지만 별로 관심 없었다.
“부쩍 그러신 것 같더군.”
그러나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왠지 모르게 그런 내 얼굴을 집사가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공작님께서 집에 계실 때마다 식사 자리에 꼬박꼬박 참석하지 않으셨습니까.”
“…….”
“혹시…… 식당에서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이어지는 물음에 나는 설핏 미간을 구겼다.
‘……페넬로페가 그랬다고?’
변죽도 좋지. 뭐 좋을 게 있다고 그 자리에 꾸역꾸역 참석했을까.
그래 봤자 받는 것은 무시 아니면 경멸뿐일 텐데.
‘얘는 정말…… 에휴.’
하지만 왠지 그녀가 악착같이 공작의 식사 자리에 참석한 이유를 알 것 같아 함부로 비난할 수 없었다.
과거, 늘 포기가 빨랐던 나는 절대로 페넬로페처럼 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참함이 덜한 것도 아니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식기 소리, 서로를 향해 묻는 간단한 하루의 안부, 나만 빼놓으면 흠잡을 데 없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가씨. 페넬로페 아가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계단 앞에 도달한 펜넬이 대답 없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편한 일 없었어.”
나는 그가 이상하게 여기기 전에 앞서 계단을 내려가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잘못을 저질러서 근신하는 중이었으니 식사도 방 안에서 해결하는 게 마땅한 일이지.”
“정말 그런 생각을 다…… 아니. 아닙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페넬로페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게 어지간히도 놀랄 일이었는지 집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답지 않게 말실수를 했다.
그는 황급히 하던 말을 멈추고 화제를 돌렸다.
“아가씨께서 통 방 밖을 나오시지 않으니 공작님께서 많이 적적해하셨습니다.”
“…….”
“식사 자리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무라시지는 않을 겁니다.”
집사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키우던 개도 제집을 나오지 않으면 한 번쯤 들여다보기 마련이거늘.
이 집 가장은 적적함은 느껴도, 본인이 직접 입양한 막내딸이 방구석에서 밥을 먹는지 굶는지 들여다볼 성의는 없는 모양이다.
“글쎄. 첫째 오라버니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건…….”
내 자조적인 물음에 집사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내가 한발 더 빨랐다.
“열어.”
어느덧 식당에 당도한 상태였다.
식사 시중을 위해 굳게 닫힌 문 옆에 공손히 서서 대기하고 있는 고용인들에게 오만하게 턱짓했다.
고개를 조아리며 내 명령에 순응하면서도 나를 흘기는 눈들이 곱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시시콜콜한 엑스트라들까지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었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내가 진짜로 상대해야 하는 인간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장 상석에 앉은 무뚝뚝한 얼굴의 중년 사내와 그의 오른편에 나란히 앉은 [호감도 10%], [호감도 20%].
“시간관념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왜 이렇게 늦어?”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호감도 10%]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시비를 걸었다.
지옥에서 하는 만찬의 시작이었다.
놈들이 공작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왼편으로 이동했다.
뒤따라와 의자를 빼 준 집사는, 내가 완벽히 착석한 것을 확인한 후 물러났다.
내 발로 걸어왔는데 꼭 압송되어 온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찬이라더니, 정말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려도 놨네.’
이곳에 온 후 구경도 해 보지 못한 호화로운 음식들의 향연이었다.
물론 2층의 방 안에서 해결해야 하니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음식들을 먹는 건 당연히 힘들겠지만, 새삼 페넬로페의 위치가 실감 났다.
멍하니 음식들의 가짓수를 새고 있을 무렵, 상석에 앉아 있던 공작에게서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들지.”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귀족들의 식기 사용 순서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어차피 페넬로페는 평소에 그렇게 상식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예절을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크게 흠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더 떨어질 평판도 없어서 그 점은 참 다행이네.’
나는 곁눈질로 다들 스푼을 드는 것을 확인하고 따라 들기 위해 내 앞에 세팅된 식기를 내려다보았다.
“……하.”
그리고 곧바로 서늘한 웃음이 튀어 나왔다.
내게 주어진 식기들은 모두, 막 포크질을 배우는 어린아이들이 놀잇감으로 쓸 법한 것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내 웃음소리를 들은 건지, 바로 옆에 있던 공작의 날카로운 눈이 내게로 꽂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식기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저들은 내가 어떤 스푼을 들고 밥을 먹던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바로 옆에 있는 공작부터 벌써 알아보았겠지.’
주방에 있는 누군가가 감히 공녀의 밥상에 이런 장난질을 쳐 놓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