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5화
다음 날 아침, 통창 앞 테이블에서 에밀리가 가져다준 아침 식사를 먹었다.
“아가씨, 맛은 어떠세요?”
에밀리가 내 눈치를 보며 살살 물었다.
식사의 질이 전과 달리 턱없이 좋아져 있었다. 어제 일의 여파 같았다.
“주방장님이 오늘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직접 요리했다고 해요.”
“지금까지의 내 아침은 주방장이 직접 만들지 않았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
에밀리는 내 지적에 곧바로 입을 딱 다물며 숨을 들이켰다.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니까 긴장 풀어.”
나는 잠시 포크를 내려놓고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간 나를 위해 애써 온 거 잘 알아.”
“아, 아가씨…….”
“난 내 사람은 확실하게 품을 거란다. 네가 애써 준 만큼 조만간 보상도 뒤따를 테니 걱정하지 마.”
내 말에 에밀리는 감동을 한 양동이 퍼먹은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보, 보상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뚝. 겸양은 앞으로 행동으로 보이렴.”
훌쩍이는 에밀리를 달래며, 아침 식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집사가 찾아왔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방문 앞에 선 그는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대충 까딱였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집사가 내 앞에 조심스럽게 당도했다.
“덕분에 다락 구경 잘했어.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그러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노집사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나는 싱긋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대번 밝아졌다.
“불꽃놀이는 잘 구경하셨습니까? 확실히 지난 축제들에 비해 일찍부터 시작하더군요.”
“응, 뭐…….”
난 레널드 놈과 싸우던 중인지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기대 서린 표정에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공작님께서 앞으로 아가씨가 다락방을 오르고 싶다 하면 언제든 문을 열어 주란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래? 그거 참 좋은 소식이네.”
물론 다신 거길 오를 일 따윈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영혼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집사는 더 나아가 경악스럽기까지 한 소리를 전했다.
“그리고 데릭 도련님께서도 아가씨가 원하실 때마다 다 같이 오찬을 들 수 있도록 조치하시라는…….”
“그건 됐고. 오늘 내가 부른 건 물어볼 게 있어서야.”
나는 허겁지겁 그의 말을 막았다. 그 또한 앞으로도 쭉,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집사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어제 레널드를 일갈하고 온 이후부터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었다.
“이클리스는 잘 지내고 있어? 내가 일전에 집사에게 거취를 부탁했던 것 같은데…….”
“이클리스라면…… 아가씨께서 사 오신 노예 말씀입니까?”
“노예라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호칭에 나는 낯을 굳혔다.
“설마 지금까지 다른 이들 앞에서도 그따위로 불러 왔어?”
“아, 아닙니다. 제가 순간 착각하여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싸늘해진 목소리에 집사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어제 그가 내게 여러모로 신경 쓴 것을 잘 아는 나는, 사소한 말실수쯤은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이클리스는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어?”
“연무장 옆 견습 기사들이 쓰는 숙소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스승은 누구로 배정되었지?”
가문의 기사단으로 들어오게 된 견습 기사들은 종자가 되어 모실 스승이 배정된다.
나는 어제 일을 토대로 이클리스의 스승이 레널드일 거라고 어림짐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집사의 말에 황당해졌다.
“그는 스승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가씨.”
“뭐? 왜?”
“……노예 신분이지 않습니까.”
집사는 방금 전의 내 반응이 떠올랐는지 조금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그를 호위로 삼겠다고 강하게 주장하셨기에 소공작님께서 가문의 견습 기사로 적을 올리긴 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는 소리였다.
“허…….”
나는 허무해져서 의자에 힘없이 등을 기댔다.
집사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나는 값을 치르고 이클리스를 노예 시장에서 사들였을 뿐, 면천을 시켜 준 것이 아니었다.
“그를 면천시킬 방법은 뭐가 있지?”
내 물음에 집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신분을 새로 사들이는 것이나 혁혁한 공을 세워 인정받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둘 다 쉽진 않을 겁니다.”
“왜?”
“패전국 출신이니까요.”
새삼 느껴지는 현저한 신분 차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클리스는 게임에서 어떻게 정식 기사가 됐었지?’
나는 곰곰이 게임 내용을 떠올렸다.
[이클리스는 피나는 노력으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지만, 출신으로 인해 그것을 숨기고 가짜 공녀의 호위에서 그쳐야 했다.
그러나 여주가 나타난 후 그녀를 괴롭히는 페넬로페를 점점 싫어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여주를 죽이려던 악녀를 막고 그 증거를 찾아낸 공로를 인정받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다.]
둘만의 비밀스러운 기사 서임식에서 여주에게 복종의 맹세를 하고, 그런 그에게 여주가 ‘고대의 보검’을 건네는 것이 이클리스 루트의 하이라이트 장면이었다.
[악역을 처치한 이후 그는 공작의 전폭적인 지지로 소드 마스터임을 드러내고 황제에게서 당당하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 받는다.]
여기까지 이클리스의 성공 신화를 떠올린 나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소드 마스터는 대체 언제 된 거지?’
원래 그를 데리고 온 것은 공작이었다.
검술이 출중한 것을 눈여겨보았기에 노예 경매에서 사들인 거였으니까.
이클리스가 아무리 잘났다고 하여도 홀로 달관의 경지까지 이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잠재력을 미리 알아본 공작이 그만큼 열심히 훈련을 시켰다는 소린데…….’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소름 끼치는 가정에 입을 떡 벌렸다.
‘그럼 난 큰일 난 거잖아.’
호위로 쓰겠다고 데려와 놓고 스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방치했다.
게다가 레널드 그 미친놈에게 괴롭힘까지 당하게 만든 장본인…….
“미친, 세상에나.”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이클리스였으면 벌써 나를 죽이겠다는 다짐을 수십 번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 아가씨?”
집사가 갑작스럽게 낯빛이 허옇게 질리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집사.”
나는 벌벌 떨리는 속을 애써 누르며 물었다.
“집사가 보기에 이클리스는 요즘 어떤 것 같아?”
“예? 어떤 면에서 말씀이십니까?”
“여러 면에서 말이야. 훈련은 잘 받고 있는지, 견습 기사들 사이에서 적응은 잘했는지, 기분은 어때 보이는지…….”
내 물음에 집사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답했다.
“……그는 워낙 표정 변화가 없어서 기분이 어떤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
“아무렴 노예들을 가두는 비좁은 우리보다야 지내기 훨씬 편하겠지요. 그는 아가씨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집사의 대답에 눈에 띄게 안도했다. 모처럼 맞는 말을 했다.
하기야, 경매장에서 짐승 가둬 두듯 노예들을 가둬 둔 쇠창살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그래. 경매장보다야 여기가 훨씬 낫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행복 회로는 거기까지였다.
“물론 다른 견습 기사들의 불평이나 건의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불평?”
“듣기로는, 처음 숙소에 배정되었을 때 노예와는 방을 같이 쓰지 않겠다는 문제로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뭐?!”
이어지는 집사의 말에 나는 꽉 괴성을 질렀다.
“그렇지만 그건 그의 출신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가씨. 다른 견습 기사들은 가신들의 집안에서 차출되어 온 것을요.”
집사가 침착하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지만 귀에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동공이 지진 나듯 흔들렸다.
‘X발.’
나는 그간 나름대로 바빠서 이클리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엔딩은 고사하고 그놈 손에 제일 먼저 죽게 생겼다.
나는 집사에게 빠르게 명령했다.
“당장 외출 준비 좀 해 줘.”
“……예? 어떤 외출 말씀이십니까?”
“쇼핑.”
“아.”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던 집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너무 비장한 어조였나 보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집사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빠릿빠릿한 것 하나는 마음에 드는 아저씨였다.
나 또한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다급히 에밀리를 불렀다.
“무슨 일이세요, 아가씨?”
“하녀들 불러다가 최대한 공들여서 꾸며 줘.”
“……네?”
“빨리.”
“네, 네!”
에밀리 또한 내 뜬금없는 지시에 당황하다가 재촉에 못 이겨 부랴부랴 솜씨 좋은 하녀들을 데리러 나갔다.
한시바삐 방치플 주인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시 방 안에 혼자 남겨진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작전은 ‘누가 우리 애 기 죽여 놨어’다.”
* * *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이렇게 꾸미니까 꼭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여신 같아요!”
공녀는 싫어해도 꾸며 놓은 고운 얼굴만은 싫어할 수 없는지, 역시나 이번에도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번에는 막지 않고 그네들이 하는 대로 모든 것을 내맡긴 나는, 기진 맥진한 채 물었다.
“다 끝났니?”
“아니요! 아직 머리를 덜 만졌어요. 조금만 더 앉아 계세요, 아가씨!”
에밀리에게 어깨를 짓눌려 강제로 앉혀진 나는 한참 후에야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때요, 아가씨?”
전신 거울 앞에 선 나를 보며 하녀들이 잔뜩 기대에 찬 눈을 보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어떤 컨셉을 원하냐기에 돌멩이도 뻑이 갈 만큼 해 달랬더니 그 말을 충실히도 이행해 놨다.
옅은 화장과 옆쪽을 곱게 땋아 반 묶음을 한 스타일.
진분홍빛 머리 색과 똑같은 루비 귀걸이와 목걸이.
어깨와 가슴 부분에 금사가 촘촘히 새겨진 흰색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은, 정말이지 신이 혼을 들여 빚은 인형처럼 예뻤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해서 나는 피식 웃었다.
‘헉.’
하녀들이 있는 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얼굴에 웃음기가 돌자 싸늘했던 인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이 새로이 나타났다.
“……마음에 드네.”
그 한마디가 뭐라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들이 웃겨서 다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또 한 번 야단법석을 부리는 하녀들을 내보낸 나는, 에밀리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고생했어, 에밀리.”
“그런데 이렇게 예쁘게 치장하시고 대체 어딜 가시려는 거예요, 아가씨?”
에밀리는 서운한 얼굴로 저도 데려가라고 칭얼거렸다.
나는 산뜻한 얼굴로 목적지를 일러 주었다.
“연무장.”
우리 애, 기 살려 주러 한번 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