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42화 (4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2화

“……정말 거지 같았네.”

과거를 회상하던 나는 힘없이 웃었다.

어쩌면 나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가짜 공녀’ 처지가 훨씬 괜찮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됐어, 땅 파는 짓 그만해.”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일수록 몸을 움직여야 했다. 가만히 있어 봤자 우울한 생각에 잠식될 뿐이다.

나는 숄을 하나 꺼내 들고 방 밖을 나섰다.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서였다.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서던 참이었다.

“……아가씨.”

하필 위층에서 내려오던 집사와 딱 마주쳤다.

그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딜 가시는 중이십니까?”

“집 밖에.”

“이스트 힐로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가시려고요?”

“……이스트 힐?”

반문하던 나는 곧바로 그곳이 어딘지 기억해 냈다.

얼마 전 데릭에게 끌려갔다가 홀로 내려왔던 작은 언덕이었다.

페넬로페는 매년 축제의 마지막 날에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외출을 했었나 보다.

공작이 식당에서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게 됐다.

“아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것 하나 보자고 거기까지 갔다 올 만큼 낭만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이번엔 어쩐 일로…….”

“귀찮아.”

집사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작년까지 꼬박꼬박 나가던 애가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니 퍽 당황스러울 수도.

하지만 상관없었다. 악녀는 원래 변덕이 죽 끓듯 끓기 마련이다.

“승전 기념으로 이번 축제의 피날레는 작년보다 훨씬 성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만…….”

“불꽃놀이가 다 거기서 거기겠지.”

집사가 왜 나를 붙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까 오찬 자리에 그 또한 있었기 때문에 마주하기 영 껄끄러웠다.

“그럼 수고해.”

나는 곧바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페넬로페 아가씨.”

하지만 다급하게 나를 붙드는 목소리로 인해 계단을 내려가지 못했다.

“……왜?”

한 층 내려선 채 나는 우뚝 멈춰 그를 돌아보았다.

노집사는 답지 않게 잠시 주저주저하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지시로 지금 다락방을 정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

“아가씨께 그 사실을 전달드리러 가던 중이기도 하고요.”

“내게?”

나는 집사가 내게 왜 그런 말을 전달하는지 의아했다.

다락방으로 가는 통로는 3층 복도 끄트머리에 있었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왜?”

“……어린 시절에는 자주 오르셨지 않습니까. 처음 공작저에 오셨을 때도 다락방에서 불꽃놀이를 보셨었지요.”

“…….”

“공작님께서도 아마 그것을 기억하고 계시기에 제게 다락을 치우라는 지시를 내리신 게 아닐지…….”

“말은 바로 해야지, 집사.”

나는 비식, 웃음을 터뜨리며 차갑게 그의 말을 잘랐다.

“나는 그간 오르고 싶어도 오를 수 없는 처지였어. 내가 거길 자주 오르는 게 불편했던 누구 덕분에 3층이 폐쇄되고, 난 다락방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되었잖아.”

“…….”

그의 입이 다물렸다. 평소와 같으면 이렇게까지 공격적이지는 않았을 텐데.

집사는 하필 마주친 때가 안 좋았다.

과거와 묘하게 겹친 상황 때문에 분노를 가라앉히러 가던 중이었던 나를 붙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 날카로운 지적에 집사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도나 부인은 바로 해고되었습니다, 아가씨.”

그는 어두워진 낯빛으로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크게 노하셔서 퇴직금 한 푼 못 받고 맨몸으로 쫓겨났지요.”

“…….”

“오랜 시간 공작저에서 일해 준 노고도 있고, 몰락한 가문이긴 하나 자작가에 적을 두고 있는 여인이기에 그 이상의 처벌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얼떨떨한 얼굴로 집사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데릭 도련님께서 직접 나서 고용 계약서와 추천장을 불태웠기 때문에 더는 귀족가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 건가?”

나는 눈을 껌뻑이다가 싸늘한 어투로 반문했다.

좀 놀랍긴 했지만, 딱히 기쁠 만한 얘기도 아니었다.

이렇게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왜 지난번에는 아무 조치조차 하지 않았던 건가.

‘조치는 무슨. 에밀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지 읊으면서 조용히 살라고 협박이나 해댔지.’

그때의 데릭을 떠올리니 안 그래도 거지 같던 기분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런 거 일일이 나한테 전달해 줄 필요 없어. 어차피 내 소관도 아닌 문제니까.”

“낮의 일로 공작님께서도 상심이 크셨습니다. 아가씨께서 끝내 식사를 거르신 것도 계속 신경 쓰시는 눈치십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꾹꾹 내리누르며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지금이라도 식당에 내려가서 밥을 먹으면, 아버지의 마음이 좀 풀리실까?”

“공녀님.”

그때였다.

“오늘 일은 다 제 불찰입니다.”

집사가 불현듯 내 앞에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공녀님을 성심성의껏 보필하지 못했던 제 잘못이 가장 큽니다. 제게 따로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

“그렇지만, 아가씨…… 공작님의 성의만은 받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내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사정하는 집사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까 그렇게 식당을 나가시고 어떻게 해야 아가씨의 상한 마음이 풀릴지, 공작님께서 많이 고민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아가씨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것까지 생각해 내셨고요.”

“…….”

“공작님께서 한번 명령 내리신 것을 철회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집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페넬로페가 입양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으로 인해 3층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금한 지 벌써 6년째였다.

그런데 이제 와 그것을 철회하겠다니, 부러 보여 준 학대받는 수양딸의 모습이 여러모로 충격적이긴 했나 보다.

집사는 생각에 잠겨 말이 없는 나를 보고 희망이 있다고 여겼는지, 더욱 바싹 허리를 굽혔다.

“이 늙은이가 직접 폐쇄된 3층을 개방하고 성심성의껏 다락방도 정리했습니다. 그러니 이만 기분을 푸시지요, 아가씨.”

“…….”

나는 대답 없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닌 진짜 페넬로페였다면, 그녀는 참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괴롭힘을 주동하던 인간 중 한 명이 잘리고, 가족들의 관심이 쏠렸다.

평소 고깝게 여기던 집사가 제게 직접 고개까지 조아리니 얼마나 이 상황이 만족스러울까.

하지만.

‘늦었어.’

나는 페넬로페가 아니었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한 번이라도 이래 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이 멍청하고 가여운 계집애는 나와 달리 모든 것을 용서해 주었을 텐데.

‘이미 늦었다고.’

일순,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발견한 집사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아, 아가씨……?”

당황한 그가 완전히 허리를 들 무렴.

“……그래. 내가 어찌 아버지의 성의를 무시하겠어.”

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마침 산책 나가던 길이었는데, 오랜만에 그곳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리고 언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냐는 양, 어느새 오만한 페넬로페로 돌아가 말했다.

“다락으로 안내해.”

3층을 완전히 개방한 것은 아닌 듯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보니 커다란 양 문 하나가 쇠사슬로 칭칭 감긴 채 굳게도 잠겨 있었다.

‘저게 여주의 방이겠지.’

페넬로페의 방도 꽤 좋은 편이었지만, 여주의 방은 문 크기부터 남달랐다.

그게 기분 나쁘거나 서운한 건 아니었다.

‘진짜 딸이랑 입양한 딸이 어떻게 같은 대우를 받겠어. 분수를 알아야지.’

그 앞을 지나는 동안 집사는 유독 뒤를 흘깃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당연하게도 나는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

3층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문을 열자 나선형의 돌계단이 나왔다.

침입을 대비해 세운 포탑(Turret)인 것 같았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아 그런지 다른 곳에 비해 관리가 부실했다.

“턱이 높으니 조심하십시오, 아가씨.”

집사가 먼저 위로 올라가며 내게 주의를 줬다. 나는 치맛자락을 부여 잡고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낡고 좁은 돌탑 꼭대기에 있는 다락이라니.

‘확실히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비밀 장소네.’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한참 후, 마침내 끝에 도달한 듯 계단이 끊기더니 낡은 문이 나왔다.

집사는 익숙하게 그것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던 나는 솔직히 별로 기대가 없었다.

다락이라 해 봤자 창고로 쓰던 장소를 대충 치워 만든 것이지 않겠는가.

‘오.’

그러나 막상 들어선 곳은 의외로 정말 괜찮았다.

작은 서재처럼 다락방의 한쪽 면에는 책장에 책이 가득 들어 있었고, 반대편에는 아늑한 카우치와 벽난로가 자리했다.

정 가운데로는 커다랗고 둥그런 창이 뚫려 있었다.

열린 창틈으로 선선한 바깥바람이 들어와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아가씨, 마음에 드십니까?”

요리조리 둘러보는 내 모습에 집사가 흡족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순순히 답했다.

“괜찮네.”

“다과라도 좀 가져다드릴까요?”

“됐어. 그보다 저녁 늦게까지 여기 있고 싶은데.”

“물론 그러셔도 됩니다. 공작님께서 이미 마음껏 쓰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건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좀 풀린 나는 한결 유순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 집사.”

“별말씀을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아가씨.”

집사는 내게 깎듯이 묵례한 후 다락방을 내려갔다.

나는 고요해진 내부를 다시 한번 둘러보며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페넬로페가 자주 오를 만했네.”

안락하고, 적막하다.

막 공작저로 입양을 와 이유도 모른 채 미움받는 아이가 숨어들기 딱 적합했다.

나는 열려 있는 커다란 창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슬쩍 밖을 내다보았다.

공작저의 부지는 굉장히 넓었다.

때문에, 얼마 전 데릭을 따라 언덕에 올랐을 때처럼 시내 거리가 보이는 건 아니었다.

대신 시야를 가릴 만큼 높은 건물이 없어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정경을 바라보기 좋았다.

나는 담요가 깔린 카우치를 놔두고 창틀 앞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밖으로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넘실거리는 지평선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덜컥-.

불현듯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뭐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