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3화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분홍 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나인 것을 확인한 레널드는 들어서던 몸짓을 멈칫하며 눈살부터 찌푸렸다.
‘쳇, 누군 반가운 줄 아나?’
놈의 머리 위를 흘긋 바라본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집사가 안내해 줘서 왔는데?”
“그런 말이 아니라…….”
레널드는 아래위로 나를 삐딱하게 훑어보다가, 픽 비웃었다.
“넌 3층 출입 금지잖아?”
‘참나! 누구 때문에 출입 금지당한 건데?’
불쑥 억울해진 나는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오늘부로 출입 금지 풀렸어. 아버지가 허락해 주셨거든.”
“아오! 어쩐지 갑자기 안 쓰던 다락방에 대해 묻더니…….”
“그러는 넌 여기 왜 온 건데?”
“난 어떤 병신처럼 출입 금지 아니거든?”
놈이 빈정거리면서 저벅저벅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모습에 절로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달갑지 않은 불청객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내가 먼저 왔어.”
그러니 네가 자리를 피하란 소리였다. 하지만 말을 들어먹을 놈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냐?”
레널드는 거리낄 것 없이 다락 안으로 쑥 들어와 푹신한 카우치 위에 벌러덩 몸을 뉘었다.
그리고 나른하게 내리뜬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넌 거기 맨바닥에 처앉아 있어. 너한테 딱 어울리는 자리네.”
“네 방 놔두고 왜 굳이 여기 있겠다는 건데?”
“이 집 둘째 도련님 맘이다.”
‘아오 씨, 저걸 그냥.’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얄미운 놈의 면상에 꽂아 넣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호감도 10%. 호감도 10%…….’
간신히 얻은 10%다. 유지만이 답이었다.
애써 레널드를 무시한 채, 나는 다시 창밖에 집중했다.
그러나 놈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았다.
“망부석처럼 거기 우두커니 앉아서 뭐 할 건데.”
“불꽃놀이만 보고 바로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아쉽네. 여기선 연무장이 안 보여서.”
놈이 생뚱맞은 소리를 하며 낄낄댔다.
“오늘 축제 마지막 날이라 다른 놈들 다 조기 퇴근했는데, 네가 끌고 온 그 노예 새끼만 지금도 뺑이 치고 있을 거거든.”
“뭐……?”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일순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놈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그 새끼만 혼자 남아서 죽어라고 훈련 중일 거라고.”
레널드는 히죽히죽 웃으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한참 버벅거리다 간신히 물었다.
“……대체 왜?”
“내가 그러라고 시켰으니까.”
‘이런 미친놈!’
뚝, 뚝. 이클리스의 호감도가 수직 하락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란 말인가.
‘안 돼, 내 몰빵!’
나는 당장 그의 호감도를 확인하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다락방을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탁-.
“그 새끼 보러 가려고?”
거칠게 손목이 휘어 잡혔다.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칼이 눈앞에 흩날렸다.
어느새 번개처럼 일어난 레널드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초조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놔.”
“늦었어. 네가 데리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 새끼 나한테 찍혔거든.”
“하…….”
레널드 놈이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눈앞이 아연해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던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억지로 빼내며 신경질적으로 읊조렸다.
“사람이 왜 이렇게 유치해? 마음 좀 곱게 써.”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소름 끼친다, 야.”
그가 과장되게 제 팔을 문질렀다. 나는 그의 머리 위 [호감도 10%]를 곁눈질했다.
‘이 자식이 오늘 뭘 잘못 먹었을까?’
나만 못 먹은 오늘 오찬은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멀쩡하게 식사를 마친 이놈이 이렇게 시비 못 걸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물론 레널드 놈은 평소에도 마주칠 때마다 곧잘 그랬지만, 오늘은 유난히 정도가 심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
“자리 피해 줄 테니까.”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더 부딪혀 봤자 어차피 나만 손해였다.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꺼지라고 말하렴. 얌전히 꺼져 줄 테니까.’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넌 양심도 없냐?”
나를 빤히 바라보던 놈이, 대뜸 맥락 없는 말을 내뱉었다.
“……뭐?”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 와?”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무슨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 구박하는 시어머니 같네.’
레널드를 비웃을 용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헛웃음 소리를 들은 새파란 눈동자에 불꽃이 튀는 게 보였다.
나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린데.”
“요즘 안 하던 짓도 하고 방에 처박혀서 잠잠하길래 얘가 드디어 정신을 좀 차렸나 했는데…… 내가 미쳤지.”
“…….”
“이런 뻔뻔한 계집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는 생각이나 하고.”
나는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내 기분 풀러 와서 왜 이놈의 화풀이나 받아 주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까 집사와의 대화에서 분노를 다 쓴 나는 솔직히 이런 상황이 피곤하고 부담스럽기만 했다.
황태자와 함께 레널드는 최대한 건드리면 안 되는 시한폭탄이었다.
나는 지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레널드.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제대로 해. 갑자기 왜 이러는…….”
“또 여기서 불꽃놀인지 지랄인지 보면서 소원 빌려고 했지?”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득달같이 말을 가로챘다.
“이본이 다시는 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니.”
“…….”
“아예 영영 사라지거나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
“축제 마지막 날 이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네가 6년 전에 여기서 간절히도 빌던 소원 말이야.”
코앞에 있는 레널드의 얼굴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사납게 웃고 있었다. 살기 어린 눈빛이 선득했다.
‘페넬로페가 그런 짓을 했다고?’
나는 내심 놀라 그를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주를 축제 때 잃어버린 건 미처 몰랐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게임의 프롤로그에 스치듯 나왔던 것 같은데, 스토리 진행과는 무관했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이다.
‘……평민에서 하루아침에 공녀가 됐으니, 진짜 공녀가 돌아오지 않길 바랄 만하지.’
어쨌든 나는 페넬로페가 된 처지이므로 그녀의 행동을 납득했다.
사실 하루아침에 부잣집 딸내미가 되는 상황을 이미 겪어 봐서 이해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주의 둘째 오라비는 과거 그런 짓까지 저질렀던 눈엣가시가, 또 다락으로 기어오른 것이 못 견디게 싫은 모양이었다.
“기분이 어떠냐? 네 소원대로 6년째 이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인데.”
레널드의 기세는 데드 엔딩 플래그가 꽂혔다고 해도 믿을 만큼 무시무시했다.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그를 보며 찬찬히 할 말을 골랐다.
‘저 더러운 성질 안 건드리고 최대한 좋게 넘어갈 말이 뭐 있을까.’
하나뿐인 동생을 잃어버린 참담한 날, 그녀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못된 계집까지 맞닥뜨렸다.
‘그런 와중에 원래의 페넬로페처럼 싹수없게 굴었다간 큰일 나겠지.’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죽음에 처하게 할 만한 물건이 주변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다락방 안에는 딱히 날카로운 물건 같은 건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찾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흥분한 레널드가 창밖으로 나를 거세게 밀치거나, 목이라도 조르면 꼼짝없이 죽을 테니.
“……그땐 내가 많이 어려서 그랬 어.”
나는 일단 주춤주춤 창 쪽에서 떨어지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미안해.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그동안 나도 많이 반성했으니까 용서해 줘.”
“반성? 하.”
하지만 레널드는 내가 고심해서 고른 사과에도 화를 풀지 않았다.
“그래. 다 지난 일이니까 물어나 보자.”
“…….”
“왜 그런 짓까지 했냐? 이본이 돌아와도 널 당장 내쫓거나 하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놈을 상대했던 것 중 가장 고난이도의 상황이었다. 순순히 하는 사과도 통하지 않는다니!
‘이제 뭐라고 대답하지?’
내가 했던 것도 아니기에 할 말 고갈이었다.
나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대답해라.”
“미안. 여길 올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하다는 말로 쉽게 넘어갈 일이냐, 너한텐?”
“……레널드.”
“아버지는 어떻게 꼬여 냈는지 끝까지 얘기 안 해 주더라? 어떻게 굴면 그 어린 나이에 공작까지 꼬셔 낼 수 있는지 말 좀 해 줘라. 나도 배우게.”
점점 상황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치달았다. 그의 호감도 게이지가 위태롭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를 노려보는 레널드의 눈가가 어느새 잔뜩 붉어져 있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노을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그만큼 분노해서 충혈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억울하고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지만, 나는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이 상황은 충분히 위험했고, 타파할 수 없다면 빨리 피해야 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철없을 때 그런 짓을 했던 건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하지만 네 동생을 잃어버린 일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
“오늘 여기 올라온 건, 집사가 여기서 불꽃놀이를 보지 않겠냐며 권유해서야. 마침 아버지가 허락도 해 주셨다길래 오랜만에 와 봤고, 금방 다시 돌아가려고…….”
“시끄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