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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49화 (4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9화

무기상이 손잡이를 검지와 엄지로 집어 건네며 내게 잡아 보라고 종용했다.

꼭 아기들 장난감 같아서 쉽사리 검으로 변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따져 물었다.

“그럼 마력이 없는 자는 사용하지 못한다는 거 아니야.”

“수련을 오래한 기사들은 조금씩이나마 마력을 운용하기 마련입니다. 안 그러면 마검을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을요…….”

“크흠!”

또 너무 모르는 티를 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클리스한테 과연 마력이 있을지 모르겠네.”

“걱정 마십시오, 손님. 제가 그래도 수도에서 무기만 수십 년을 팔아왔습니다. 장담하건대, 그 노예…….”

능청을 떨며 말하던 그는 눈을 부라리는 내 모습에 허겁지겁 말을 바꿨다.

“……가 아니라, 그 호위분한테서 새어 나오는 기세가 아주 대단했습니다. 삼십 년 동안 상단을 운영했지만, 그토록 무시무시한 오라를 내뿜는 이를 본 건 손에 꼽을 지경입니다.”

“정말인가?”

“그렇고말고요!”

나는 ‘걔 곧 소드 마스터 될 애야.’ 하고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으나 꾹 참았다.

“사실 이 검은 너무나도 희귀하여 암시장에서 아주 비싼 값을 주고 거래해 온 물건입니다. 하지만 값이 너무 나가기도 하고, 기사님들은 보통 화려한 검부터 찾기 마련인지라…….”

무기상이 ‘불쌍한 우리 아기’ 하고 훌쩍거렸다.

“이 검은 비록 별도의 강화 마법이 걸려 있지는 않으나, 기본 원재료부터가 무척 희귀한 광물입니다. 대체 어떻게 구한 건지 오래전에 멸종한 드워프들의 광산에서 캔 철강석으로 만들어졌지요.”

“좋은 건가?”

“아직까지도 그것을 캘 방도가 없습니다. 드워프들만의 비밀이니까요.”

‘좋은 거군.’

반쯤은 못 알아들어서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건 크기가 작아질 때 새겨진 마력의 규모도 덩달아 작아져서, 무기를 소지하면 안 되는 장소에 있더라도 마검인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황궁 같은 곳에서도?”

무기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도 없는 주위를 살피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암살용으로는 아주 제격이지요.”

오버가 심했다. 상식적으로 독이나 표창 같은 걸 놔두고 누가 크기가 작아졌다 늘어나는 검으로 암살을 하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색하진 않았다. 검 자체는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내보일 수는 없지만, 언제나 지닐 수 있는 검.’

사실 작은 단검 종류를 생각했지만, 이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클리스라면 마검이든 장난감 목걸이든, 드는 순간 무기로 사용할 것이다.

“그럼, 이걸로 하지.”

“감사합니다, 손님! 드디어 우리 아기가 이토록 걸맞은 손님을 찾았다니!”

무기상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곧바로 물었다.

“이것도 같이 저택으로 보내드릴깝쇼?”

“아니. 그건 지금 내게 줘.”

잠시 후.

대충 계산을 끝내고 상단을 나가려던 나는, 문득 눈길을 잡아채는 반짝이는 것에 걸음을 멈췄다.

“이건 뭐지?”

무기 상단에서 판매하는 것이라기엔, 상당히 화려하고 우아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토큰처럼 작고 동그란 원 안에 빼곡하게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중간중간에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들이 박힌 모양.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 그건 애뮬릿(amulet, 부적)의 일종입니다.”

“애뮬릿?”

“예. 곧 사냥 대회가 아닙니까. 사냥에 참여하는 연인과 가족에게 선물하기 위해 요즘 여성분들 사이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제품입니다.”

“……그래? 무슨 효과가 있는데?”

“원판 안에 새겨진 마법 주문서 위에 마력석을 박아 놓았기 때문에 위급 상황 시 자동으로 마법이 발동되게 됩니다.”

“어떤 마법?”

“그건 주문마다 다릅니다. 대부분이 방어 마법이지만, 안전한 곳으로 텔레포트 하는 것도 있고요.”

“오, 괜찮은데.”

“요즘은 탈부착 마법이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어 몸 아무 데나 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경청하는 것을 알아본 장사꾼이 바로 미끼를 던졌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상단을 나온 내 손에는 이클리스의 목걸이와 금색, 은색, 동색의 화려한 애뮬릿 3개가 들려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셨습니까?”

말주변 없는 이클리스 놈 대신, 마부가 허겁지겁 달려와 내 손에 들린 쇼핑백 하나를 받아 갔다.

애뮬릿이 든 것이었다. 이클리스에게 줄 선물은 안주머니에 숨겼다.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아가씨?”

“서쪽에 조용한 호수가 있다던데.”

“아, 칼리아 호수 말씀이시군요. 그리로 가겠습니다.”

마차는 소리 없이 출발했다.

사실 나온 김에 새 드레스랑 액세서리도 잔뜩 살까 했지만, 너무 간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벌써 피곤했다.

이대로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직 줄 선물이 남았다.

‘이왕 주기로 한 거 제대로 줘야지.’

나는 그간 이클리스의 마음에 쌓인 서운함이나 원망 등등을 오늘 아주 끝장낼 생각이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근거리에 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나는 이클리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는 자연스럽게 몇 걸음 떨어진 뒤에 섰다. 호위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같이 산책 좀 해 주렴. 혼자 거닐면 외롭지 않겠니.”

나는 그런 그를 돌아보며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클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 손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다. 잡았다고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미미한 힘이었다.

나는 혀를 차며 내가 먼저 그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손가락을 타고 느껴졌다.

흘끗 곁눈질하니 그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호감도는 변동 없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말없이 한참 동안 잘 조성된 산책로를 거닐었다.

마침내 호수 위에 지어진 전망 데크(Deck)에 도착했다.

딱 봐도 데이트 명소 같은 곳인데, 평일 대낮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난간 위에 두 팔을 얹고 한동안 호수의 경치를 구경했다.

멀리서 물 향기를 동반한 산들바람이 선선히 불어 왔다.

나는 경치를 구경하지도, 그렇다고 내게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은 채 망부석같이 서 있는 놈을 돌아보며 살갑게 말을 건넸다.

“기분은 좀 풀렸니?”

허공을 향해 있던 잿빛 눈이 스르륵 내 쪽으로 움직였다.

무슨 소리냐는 듯,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아침부터 재수 없는 일이 있었잖아.”

이클리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응?’하고 한 번 더 재촉하는 내 물음에 마지못해 변명하듯 답했다.

“……별일 아니었어요.”

나는 지은 죄가 있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같은 일이 얼마나 더 있었니?”

“처음 겪는 일이에요.”

“이클리스.”

나는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나를 속일 생각하지 말렴. 내가 말했지, 저택에서 머무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게 만들라고.”

“…….”

“지금 당장 그걸 해내지 못했다 하여 혼을 내려는 게 아니야. 네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으니 내가 나서는 것이지.”

“…….”

“혹시 레널드가 앞장서서 널 괴롭히니?”

이클리스는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나는 점점 속이 탔다.

“말해. 레널드가 네게 어떻게 해 왔는지. 내가 알아서 해결해 볼 테니까.”

“어떻게?”

그때까지 침묵하던 이클리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뭐?”

“주인님이 기사단에 뭘 할 수 있는데요?”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네 주제에 뭘 할 수 있냐며 비꼬는 것 같았지만, 밀랍처럼 말간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어떻게 하는 제가 노예인 이상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주인님.”

“…….”

“저를 위한다면 차라리 모르는 척 가만히 계세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나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했다. 그러나 그 뒤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알아서 붙어 있을 테니, 괜히 들쑤셔서 쫓겨나게 하지 말고 가만있어라.’

예상외로, 그는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공작저의 분위기에적응한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만큼 공녀의 위치에 관해서도 파악한 후겠지.

[호감도 33%]

나는 그의 머리 위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고작 33%. 노멀 모드의 시작점에서 주어지는 기본 호감도를 이제 간신히 넘긴 상태다.

이클리스는 난이도가 쉬웠던 노멀 모드에서도 녹록지 않은 상대였다.

페넬로페에게 일말의 충성심이 있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이제 좀 알겠다. 놈의 원래 성격을.

‘실은 본인의 생존을 위한 치밀한 줄다리기였던 것뿐인가.’

30%를 넘긴 호감도를 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 기분이 고양된 모양이었다.

아침의 사건 이후로 솔직히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이대로라면 금방 엔딩을 볼 수 있겠다고, 무기 상점으로 신이 나서 끌고 가던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현실이 이토록 녹록지 않은 것도 모르고.

나는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너도 좀 알겠지. 공작저에서의 내 위치를 말이야.”

내가 그를 향한 몰빵을 재고 따지는 동안, 그 또한 내가 과연 구명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 재 보고 있을 거란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내게 당장 너를 면천시켜 줄 만한 힘은 없단다.”

“…….”

“네가 노예 신분인 이상 괴롭힘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도 없겠지.”

이클리스가 직시한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많지 않았다.

공작에게 가서 기사단 내에 따돌림이 만행하고 있다며 언질을 해 둘 순 있겠지만, 이미 첫 단추를 잘못 꼈다.

‘내가 데리고 온 것만으로도 탐탁지 않아 하는 공작이 한낱 노예의 따돌림을 신경 쓸 리가…….’

살살 달래 보겠다는 생각은 바로 집어치웠다.

“하지만 나는 널 계속 기사단에 둘 거야.”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평소처럼 오만하게 뇌까렸다.

“네 검 실력이 조금이라도 쓸 만해져야 그나마 공작님의 눈에 들지 않겠니.”

“…….”

“그러니까 서러워도 참아. 참고, 계속 훈련해서 실력을 키워.”

“…….”

“가끔 가서 오늘처럼 깽판은 쳐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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