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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46화 (4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6화

하늘이 화창했다. 몰빵 남주를 꼬셔서 외출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에밀리가 챙겨 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곧장 들어서지 않고 멀리 떨어져 확인했다.

제국의 검이라는 에카르트는 칭호답게 기사들의 연무 시간을 무척 중요시하기에 함부로 방해할 수 없었다.

‘저번처럼 칼침 맞을 뻔하기도 싫고.’

다행히 이 생각은 옳았다. 연무장에서는 한창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나무 사이에 숨어 연무장을 훔쳐보았다.

짝을 지어 체력 훈련을 하는 무리도 있었고, 무거운 쇳덩이를 끌고 연무장을 죽어라 도는 이들도 있었다.

목검을 들고 허수아비를 베는 연습을 하는 쪽도 보였다.

목검은 대부분 견습 기사들의 몫이기 마련이다.

나는 그쪽을 두리번거리며 이클리스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발견했을 때, 곧바로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쟤는 왜 저렇게 처량 맞게 구석탱이에 혼자 있다냐…….’

횡렬 종대로 늘어선 다른 견습 기사들과는 달리, 그는 한참 동떨어진 곳에서 외따로이 훈련하는 중이었다.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것은 대강 예상했지만, 막상 내 눈으로 직접 보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그가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니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탁, 타악-!

이제 막 종기사 된 이들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의 급소를 찌르고 내리치는 연습을 했다.

그러나 이클리스는 그들과는 달리 단순히 찌르고 내리치는 게 아니라 허수아비를 거의 난도질하는 수준이었다.

파슷, 퍼억-!

그가 목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 덩치만큼 커다란 허수아비가 무 썰리듯 썰렸다.

짚 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검기로 자르는 게 아니라 힘으로 무지막지하게 내리치는 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는 모양새였다.

‘오오, 저게 바로 소드 마스터의 자질인가?’

물론 검술을 잘 모르는 나는 그저 감탄했다.

그게 한참 잘못된 생각임을 안 것은 얼마 후였다.

완전히 파헤쳐진 짚으로 인해 드러난 장대와 이클리스가 휘두른 눈먼 검이 맞닿았다.

빠악-!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그가 들고 있는 목검이 두 동강 나 버렸다.

이클리스는 우뚝 멈춰선 채 두 동강이 난 나무 조각들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야!”

그때였다.

“씨발, 대체 몇 번을 부러뜨려 먹는 거야! 네가 목검 값 댈 거냐고, 이 새끼야!”

퍽-! 누군가 빠르게 다가와 이클리스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저 새끼가 누구 명줄을 줄이려고!’

나는 당장 튀어 나갈 뻔한 몸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무턱대고 나서는 것보단, 우선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과연 남주답게도 이클리스는 뒤로 넘어지지 않았다. 그저 몇 발자국 물러났을 뿐.

하지만 그를 때린 놈은 그 모습에 더욱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야, 당장 안 뻗치냐?”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 조심해서 다루도록…….”

“네가 한두 번 부셔 먹었냐? 새로 목검 주문한다고 할 때마다 부단장님 눈치가 얼마나 보이는지 아냐고! 됐고, 뻗쳐.”

“…….”

“뻗치라고, 새끼야!”

“……지금은 훈련 중입니다. 처벌은 훈련이 모두 끝나고 받겠습니다.”

이클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말을 들어 보아하니 시비를 건 놈은 훈련할 때 쓰는 공용 물품을 관리하는 기사인 것 같았다.

이클리스의 말은 타당했다.

훈련용 도구들이 망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보통 값이 싼 것을 대량 구매하여 사용한다.

때문에 저 싸구려 목검 하나 부러졌다고 모든 이들의 앞에서 망신을 주며 처벌을 논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고 처벌을 받겠다고 대답하는 이클리스의 모습은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나는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며 그저 ‘X됐구나.’ 생각했다.

“하, 이 새끼 봐라. 노예 주제에 훈련은 무슨! 빨리 안 뻗쳐?”

“…….”

“와, 믿는 구석이 있다 이거지?”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이클리스 때문에 점점 더 열이 받는지, 놈은 이제 어깨를 치던 손으로 이클리스의 뺨을 툭툭 내리쳤다.

“너 줄 잘못 잡았어, 이 새끼야. 네가 잡은 줄, 썩은 동아줄이라고.”

“…….”

“우리 이본 아가씨 돌아오시면 쫓겨날 그 가짜가, 한낱 노예까지 신경 쓸 것 같냐?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할걸?”

“주인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이었다. 계속 땅만 바라보고 있던 이클리스가 번뜩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이에 그를 때리던 기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없는 데선 나라님 욕도 하는데. 너 여기 처박아 놓고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네 주인 욕 좀 하면 안 되냐? 어?”

“기사라면 레이디를 모욕해선 안 됩니다.”

“예, 예. 눈물겨운 노예의 고백 잘 들었고요. 됐고! 엎드려뻗쳐라, 빨리.”

“…….”

“씨발, 끝까지 버티네! 야! 잡아!”

놈이 어느덧 주변으로 몰려든 다른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한 패거리인 듯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하던 놈들이 이때다 싶어 우르르 이클리스를 붙잡았다.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이클리스가 왜 그러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공작가에 머무르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게 만들라고 해서.’

여기서 반항했다간 문제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내 귀에까지 전해질까 봐.

그래서 노예 시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이클리스를 잡은 놈들이 그를 거칠게 바닥에 쓰러뜨렸다. 다른 몇 명이 어디선가 멍석을 끌고 왔다.

“야! 밟아! 밟……!”

처음 시비를 건 놈이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른 시점에 나는 몸을 움직였다.

내가 가진 무기는 부채밖에 없었다.

소리 없이 다가선 나는, 들고 있던 부채를 접어 놈의 머리를 철썩 내리쳤다.

“아, 씹! 어떤 새끼가……!”

“안녕.”

시끄러운 연무장에 내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허, 허억! 고, 공녀……!”

방금 전까지 비열한 표정으로 킬킬 웃던 놈의 눈이 굴러떨어질 만큼 커다래졌다.

놈이 단말마를 외치는 순간, 이클리스를 붙들고 있던 모든 기사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몇몇이 입을 떡 벌렸다.

그 우스운 꼴들을 찬찬히 훑던 내 시선이 흙바닥에 엎어져 있는 이클리스에게 닿았다.

내가 나타난 것이 놀라운 일이었는지 죽어 있던 그의 잿빛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호감도 27%]

상승하는 호감도를 보며 나는 안도했다. 제때 나타난 듯싶었다.

모든 놈들의 얼굴을 스치듯 확인한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호위를 데리고 재밌는 놀이를 하고 있네.”

“…….”

“뭐 하는 중인지 설명할 사람.”

당연하게도 대답하려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연무장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다른 구역에 있던 이들마저 훈련을 멈춘 채 내 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부채로 내가 방금 뒤통수를 후려갈긴 놈을 가리켰다.

“너, 이름이 뭐지?”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어디 소속이야? 1사단?”

“3사단 2소대 소속 마, 마크 앨버트입니다.”

나는 놈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도 쥐 잡듯이 애를 잡길래 얼마나 높은 놈인가 했더니.’

전쟁이 일어날 일이 없는 수도에서 3, 4사단은 집을 지키는 경비병이나 다름없었다.

별 보잘 것도 없는 놈이란 뜻이다.

“네가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봐.”

“예, 예?”

“지켜보니 네가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 같던데.”

“그, 그게…….”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에 놈은 사색이 되어 쩔쩔맸다.

‘가짜’ 운운하며 빈정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바짝 긴장한 기사들의 모습에서, 어제 도나 부인에 관한 소식이 저택 전체에 쫙 퍼졌음을 알아차렸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설명 안 해?”

“네, 네! 그, 저, 노예…… 아니, 이클리스가 훈련 중에 사고를 쳤습니다.”

내 재촉에 놈이 주절주절 입을 열었다.

“무슨 사고?”

“그…… 목검을 부러뜨렸는데…… 목검 값이 요즘 많이 오르기도 했고, 한두 번 부러뜨려 먹은 게 아닌지라…….”

“그래서.”

“제, 제가 훈계를 좀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녀, 녀석이 갑자기 선임인 제게 대들어서, 그게…….”

“그러니?”

“네, 네!”

온화하게 되묻는 목소리에서 내가 납득했다는 희망을 얻었는지, 놈이 히죽 쪼개며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있으면?”

“……예?”

“없는 데선 나라님 욕도 하니까 주인도 욕하는 거라던데. 쟤 주인인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놈의 표정이 멍해졌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려 화사하게 웃었다.

“귀족 모독죄로 내가 지금 여기서 널 죽여도 괜찮은 건가?”

내 말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 앉았다.

“어, 어…….”

내 앞의 놈은 그저 입을 벌린 채 버벅거렸다.

“고, 공녀님.”

싸한 분위기에 보다 못한 기사 한 명이 나섰다.

흙투성이인 다른 이들에 비해 깔끔한 차림새로 보아, 잔챙이들보단 상급자인 것 같았다.

“우선 지, 진정하십시오. 지금 당장 단장님을 모셔 올 테니 처분은 그때…….”

“이클리스.”

난 그 말을 듣는 척도 않은 채 이클리스를 불렀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던 그의 눈빛이 일순 달라졌다.

“이 새끼 죽여.”

나는 부채로 마크란 놈을 가리켰다.

그 순간, 이클리스가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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