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8화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그 미세한 변화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클리스가 몇 살이더라?’
얼굴만 보면 그는 한참 어리고 순진한 소년 같았다.
나는 곰곰이 게임을 떠올렸다. 캐릭터들의 프로필까지 일일이 외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나이가 쉽사리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노멀 모드는 여주가 돌아온 이후 모든 루트의 엔딩까지 1년이 걸린다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이클리스는 엔딩 직후 나오는 에필로그에서 성인식을 치른 후 여주와 결혼을 한다.
이 게임에서 성년은 18살의 생일이 지난 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재 이클리스는…….
‘최소 17살이란 소리잖아.’
내 원래 나이는 스무 살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한참 어린 영계를 꼬시기 위해 꼬리치는 중이었다.
‘근데 왜 자꾸 내가 꼬셔지는 것 같지?’
어느새 붉은 기가 사라진 이클리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상단에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췄다.
발칙한 노예에게 상을 주러 갈 시간이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에카르트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를 발견하자마자 헐레벌떡 뛰쳐나온 무기 상단의 주인이 입구에서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여기가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검을 판다는 곳인가?”
“그렇습니다, 손님! 저희 상단은 검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희귀한 무기들을 취급합니다. 말씀만 해 주십시오.”
“이클리스, 같이 들어오렴.”
나는 마차 옆에 멀뚱멀뚱 서 있는 그를 불렀다.
일개 호위인 자신은 같이 들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듯 그는 영 머뭇거렸다.
“어서.”
한 번 더 재촉하자 역시 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내 뒤로 붙어 섰다.
“강화 마법이 걸린 목검이 있나?”
나는 우선 가장 시급한 것부터 사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무기상이 희한한 것을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검 말씀이십니까? 목검은 있습니다만, 강화 마법까지는…….”
“없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유명하다고 집사에게 추천받아 큰 마음 먹고 왔는데 헛수고를 한 게 아닌가.
“워, 원하신다면 주문 제작을 할 수는 있습니다!”
못마땅한 표정을 본 무기상이 허겁지겁 덧붙였다.
“그런데 훈련용 목검에 그렇게까지 하시는 분들은 무척 드뭅니다. 어느 정도 기본자세가 잡히면 보통 진검을 쓰기 마련인지라…….”
“크흠.”
나는 민망해져서 헛기침했다. 너무 ‘검알못’ 티를 냈다.
“저희 상단에는 강화 마법이 걸린 것은 아니지만, 오래된 고목으로 만들어져 절대 부러지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안내해.”
잠시 후 우리는 사방에 목검만 진열되어 있는 방 안에 들어섰다.
옆에서 주인이 무어라고 쉴 새 없이 떠드는 것을 대충 흘려듣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솔직히 아무리 봐도 나무 색만 다를 뿐 다 거기서 거기 같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니?”
나는 이클리스에게 선택지를 넘겼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별로야?”
“그게 아니라…… 연무장에 있는 것들이랑 똑같아 보여요. 그냥 그것들을 써도 괜찮아요, 주인님.”
“그럴 리가!”
이클리스의 말을 들은 주인이 황급히 외쳤다.
“여기 있는 것들은 다 진검과 겨뤄도 손색없을 만큼 튼튼한 것들입니다! 특히 요정의 숲에서 자라는 오동나무로 만든 것들은 볏짚도 자를 만큼 결이 날카로운 것으로……!”
아무리 좋다고 떠들어 봤자 선물을 받는 이가 고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어쩔 수 없네.”
한숨처럼 내뱉자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주인은 목검들을 마구 꺼내 놓던 행동을 멈췄다.
“그, 그럼 목검 말고 진검 쪽으로 가시는 것이…….”
“무슨 소리야.”
“예?”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나는 입구서부터 방의 가장 끄트머리까지 손으로 대충 짚으며 읊조렸다.
“싹 다 에카르트 저택으로 보내.”
이왕 사는 거 부러질 걸 대비해서, 튼튼한 걸로 많이 사 두면 좋겠지.
그다음은 훈련복이었다.
키도 크고 얼굴이 훤칠해서 그런지, 확실히 새것들을 걸친 이클리스의 모습은 근사하기 그지없었다.
“괜찮네.”
나는 그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며 툭 내뱉었다.
흥분한 무기상이 침을 튀기며 아부했다.
“그럼요! 수도에서 제일가는 물품들입니다!”
“마음에 드니?”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한 채 너무 내 마음대로 입혀 둔 것 같아서 뒤늦게나마 물었다.
이클리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주인님은요?”
“응?”
“주인님은 괜찮기만 하세요?”
어쩐지 그렇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싫다고 대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취향인 걸로만 골라 입혔는데 당연히 내 마음에 들지. 넌 어떤지 묻는 거야, 이클리스.”
빈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그것들을 착용할 일은 없잖니.”
“주인님이 마음에 든다면 저도 마음에 들어요.”
“그래? 그럼…….”
나는 이클리스의 앙큼한 대답에 기분이 썩 좋아졌다.
“이것들도 싹 다 종류별로 세 개씩 보내.”
“네, 네! 암요! 바로 그럽지요!”
내 말에 무기상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진검을 사러 가 볼까?”
나는 짝, 하고 가볍게 손뼉을 친 후 몸을 돌렸다. 무기상이 허겁지겁 내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주인님, 저는 이걸로 충분해요.”
이클리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앞을 막아섰다.
“왜 그런가? 기사라면 자고로 검이 가장 중요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돈독이 오른 무기상이 대신해 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검은 있어야지. 부담스러워서 그래?”
“아니요. 그보단…….”
이클리스는 드물게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진검을 가지고 있어 봤자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주인님이 주신 선물을 헛되이 간직만 하고 있긴 싫어요.”
“왜 쓸 일이 없어? 기본 검술이 끝나면 대련도 진검으로 할 텐데.”
“그럼, 그럼! 손님의 말이 백번 천번 옳습니다.”
내 물음에 주인이 고개를 과하게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클리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을 뇌까리듯.
“……노예는 정식 기사가 될 수 없으니까요.”
“…….”
“그러니 수련을 하는 데 필요한 목검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가 기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었는데, 나만 홀로 당연히 언젠간 될 거란 전제를 깔고 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클리스가 정식 기사가 되는 것도 다 페넬로페가 죽어서인데.’
왕따당하는 처지만 신경 써 주기 급급해, 게임 내용을 되새겨 볼 정신도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쩌면 이클리스는 정식 기사가 되면 안 될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긴 날 보며 진검 구매를 재고하는 거라고 여겼는지 무기상이 허겁지겁 말을 보탰다.
“무, 무슨 소린가! 그래도 주인을 지키기 위해 호위로서 검은 필수지.”
“주인님을 호위하는 데는 내 몸 하나면 충분하다.”
“…….”
무기상은 겁을 먹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나도 할 말이 없었다.
화려한 전적들을 떠올려 보면 그는 온몸이 무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알았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단념한 사람에게 억지로 부담을 주는 것도 좋지 않았다.
“나는 좀 더 둘러봐야겠으니, 먼저 밖에 나가 기다리렴.”
내 말에 이클리스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나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를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누가 상전인지…….’
이전부터 느꼈지만, 이클리스는 따로 지적하지 않으면 먼저 나서서 예를 차리는 법이 없었다.
노예치고 참으로 건방진 놈이었다.
“그, 저…… 또 필요하신 것이 있습니까, 손님? 말씀만 해 주십시오.”
단둘이 남자 무기상이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왕 왔으니 마검 구경이나 하고 가지.”
“아,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내 말에 무기상이 반색했다. 주 판매 물품이니 그럴 만도 했다.
확실히 마검이 진열된 곳은 다른 곳보다 훨씬 크고 널찍했다. 진열된 검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나는 찬찬히 검들을 둘러보았다. 작은 단검부터 시작해서 내 몸통만 한 대검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장식이나 칼집, 손잡이가 하나같이 화려하고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눈에 띄는 것뿐인데. 단출한 것은 없나?”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손님.”
무기상이 어쩐지 비장한 얼굴로 진열장 구석을 뒤졌다.
“……이건 어떻습니까?”
얼마 후 그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함을 가져왔다.
검이 들어 있다기에 액세서리 케이스처럼 너무 작은 크기였다.
“이게 뭐지?”
“고대 마법사의 검입니다.”
그는 열쇠 꾸러미로 함의 자물쇠를 풀었다.
먼지가 쌓인 것을 보고 기분이 불쾌해지려던 나는 ‘고대 마법사’라는 말에 조금 흥미가 생겼다.
자물쇠를 빼낸 무기상이 함을 열었다. ‘끼이익’ 녹슨 소리와 함께 열린 함 내부에는-.
“이게 뭐야.”
검지만 한 아주 작은 검 모양 장식이 달린, 투박한 쇠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단순한 검을 달라니까, 검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줘?
게다가 검 모양 장식에는 보석 하나 달려 있지 않아 미적 기준에도 한참 못 미쳤다.
나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무기상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게 뭔데?”
“여기, 검의 손잡이 부분을 쥐고 마력을 불어 넣으면 이 검 모양 장식이 진짜 검으로 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