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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41화 (4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1화

“푸흡.”

후식을 내려놓던 여자가 약간의 먹은 흔적도 없이 깨끗한 내 식기들을 보며 조소를 흘렸다.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눈이 마주쳤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 반달로 휘는 눈에 조롱이 가득했다.

‘오호라…… 한번 해 보자, 이거지?’

나는 그녀가 자리를 뜨기 전에 재빨리 가장 작은 스푼부터 바닥에 떨어뜨렸다.

딸그랑-.

대리석과 쇠가 맞부딪히며 제법 큰 소음을 냈다. 당연히 식당 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어머, 미안. 손이 미끄러져 버렸네?”

“…….”

“주워서 가져가겠어?”

나는 호들갑스럽게 사과하며 바닥을 눈짓했다.

도나 부인은 내 돌발 행동에도 태연했다.

이래 봤자 네가 어쩔 수 있겠냐는 듯, 몹시도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럼요. 괘념치 마세요, 아가씨.”

페넬로페였다면, 도나 부인의 머리 위에 수저를 집어 던지고 벌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까?

‘아니.’

나는 단언했다.

집사의 말을 통해 알게 된 그녀는, 그간 초대받지 않은 공작의 식사 자리에 꼬박꼬박 참여해 왔었다.

즉, 그 시간 외에 아무도 그녀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다.

저만 쏙 빼놓고 단란한 대화가 오가는 가족 식사 자리.

소외감과 비참함을 감수하면서도 억지로 끼어 앉은 자리다.

한데 식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패악을 부린다면 공작은 다시는 그녀와 겸상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페넬로페는 이를 잘 알았다. 때문에 필사적으로 배고픔과 분노를 참았을 것이다.

이 자리마저도 참여하지 못하면, 가족을 마주칠 일이 영영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난 아니지.’

나는 호들갑을 떨었던 게 무색할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수그린 도나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딸그랑-!

“어머나! 미안. 또 미끄러져 버렸어.”

내가 떨어뜨린 스푼을 들고 막 일어나던 도나 부인의 앞에 두 번째로 작은 스푼이 떨어졌다.

관심을 끄던 인간들의 이목이 다시 내게로 휙 쏠렸다.

공작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쯧, 칠칠치 못하게 뭐 하는 짓이야.”

“죄송해요. 푸딩이 말랑해서 자꾸 스푼이 엇나가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데릭의 서늘하게 식은 푸른 눈이 내게로 고정되었다. 레널드도 별 다를 바 없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도나 부인은 불만 없이 옆에 떨어진 두 번째 스푼도 집어 들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셔…….”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인사를 하던 순간이었다.

딸그랑, 땅, 땅-.

나는 아예 대놓고 마지막 스푼을 바닥에 던졌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작의 낯빛과 음성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 너 뭐 하냐?”

레널드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고, 데릭은 눈살을 한껏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놈들의 머리 위 흰 글씨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끼익- 나는 시끄럽게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푼이 더 없어서 아쉽게도 후식은 못 먹겠어요.”

“앉아.”

“하실 말씀 끝나셨으면 그만 방으로 올라가 볼까 해요.”

공작의 얼굴에 점점 노기가 감돌았다.

“버르장머리 없이, 오래간만의 오찬 자리에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너무 배가 고파서요, 아버지.”

나는 과장되게 배를 부여잡았다. 생뚱맞은 내 말에 공작과 남주 놈들의 눈살이 꿈틀거렸다.

“……뭐?”

“저는 세 살배기만큼 식기를 사용하는 데 서툴러서 이런 음식들은 한 입도 먹을 수 없어요.”

정말 어린애라도 된 양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내 앞을 보란 듯이 훑어보았다.

손 하나 대지 못한 음식들은 아직 식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대로 내가 방으로 올라가면 모조리 고용인들의 차지일 것이다.

멍청한 페넬로페는 매번 생으로 굶어 가며 아랫사람들을 포식시켜 주었겠지.

“그렇지, 부인?”

나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도나 부인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 아가씨…….”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에 사색이 되었다. 아까 전의 당당함과 조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꼴이 우스웠다.

식당에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자그마한 장난감 식기들과 손댄 흔적이 없는 메인 디쉬.

양념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앞접시는, 자리에 불만이 있지 않고서야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힘들 만큼 깨끗했다.

나는 이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보지 않아도 잘 알았다.

“전 이제 올라가서 에밀리에게 샌드위치나 가져다 달라고 하려고요.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게요.”

“…….”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버지, 오라버니들.”

이번엔 아무도 나를 붙들지 않았다.

스스로 닫힌 문을 열고 식당을 빠져나오는데, 문득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한텐 석궁으로 쏴 죽이네, 마네 했다더니…….’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그런 악독하기 짝이 없는 악녀가 고작 이런 걸 못 해서 꼼짝없이 당하고 있던 것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만은 그런 페넬로페를 비웃을 수가 없었다.

배고픔을 꾸역꾸역 참아 가며 끝까지 저 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가 너무 한심하고.

가여워서.

곧장 방으로 올라온 나는 책장에서 읽던 책을 꺼내 들고 책상에 앉았다.

배가 고프다며 당당히 식당을 빠져나왔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고프진 않았다.

그보다는 솔직히 깽판을 치고 나온 후 남주 놈들의 호감도에 영향이 있을까 걱정되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변동은 없었는데…….’

공작과 도나 부인을 신경 쓰느라 놈들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설마, 버릇없이 스푼을 집어 던졌다고 호감도가 떨어지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이내 태평하게 마음먹었다.

“좀 떨어져도 뭐, 별수 없지.”

안일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엑스 친 놈들이니 얼마 정도 변동이 생기는 건 상관없었다.

‘죽을 만큼의 폭락만 아니면 돼.’

그렇게 걱정을 떨쳐 낸 나는 애써 책 내용에 집중했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신원을 밝혔다.

“아가씨, 저예요.”

“들어오렴.”

에밀리였기에 나는 흔쾌히 출입을 허용했다.

방문을 연 그녀는 뚜껑이 덮인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독서 중이세요?”

“그건 뭐야?”

흘깃 눈짓하며 묻자, 그녀는 책상 위에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와 스테이크, 샌드위치가 정갈히 놓여 있었다.

나는 곧바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스테이크 접시가 만찬에 있던 것과 똑같은 플레이팅이었기 때문이다.

“공작님께서 지시하셔서 새로 만든 것이에요, 아가씨.”

그새 일의 전말을 전해 들은 건지, 에밀리가 내 눈치를 슬슬 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집사님께서 아가씨께 꼭 챙겨 드리라고…….”

자그마한 갈색 병, 소화제였다.

“됐어. 별로 먹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가지고 나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먹은 것이 없으니 체할 일도 없었다.

도로 가지고 가라는 내 말에 에밀리는 울상을 지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 하셨다면서요. 배고프시잖아요. 얼른 드셔요, 아가씨.”

“괜찮아. 그리고 아까 먹었잖아.”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오늘뿐만이 아니라, 항상 그래 왔지.”

나는 책을 탁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네가 가져다준 음식 중 제대로 된 귀족의 식사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었니?”

“아, 아가씨…….”

에밀리는 내 싸늘한 기색에 어쩔 줄을 몰랐다.

괜한 화풀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에밀리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간 내게 충분히 잘해 주었다.

한두 가지의 접시와 디저트가 전부인 식사에 크게 불만이 있던 것도 아니다. 굶지 않는 게 어딘가.

그런데도 내가 처한. 아니, 페넬로페가 처한 이런 상황과 배경이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거 들고 그만 나가 봐. 지금은 네 얼굴도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에밀리는 결국 침울한 얼굴로 쟁반을 도로 가지고 나갔다.

제 딴엔 걱정이 돼서 챙겨 준 이한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미안한 마음은 안 들었다.

나는 식당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차오르던 감정을 꾹꾹 내리누르며 다시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다시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짜증 나.”

책상 앞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침대로 가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호화롭고 고풍스러운 방 천장이 보였다.

정작 방 주인은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처진데, 겉만 그럴싸하게 포장해 놓은 것 같아 우스웠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거지 같은 일을 겪어야 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게임에 빙의됐다면, 이렇게 넓고 호화스럽게 꾸며진 방을 보고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에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본가에서 지내던 곳 또한 남부럽지 않을 만큼 호화롭고 넓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화려한 방에서 살던 나는, 당장 다음 날 먹을 것을 걱정했었다.

둘째 개새끼가 졸업한 후, 학교에서의 왕따는 정점에 달했다.

계속 줄을 새치기당해 가장 늦게 급식을 먹는 건 기본이었고, 일부러 어깨를 쳐서 식판을 쏟게 만드는 건 예삿일이었다.

온종일 쫄쫄 굶고 집으로 가도 바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나만 빼면 단란한 가족 식사에, 굳이 꾸역꾸역 참석하지 않았기에.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탈출에 성공한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왕 버틸 거 밥이라도 든든히 먹으면서 버틸걸.

하녀라도 있는 페넬로페와는 달리 내겐 따로 밥을 챙겨 주는 사람도 없었다.

도우미 아줌마는 설거지를 마치면 바로 퇴근하곤 했으니까.

악착같이 주린 배를 쥐고 참다가, 그 집 인간들이 식사를 끝내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서야 슬며시 부엌에 갔다.

그리고 식어 빠진 국에 밥을 말거나 혹은 커다란 양푼에 남은 반찬들을 쏟아붓고 비벼 허겁지겁 퍼먹었다.

그런데 그조차 온전히 먹을 수 있을 때보다 한 입도 제대로 못 먹고 뱉어 낼 때가 많았다.

- 우욱!

남은 국이나 반찬에는 식초, 설탕, 소금, 젓갈, 때론 뭔지도 모를 것들을 섞어 놔 끔찍한 맛이 났다.

둘째 개새끼가 한 짓이었다.

- 거지 같은 년. 그러니까 왜 쥐새끼처럼 몰래 처먹냐?

그놈은 가끔 숨어서 그런 나를 지켜보다가, 낄낄거리며 튀어나와 빈정댔다.

그래서 나는 그 망할 곳에서 탈출할 때까지 영양실조와 만성 위염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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