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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40화 (4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0화

나는 인형 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가장 큰 스푼을 들어 보았다. 놓여 있는 것들 중 가장 컸지만, 티스푼보다 작았다.

그것으로 스프를 떠 보았으나 쥐꼬리만큼 떠질 뿐이었다.

포크는 샐러드의 양상추조차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나마 크기가 괜찮은 나이프는 날이 얼마나 무딘지 부드럽게 구워진 고기의 겉면조차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재밌네.’

나는 장난을 치듯 번갈아 가며 식기들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들로 내 앞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을 쿡쿡 건드려 보았다.

이왕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이렇게 주방의 상황이 열악한데 에밀리는 대체 어떻게 음식들을 그렇게 열심히 날랐지?’

생각해 보니 그랬다.

썩은 음식이 배급돼도 주방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타격 하나 받지 않을 만큼 공녀의 대우가 형편없는 마당에.

에밀리는 내 협박을 받고 난 이후 꼬박꼬박 멀쩡한 음식들을 가져왔다.

게다가 가끔 먹고 싶은 음식을 얘기하면 어설프게나마 만들어 오기까지 했다.

‘……방으로 돌아가면 상이라도 줘야겠네.’

그간 에밀리에게 철벽을 세운 게 좀 미안해졌다.

더불어 접시 위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식기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를 한번 죽여 놓는 게 좋겠어.’

결국, 나는 단 한 입도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예상대로 내가 밥을 먹는지,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지 공작과 두 오라비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것이 페넬로페의 위치였다.

“벌써 축제가 끝이 나는군.”

어느 정도 식사 시간이 무르익었을 때였다. 공작이 포도주로 목을 축이며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하필 첫 표적이 나였다.

“마지막 날인데 외출은 안 하는 것이냐.”

“네.”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태인 나는 퉁명스럽게 즉답했다.

페넬로페는 축제 마지막 날에 꼭 밖으로 나돌아 다녔나 보다.

난 그럴 마음도 없었고, 맛있는 것들을 앞에 두고 손도 대지 못해서 기분이 바닥을 기는 중인지라 공작의 비위를 맞춰 주기 싫었다.

하지만 내 싸늘한 태도에 곧바로 첫째 놈과 둘째 놈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호감도가 깜빡인다.

‘어휴, 칼 같은 놈들.’

나는 애써 나오지도 않은 미소를 쥐어짜며 공작을 다시 바라보았다.

“근신 중이잖아요.”

“쯧, 그놈의 근신 타령은 오래도 써먹는구나.”

내 대답이 영 못마땅한 듯 공작은 혀를 찼다.

“노예 새끼 하나 때문에 근신까지 자처하는 병신은 또 처음 보네.”

레널드가 빈정거렸다. 늘 있는 일인 듯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누군가 저놈의 주둥이를 틀어막아 줄 거란 기대도 없었기에,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속으로 중지를 날렸다.

“오늘 오찬을 하자고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러는 중 공작이 이 자리에 나까지 부른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곧 있을 사냥 대회 때문이다.”

‘……사냥 대회?’

나는 곰곰이 게임 내용을 생각했다. 그런 것도 있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황궁의 북쪽 숲에서 열릴 예정인가 보더군.”

그사이 공작이 우아하게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알겠지만, 이번 사냥 대회는 의미가 크다. 황태자가 선봉에 선 전쟁으로 속국이 된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도 참여하는 데다, 각국을 대표하는 희귀한 동물들을 풀어 놓기로 하였으니까.”

“…….”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를 지지하는 놈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이런 때일수록 위상을 공고히 다져 놓는 것이 좋겠지.”

“…….”

“하여, 엊저녁 귀족 회의에서 이번 사냥 대회에 에카르트 또한 참석하겠다는 태도를 밝혔다.”

위상이고 뭐고 어차피 나와 관계없는 말들이었다.

공작의 말을 반쯤 흘려듣던 중 불현듯 게임 속의 ‘사냥 대회’가 떠올랐다.

[잉카 제국은 분기마다 사냥 대회를 개최한다. 각 패전국의 희귀한 생물들 혹은 노예들을 학살하며 간접적인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노멀 모드를 플레이하면서 짤막하게 배경 설명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주는 이때 사냥 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귀환한 ‘진짜 공녀’에게 남주들의 관심이 쏠릴 것을 시샘한 페넬로페가 남몰래 독약을 먹였기 때문이다.

사경을 헤매느라 사냥 대회에 가지 못한 여주는, 대신 저택에 남겨진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실컷 올렸다.

페넬로페가 가졌던 마지막 희망마저 떠난 순간이었다.

이후 잔혹한 제국의 악행을 보다 못한 천사 같은 여주가 황태자를 설득하면서 사냥 대회는 사라진다.

그리고 황태자 루트의 엔딩 때 페넬로페는 여주에게 저지른 만행들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끔찍한 고문을 받는다.

죽지 못하도록 산 채로 심장을 얼린 후, 그간 여주에게 먹였던 독들을 차례대로 먹이는 고문이었다.

독기로 인해 처참하게 녹아내리던 페넬로페의 얼굴.

‘으으!’

생생한 일러스트 장면이 잇따라 떠오르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서리쳤다.

그때였다. 귀족 회의 어쩌고 이야기하던 공작이 문득 내게 시선을 돌렸다.

“페넬로페.”

“네, 네?”

그가 하는 말을 전혀 귀담아듣고 있지 않던 나는 지레 놀라 바보같이 말을 더듬고 말았다.

다행히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회의에서 네 참가 금지를 해제하는 쪽으로 표결이 났다.”

“참가…… 금지요?”

“그래. 어찌할 생각이냐.”

나는 공작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참가 금지 해제는 또 뭐야?’

이전의 페넬로페가 사냥 대회에 참가해서 어떤 행패를 부렸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가 머뭇거리고만 있자, 공작이 재차 참여 여부를 물었다.

“참가할 것이라면 네 사냥 도구들도 손질하라고 전해 두마.”

“아버지!”

그때였다. 쾅, 분홍 머리가 식탁을 거세게 내리치며 험악하게 소리쳤다.

“저 미친년, 아니, 저 계집애가 작년에 어떤 짓거리를 했는데 그걸 다시 쥐여 준다는 말을 해요!”

“레널드.”

공작이 혀를 차며 둘째 아들을 불렀다.

“그때 귀족 영애들이 몰려다니면서 사냥 대회 때마다 저 망나니 같은 계집을 지하 감옥에 가둬 두라고 청원하던 걸 생각하면……!”

그러나 공작의 만류에도 레널드는 끝까지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치를 떨었다. 처죽일 역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일단 어떤 상황인지 파악해야 한다. 나는 페넬로페처럼 뻔뻔하게 나갔다.

“내가 뭘?”

“몰라서 묻냐?”

그럼 몰라서 묻지, 알면 묻겠냐?

얄밉게도 답하는 레널드 놈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꾹 참아야 했다. 놈을 도발해서 일의 전말을 알아야 하니까.

그러나 정작 내가 원하는 답은 예상치 못한 이에게서 들려왔다.

“다른 집 여식들은 관심도 두지 않는 석궁을 제작해 달라고 졸랐지.”

레널드에 비하면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첫째 놈이 새파란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조곤조곤 입을 털었다.

“위험하니 놓고 가라 해도 기어이 들고 가더니, 티파티에서 켈린 백작 영애와 그 무리들을 쏴 죽이겠다고 날뛰다가 근위병들에게 짐승처럼 제압당한 것을 벌써 잊었나 보군.”

“그래서 한동안 에카르트에서 미친 침팬지에게 석궁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지.”

데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널드 놈이 차갑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망할…….’

빼도 박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행패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각오했던 만큼 놀랍고 충격적이진 않았다.

‘하긴, 게임 속 최고 악녀인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개강 총회 때마다 보는 몇몇 진상들처럼 술에 잔뜩 취해서 바닥을 기어 다닌 것도 아니고, 충분히 수습 가능한 선이었다.

“그만들 해라. 저도 충분히 반성했을 테니.”

내가 침묵하는 사이, 공작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나를 까 내리는 두 놈을 말렸다.

이미 면박받을 만큼 받은 후였지만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두 아들 놈들이 입을 다물자 공작은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경고했다.

“에카르트의 입은 무겁다는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겠지, 페넬로페.”

“그럼요. 이번에는 실망하실 일 없을 거예요, 아버지.”

나는 냉큼 답했다. 약이 오르는지 한쪽에서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이것으로 얘기는 끝마치도록 하지.”

긴히 전할 말은 모두 끝이 났는지, 공작이 가볍게 식탁 위에 놓인 종을 쳤다.

그러자 식당 문이 열리고 카트를 끈 고용인 한 명이 들어왔다. 후식 대령이었다.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뭔 놈의 후식이야.’

나는 음울한 눈으로 각각 다른 후식을 내려놓는 고용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나 부인이라 불리는 중년 여성은 오랫동안 공작가 주방의 총책을 도맡아 왔다.

그리고 그만큼 모시는 이들의 음식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공작과 데릭 앞에는 홍차가 담긴 찻잔이, 레널드의 앞에는 수제 쿠키가 놓인 접시가 놓여졌다.

그다음은 내 차례였다. 난 원래 디저트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거나 줘도 상관없었다.

‘뭐야.’

하지만 앞에 내려진 접시를 보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몰랑몰랑한 밀크 푸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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