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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44화 (4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4화

레널드가 문득 지겹다는 듯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이본의 대용으로 데려왔다길래 흉내라도 잘 낼 줄 알았는데.”

나는 구구절절 진심을 다해 빌었지만.

“이건 뭐 석궁 쏘는 침팬지 소리나 듣고 앉았지 않나, 근본 모를 노예 새끼를 데리고 와서 안 그래도 없는 평판까지 깎아 먹질 않나.”

언제나 돌아오는 건 괄시와 무시였다.

“언제까지 너 따위가 저택에서 활개 치는 꼴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비웃는 레널드의 얼굴에 누군가의 얼굴이 겹쳤다.

- 내가 왜 집구석까지 와서 거지 새끼가 돌아다니는 꼴을 봐야 해?

귓가에 환청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도 네 면상 같은 거 보기 싫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쫓겨날까 봐.

“……대용?”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간신히 가라앉혔던 아까 전의 일을 떠올리게 만든 걸까.

“네가 언제 대용 취급이라도 해 준 적 있어?”

‘석궁 쏘는 침팬지’가 내 스위치라도 된 것처럼 입이 저절로 주절거렸다.

사과는 듣는 척도 하지 않던 레널드가 내 물음에 곧장 으르렁댔다.

“그럼 근본도 모르는 거지 새끼 주워다가 공녀로 만들어 놨는데, 얼마나 더 취급을 잘해 줘야 하냐? 황녀만큼? 아니면, 황비 대접이라도 해 주리?”

“그래. 한 번이라도 그렇게 좀 대해 봐.”

“……뭐?”

“혹시 알아? 기분 좋으면 내가 사라진 네 동생 흉내라도 내 줄지.”

나는 이를 악물고 빈정대며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웃었다.

반면에 비릿하게 올려졌던 레널드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방 안의 온도가 시시각각 싸늘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시비였다면, 지금의 레널드는 당장이라도 나를 찢어 죽일 수 있을 만큼 흉흉했다.

“야…….”

놈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호감도 -2%’

기어코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고 말조심해라. 네까짓 게 감히 어디서…….”

“왜? 뚫려 있으니까 지껄이기라도 하는 거겠지.”

“야.”

“너는 너만 날 싫어할 수 있는 줄 알지?”

눈앞에 12살의 페넬로페가 그려졌다.

더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나를 멈출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대단하신 공작가에서 쫄쫄 굶길 줄 알았으면 공작님이 아무리 같이 가자고 해도 절대로 오지 말 걸 그랬어.”

“페넬로페 에카르트.”

“어떻게 꼬셨냐고? 별거 없어. 네가 나한테 했던 말처럼 근본 없는 거지 새끼같이 굴었거든.”

“거기까지만 해라.”

레널드가 음산하게 경고했다.

‘호감도 -1%’

호감도가 또 하락했다.

놈은 분노하면서도 내심 당황한 듯 보였다. 경멸하듯 바라보며 빈정거리는 건 언제나 그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으니까.

페넬로페는 화가 나면 괴성부터 지르며 달려들었으니, 이런 내 모습이 놀랄 만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간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고분고분 사과를 해 왔던 내가, 갑자기 돌변한 것에 놀란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다.

“돈 한 푼 없어서 엄마 장례도 못 치르고 몇 날 며칠을 굶고 있는데, 어느 날 네 아버지가 나보고 딸이라고 부르면서 같이 가자더라.”

“…….”

“너, 썩어 가는 시체 옆에서 떨어 지는 빗물 받아 먹어 본 적 있어?”

눈앞에 그려진 12살의 페넬로페는 점점, 14살의 나로 변해 갔다.

“누가 먹다 남긴 다 식어 빠진 잔 반은? 뭘 섞어 놨는지 쓰레기 같은 맛이 나는 음식을 살기 위해서 꾸역꾸역 처먹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

“……야.”

“왜 네 동생이 영영 돌아오지 않길 빌었냐고?”

‘호감도 -1%’

[호감도 4%]

레널드의 호감도는 순식간에 떨어졌다. 죽기 싫으면 당장 입을 닥치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까 봐.”

그러나 나는 잘못했다고 비는 대신 내가 필사적으로 숨겼던 공포, 두려움과 절박함을 드러내길 선택했다.

왜냐하면, 페넬로페라면 그때 그랬을 테니까.

그런 심정으로 진짜 공녀가 돌아오지 않길 신에게 빌었을 테니까.

“오늘은 누가 먹던 음식이라도 떨어뜨려 줬으면 좋겠다고 빌면서, 온종일 길거리나 쳐다보는 거지 같은 삶으로 돌아갈까 봐.”

“……페넬로페.”

“말해, 듣고 있으니까.”

레널드는 숨이 막히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 고요한 절규는 끝났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마주 보았다.

호감도가 이대로 떨어져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어느덧 사라졌다.

당장 죽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길 잃은 분노와 혐오를 받으며 자라났던 어리석고 멍청한 페넬로페를 위해서.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고 그저 끝이 다가오길 조용히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놈의 머리 위가 빠르게 반짝이더니.

[호감도 7%]

“나는, 네가…….”

레널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좀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귀하게 자란 그는 듣도 보도 못한 저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일 테니까.

한참을 어물거리던 그는 어렵사리 한마디를 꺼냈다.

“……네가 그렇게까지 힘든 시절을 보냈을 줄은 몰랐어.”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되었다.

진땀을 흘리며 할 말을 고르던 방금 전의 나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레널드를 보자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겠지.”

“……페넬로페.”

“너는 네가 평소 괄시하던 내가, 사실은 엄청나게 영악해서 에카르트 공작을 꼬여 내고 네 동생 자리를 차지한 줄 알 테니까.”

“그건…….”

“그렇다면 이제라도 알아 두길 바라.”

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뇌까렸다.

“네가 날 목걸이 도둑으로 몰았을 때, 난 글도 제대로 못 뗀 12살짜리 평민이었다는 걸.”

무어라 답하기 위해 열렸던 레널드의 입이 거짓말처럼 닫혔다.

새파란 동공이 서서히 충격으로 물들어가는 게 똑똑히 보였지만, 하나도 속 시원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피유우우융- 펑!

레널드의 등 너머, 열린 창밖으로 커다란 굉음이 하늘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와 의미 없는 소모전을 하는 동안 어느덧 밖은 노을마저 지고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피유우우, 퍼엉- 펑!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검은 하늘에 화려한 불꽃들이 수놓아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뒤로한 채, 우리 둘은 서로를 말없이 마주 보았다.

폭죽이 터질 때마다 색색깔의 빛 그림자가 레널드의 얼굴 위에 넘실넘실 비쳤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 때문일까. 나를 응시하는 그의 표정이,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분홍 머리 위가 다시 한 번 반짝였다.

[호감도 14%]

호감도가 크게 상승했다. 눈앞에 새하얀 창이 떠오른 것은 그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SYSTEM〉 [레널드]와 함께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 성공!

〈SYSTEM〉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하.’

나는 나타나지 말아야 할 상황에 뜬금없이 나타난 퀘스트 창을 보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그냥 호감도가 파탄 나든 말든 퀘스트 조건만 충족하면 다 성공하는 거냐고.’

그런데도 결국 [예.]를 눌러야 하는 이 상황이, 치가 떨렸다.

〈SYSTEM〉 보상으로 [레널드]의 [호감도 +3%]와 [석궁]을 얻었습니다.

곧바로 오르는 호감도를 보며, 나는 방금 전까지 들끓던 기승이 꺼져 가는 불씨처럼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펑! 피유우, 퍼엉-!

그런 나와 달리 창밖은 여전히 찬연한 불꽃놀이가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 집에서 쫓겨나더라도, 다시 가난한 평민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이상하지.”

요란한 폭죽 사이로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넌 항상 날, 노예보다 못한 버러지처럼 비참하게 만들어.”

울렁이던 레널드의 얼굴이 내 음성에 완전히 일그러졌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공작가를 나간 이후를 상상하기 시작했던 것은.

나는 타다 만 재처럼 버석버석한 눈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페넬……!”

레널드는 다급한 몸짓으로 나를 부르며 잡으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보는 체도 하지 않고 다락방을 나섰다.

홀로 컴컴한 돌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상승한 레널드의 호감도와 충동적으로 나눈 대화 같지 않은 대화를 번갈아 떠올렸다.

[호감도 17%]

죽을 각오를 하고 대든 것치곤 참으로 후한 결과였다.

물론 내가 쏟아냈던 페넬로페의 과거는 모두 훌륭한 거짓말이었다.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그녀의 과거를 내가 어찌 알아.’

시체 옆에서 빗물을 받아 먹었다는 둥, 먹다 남긴 식어 빠진 잔반을 먹었다는 둥.

그 처참하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은 모두, ‘걔는 이랬었겠지.’ 싶은 가정일 뿐이다.

……내 얘기가 아니라.

* * *

‘레널드와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 완료로 얻게 된 [기타 보상]은 그로부터 얼마 후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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