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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47화 (4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7화

“고, 공녀님!”

마크 놈이 당황해서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자, 이번엔 이클리스에게 떠들어 댔다.

“……왜, 왜 이래, 이클리스!”

제게로 다가오는 그에게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놈은 연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보다 못한 상급자가 다시 나섰다. 이번엔 다른 기사들도 합세했다.

“이클리스, 그만해라. 명령이다!”

“그래! 내, 내가 방금 전엔 좀 심했어. 사과할 테니까…….”

콰득-. 그러나 마크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뒷걸음질 치는 놈의 머리채를 움켜쥔 이클리스가 순식간에 제 쪽으로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크, 크흑, 컥!”

눈 깜짝할 새 마크를 팔 안에 감싸 안은 이클리스는 무섭도록 놈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숨통이 막힌 마크의 눈이 부릅 홉 떠졌다.

“이클리스! 뭐 하는 짓이야! 그만해!”

기사들이 경악에 가득 차 그를 불렀지만, 이클리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동료의 목을 조르고 있는 노예를 보면서도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내 명령이 있어서기도 했지만, 그간 무시하던 노예로부터 어마어마한 살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억, 끄으으…….”

그러는 동안 마크 놈의 입 밖으로 혀가 늘어졌다. 턱을 타고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더러운 체액이 목을 조르고 있는 팔을 적셨지만 이클리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녀님!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동료를 보던 기사들이 결국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이 일은 빠짐없이 단장님께 보고하여, 전원 자진해서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

“공녀님, 에카르트 기사단 내에서 살인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디서 개가 짖나 하고 귀를 후볐다. 어제 레널드에게 배운 것이었다.

“공녀님!”

마침내 마크의 눈이 뒤집혔을 무렵.

“그만.”

나는 손을 들어 내린 명령을 거뒀다.

놈의 목을 조르는 데 여념이 없는 것 같던 이클리스는, 내 손짓에 기다렸다는 듯 바로 팔을 풀었다.

털썩-.

“커헉, 허윽! 허억, 헉…….”

바닥에 쓰러진 놈이 제 목을 부여잡고 거칠게 기침을 토해 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면서도 내심 놀랐다.

이클리스가 내 명령을 즉각 이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끝까지 졸라 죽이려 들 줄 알았는데.’

물론 마크란 놈을 진짜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왼손에 끼워진 루비 반지를 사용할 각오로 내린 명령이었다.

저를 괴롭힌 놈을 마음껏 목 조르게 한 뒤라면 제어 장치를 쓰더라도 내게 악감정이 생기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이클리스는 의외로 마크에게서 즉각 손을 뗐다.

개인적인 사감보다 내 명령을 더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다.

“진짜 공녀가 돌아오면 쫓겨나서 제 앞가림도 못 할 가짜라고 했나?”

나는 얼어붙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안 그래도 굳어 있던 기사들의 표정이 내 말에 더욱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런데 내가 쫓겨나는 게 더 빠를까, 너희들이 파면당하는 게 더 빠를까?”

나는 장난치듯 말꼬리를 늘리며 싱긋 웃었다. 그때였다.

〈SYSTEM〉 공작가 주변인과의 관계 악화로 명성이 -5 되었습니다. (total : 10)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명성이 하락했다.

하지만 기사 놈들은 남주가 아니었으므로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진짜 남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클리스, 이리 와.”

그는 즉시 내게로 다가왔다.

“가자.”

부채를 쥐지 않은 손으로 이클리스의 팔목을 살짝 붙들었다.

그리고 그를 이끈 채 연무장을 벗어났다.

[호감도 32%]

여전히 무기질적인 표정이었지만, 상승하는 호감도가 꼭 흔들리는 강아지 꼬리 같았다.

“아가씨.”

이클리스를 뒤에 달고 저택의 정문 쪽으로 가자, 마차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나를 반겼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외출 준비는 다 됐어?”

“네. 방어 마법과 추적 마법이 걸린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호위는 이미 데리고 계시니…….”

집사가 내 뒤의 이클리스를 흘긋 곁눈질하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마부만 가문 소속의 마법사로 배정했습니다. 위급 상황 시 아가씨를 저택으로 순간 이동시킬 겁니다.”

뷘터처럼 마법사들은 신원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용하는 값이 무척 비쌌다.

외출에 마법사를 마부로 부리는 것은 황족이나 할 법한 드문 일인 것이다.

‘과연 공작가라 이건가.’

나는 썩 괜찮아진 대우에 반색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고생했어, 집사.”

“그리고 이것…….”

남은 것이 또 있었는지, 집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공작님께서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니 마음 편히 놀다 오시라고 전하셨습니다.”

백지 수표였다.

공작이 어제 일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의외로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연무장에 폭탄을 던지고 오는 길인 걸 알면, 이런 거 줄 생각 못 할 텐데…….’

나는 선뜻 그것을 받아도 될지 망설였다.

그런 나를 부추긴 것은 집사였다.

“받아 주십시오, 아가씨. 요즘 통 상인들도 부르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래, 뭐.”

준다는 데 어쩌겠나. 나는 망설이던 것을 관두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버지께 무척 감사하다고 전해 줘.”

“물론이지요.”

나는 뒤돌아 정차한 마차로 걸어갔다.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이클리스가 번뜩 내 뒤를 따라왔다.

열린 마차 문 앞에 선 나는 말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멀뚱멀뚱 내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데리고 온 이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뒀기 때문일까.

이클리스는 진짜 호위처럼 나를 에스코트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듯했다.

“바보. 이럴 땐 레이디를 에스코트해야 하는 거야.”

나는 코를 찡긋하며 핀잔을 줬다. 그러자 잿빛 눈동자가 한차례 미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전 노예인걸요.”

“아니지.”

나는 곧바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넌 지금 내 호위 기사야.”

“…….”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겠니?”

나는 그의 앞에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루비 반지가 끼어 있는 왼손이었다.

불현듯 이클리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는, 집사마저 놀랄 만큼 완벽한 예법을 구사했다.

그리고 내 눈을 꿰뚫을 듯 바라보며 말했다.

“제 다리를 짓밟고 마차 위로 올라 주세요, 주인님.”

“아가씨, 드레스샵으로 먼저 모실까요?”

이클리스까지 마차에 착석했을 때, 마부가 물었다.

“아니. 무기상으로 가.”

나는 창틀에 턱을 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마법이 걸렸다더니, 승차감이 자동차 뺨치게 좋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을 흥미롭게 구경하는 중이었다.

“왜…….”

문득 맞은편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이클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동안 찾아 주지 않으셨어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혹시 오늘과 같은 일로 나를 원망하는 건가 싶어 그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지만,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서운했니?”

나는 대놓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사과라도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약속하셨잖아요.”

“……뭘?”

“열심히 훈련한 상으로 저를 자주 찾아와 주시기로요.”

아.

나는 가까스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그를 왜 찾지 않았는지 깜빡 잊고 있었다. 비가 내리던 날의 그 기억, 그 섬뜩함을.

“……매일매일 주인님을 기다렸어요.”

내가 어떤 것을 떠올리는지도 모른 채, 이클리스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까진 무표정하기 그지없던 그 얼굴이 왜인지 조금 시무룩해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나는 창틀을 톡톡 두드리며, 그를 찾지 않은 변명을 골랐다.

“괘씸해서.”

“……?”

“나한테 거짓말을 했잖니, 이클리스.”

“무슨…….”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체 같은 표정만 빼면 잘 만든 인형 같다고 생각할 만큼 곱상한 외모다.

“분명 괴롭히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면서, 예쁜 얼굴에 잘도 이런 걸 남겼구나.”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스치듯이 어루만졌다.

그가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휙 상체를 뒤로 물렸다.

당황한 듯 다른 때에 비해 요동치는 잿빛 눈을 보며 나는 짧게 웃었다.

“그때는…….”

“…….”

“그때는 정말 없었어요.”

이클리스는 다소 성급한 어투로 변명했다.

‘퍽이나 그러겠다.’

나는 속으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게 누구 하나 죽일 듯이 검을 휘둘러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니.

보면 볼수록 아주 발칙한 놈이었다.

“어쨌든. 오늘 같은 일을 내게 먼저 알리지 않았으니, 그 상은 무효야.”

“그렇지만…….”

“쉿. 대신 다른 상을 주려고 나왔으니 칭얼대지 말고 조금 기다리렴.”

무어라 대꾸하려는 그의 말을 막아서며 나는 대충 그를 달랬다.

칭얼대지 말라는 내 말이 수치스러웠는지 이클리스의 뺨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그리고.

[호감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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