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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50화 (5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0화

잔챙이들을 밟아 줄 순 있더라도, 왕따를 주도하는 레널드까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해결이니 뭐니 같은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나 또한 그놈들이 주도한 학대와 괄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 넘기는 중이었으니까.

“……너나 나나 참, 구질구질한 인생이구나.”

갑자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쩜 몰빵을 해도 이렇게 밑바닥을 기고 있는 남주를 선택했을까.

생각해 보니 내 처지가 그랬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은 자보단, 없는 자의 호감을 사는 게 더 쉬운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자. 이걸 받아 보렴.”

풍파에 찌든 나에겐 노멀 모드의 여주처럼 사랑스러운 얼굴로 깜짝 선물을 주는 상황 따윈,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목걸이를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장난감 같겠지만 검이야. 손잡이 부분을 잡고 마력을 불어넣어 봐.”

이클리스는 뜬금없이 제게 내밀어진 목걸이를 얼떨떨한 얼굴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런 게 검이라니 좀체 믿기지 않은 듯했다.

“얼른.”

내 재촉에 그가 마지못해 엄지와 검지로 검 장식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화앗-! 그의 손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어느 순간 이클리스의 손에는 기다란 장검이 들려 있었다.

“아.”

이클리스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검을 전에 없이 커다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타 검들과는 달리 보석이나 장신구 하나 달리지 않은 투박한 모양새였지만, 날을 타고 흐르는 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기면 열 배로 환불할 줄 알라 하고 나왔는데. 진짜였네?’

과연 남주는 남주인지, 새 훈련복을 입고 한 손으로 웅장한 철검을 들고 서 있는 이클리스는 퍽 멋들어졌다.

그 누구도 노예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주변에 드문드문 있던 인파들이 흘깃대며 그를 눈짓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왜…….”

이클리스는 우두커니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꽉 막힌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가 든 장엄한 철검을 넌지시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잉카 제국에서는 패전국의 노예 따위가 마검을 드는 것이 가당치도 않은 일이야.”

“…….”

“하지만 네가 날 주인으로 모실 생각이 변함없다면, 앞으로 내가 옆에 둘 기사는…….”

“…….”

“네가 유일하겠지.”

이클리스의 동공이 목걸이가 검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욱 커다랗게 확장됐다.

“어떻게 하겠니?”

원래 이렇게 협박처럼 검을 줄 예정이 전혀 아니었다.

노멀 모드의 여주처럼, ‘신분과는 상관없이, 언제까지고 너는 내게 기사야.’ 하고 감동적인 대사를 읊을 생각이었으나…….

‘하하. 내 주제에 감동은 얼어 죽을.’

괴롭힘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와장창 난 분위기에 나는 눈물을 삼키며 협박의 정점을 찍었다.

“내가 주는 검을 받을 건지, 계속 노예로 있을 건지 정해.”

“…….”

이클리스는 나를 빤히 볼 뿐 대답이 없었다.

나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가 받지 않으면, 다시 빼앗아서 공작이나 데릭의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이클리스가 든 검을 높이 치들었다. 그리고.

콰직-!

나무판자로 이루어진 바닥에 검을 세게 박아 넣었다.

“뭐, 뭐 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버벅거리는 순간, 그가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내 손을 무례하게 잡아채어 제 손아귀 안에 꽉 쥐었다.

“당신의 하나뿐인 검으로써 영원한 복종과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클리스는 그 말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말캉한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처음 하는 남주와의 스킨십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미한 온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조차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 당신의 하나뿐인 검으로써 영원한 복종과 사랑을 맹세합니다.

너무 이른 둘만의 기사 서임식이었을까.

노멀 모드에서 이클리스가 여주에게 하던 맹세와는 확연히 달랐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호감도 40%]

치솟는 호감도가 정체 모를 불안감을 단숨에 짓눌렀다.

‘상황이 다를 뿐이야.’

그렇게 위안하며, 손등 위에 키스하고 있는 이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회갈색의 단정한 정수리가 보였다.

“……날 배신하지 마, 이클리스.”

나는 내 몰빵 남주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말을 중얼거렸다.

“배신은…….”

죽음뿐이야.

* * *

무기상에서 사들인 것들은 이튿날 공작저로 모두 배달되었다.

대문 앞에 인부들이 산처럼 쌓아 둔 상자들을 보고 고용인들은 입을 떡 벌리고 기함했다.

“페넬로페 아가씨! 저, 저게 다 무엇입니까?”

놀란 집사가 부랴부랴 방을 찾아왔을 때 나는 막 일어나 세수를 마친 후였다.

“뭐가?”

“오랜만에 외출을 나가신다더니 대체…….”

태연한 내 물음에 집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무기들을 저렇게 많이 사들이셨습니까? 특히 목검들이 가득 든 상자가 60개가 넘습니다.”

“음, 충분치 않아 보이기에.”

나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집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마치 철없는 어린애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들을 걱정하는 마음씨가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만, 아가씨.”

“…….”

“공작저는 기사단에 예산을 아끼지 않습니다. 목검들 또한 마찬가지고요. 아직 수량이 많이 남아 있어, 아가씨께서 새로 구매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누굴 걱정해?’

그의 말을 듣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사이 집사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는데 그런 것들보단 아가씨께서 착용하실 보석들을 구매하지 그러셨습니까. 아니면, 드레스라든지…….”

“집사, 무언가 착오가 있나 본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생각을 정정했다.

“그것들은 가문에 소속된 기사들을 위해 산 게 아니야.”

“예? 그럼…….”

“내 호위에게 준 선물이지.”

그는 내 통 큰 행동들이 도통 믿기지 않는지 더듬더듬 되물었다.

“그럼, 그 많은 것들이 모두…….”

“어제 있던 소동을 집사도 전해 들었을 거 아니야.”

내 말에 당황으로 물들어 있던 집사의 낯빛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럼, 내가 나 욕한 놈들 뭐가 이쁘다고 돈 들여서 무기를 사 줘?’

나는 그런 그의 반응에 속으로 코웃음 쳤다. 그리고 혹시나 헛물켜는 놈들이 없도록 쐐기를 박았다.

“이클리스가 사용할 훈련용 물건들이 썩 부족한 것 같아서 내가 대신 사 줬어. 왜? 보관할 자리가 없어?”

“아니, 아닙니다.”

집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남는 게 공간인 공작저에 그것들을 보관할 곳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물론 집사도 그것 때문에 당황한 것은 전혀 아니겠지만, 나는 일부러 그의 물음을 다른 것으로 곡해하여 답했다.

더 따져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가씨께서 다 생각이 있어 그러신 거겠지요.”

이윽고 집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수긍했다.

‘의외네. 한두 마디 더 토 달 줄 알았는데.’

몇 번 내 위치를 상기시키긴 했지만, 페넬로페를 무식하다고 여기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었다.

나는 이틀 전의 사과 일로 확연히 변한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애한테 신경 쓰는 건 나로 족하니, 굳이 바쁜 집사까지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어.”

“그럼…….”

“지금까지처럼 그냥 지켜보기만 해. 가끔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내게 전달해 주고.”

“알겠습니다. 구매하신 선물들은 아가씨의 호위 기사만 쓸 수 있는 창고에 잘 정리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나는 정중히 대꾸하는 그에게 짧게 웃었다.

간만에 이 집에서 상호 간의 소통이 이루어진 것 같아 기분이 괜찮았다.

집사가 나가고 얼마 후 에밀리가 아침을 들고 찾아왔다.

“아가씨! 아침에 온 물건들 호위분 선물이라면서요?”

테이플 위에 식기를 세팅하며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수다를 늘어놨다.

“빨리도 퍼졌구나.”

“저도 같이 데려가시지…….”

에밀리는 퍽 서운한 티를 내었다.

본디 귀족 영애들에게 전담 하녀란 떼 놓을 수 없는 존재다.

주인의 신뢰란 곧 시종의 권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얼마 전 내 수족이 되겠노라 마음먹은 그녀의 투정이 이해가 갔다.

“자.”

나는 미리 꺼내 뒀던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 이건…….”

무기상에서 사 온 동색 애뮬릿이었다.

에밀리는 선뜻 받지 않고 커다래진 눈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뭐 해, 얼른 받지 않고.”

“이게…… 뭐예요, 아가씨?”

“네 선물이야.”

“선물…… 요?”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더구나.”

에밀리에게 주는 애뮬릿은 시전되는 마법이 너무 포괄적이고 두루뭉술해서 그렇게 값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보편적인 선물용이다.

“나는 적이 많잖니. 너도 이제 내 사람이 됐는데, 언제 어디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 몰라. 그러니 항상 몸에 지니고 있도록 해.”

일전의 화풀이로 나는 에밀리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준다던 비싼 보석을 한번 거절한 전적이 있던 그녀이기에, 솔직히 시험하려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것마저 거절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그러나 고개를 든 에밀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나를 불렀다.

“저, 저 공작저에서 일하는 동안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 봐요.”

“그러니?”

“너무 예뻐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다행이네.”

“앞으로 더 열심히 아가씨를 모실게요! 정말요!”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여러 차례 충성을 맹세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처음 이곳에 들어와 바늘에 찔렸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SYSTEM〉 공작가 주변인들과의 관계 개선으로 명성이 +5 되었습니다. (total : 15)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오르더니, 얼마 전 하락했던 명성이 원상 복귀됐다.

“감사해요, 아가씨! 정말 감사해요!”

연신 허리를 꾸벅이는 에밀리의 목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으며 나는 매번 하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만 갔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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