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1화
오전에 한 번 찾아온 집사는 오후에 또다시 내 방을 방문했다. 공작이 부른다는 전언을 가지고서.
“……아버지가?”
“예.”
나는 잠시 고뇌에 빠졌다. 공작이 왜 부를까, 하는 고뇌는 아니었다.
부를 거리가 너무 많아서 무엇으로 제일 난리를 칠지 아직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널드랑 싸운 거? 아니면 연무장에서 깽판 친 거? ……백지 수표로 이클리스 무기 잔뜩 사 준 거?’
사실 두 번째가 가장 적합했다.
설마 그 나이 먹고 레널드 놈이 동생이랑 싸운 일을 고자질하진 않았을 테고.
돈도 쓰라고 준 거 내 마음대로 쓴 건데 쪼잔하게 뭐라 할까 싶었다.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생각에 잠긴 내 모습이 걱정하는 것으로 비쳤는지, 집사가 넌지시 공작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일단 가지.”
나는 그 말에 더 생각하지 않고 일어났다.
“아버지. 찾으셨다고요.”
가벼운 긴장감을 가지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공작이 나를 반겼다.
“그래, 앉거라.”
반대편 소파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내가 게임 속 공녀가 된 후 두드러지게 변화한 점은, 공작이 더는 본체만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말은 즉, 처음과는 달리 무작정 무릎 꿇고 싹싹 빌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나는 망설임 없이 걸어가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피우고 있던 시가를 지져 끄며 물었다.
“차를 마실 테냐.”
“주신다면 감사히 마실게요.”
공작이 종을 울리고 얼마 후, 하녀가 간단한 다과와 옅은 김이 나는 차를 가지고 왔다.
“됐다. 그만 나가 봐.”
우리 둘 앞에 잔을 놓고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르려 하던 하녀는 공작의 만류에 공손히 인사 후 나갔다.
다시 집무실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등장인물과 타임을 갖는 건 처음이네.’
매번 올 때마다 용건이 명확했다. 잘못을 빌고, 목숨을 구하고, 이곳을 빠르게 떠나는 것.
하지만 그런 내 속사정과는 별개로, 아무도 나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이제야 조금 나아진 태도가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저택의 주인이 솔선수범하여 주전자를 들고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감사를 중얼거리면서도 선뜻 찻잔을 들지 않았다.
알싸한 냄새가 나는 페퍼민트 차를 한 모금 머금은 공작이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페넬로페.”
“네, 아버지.”
“연무장에서 소동이 있었다지.”
예상했던 대로 공작이 부른 이유는 깽판이었다. 레널드와 싸운 이유로 부른 것이 아니라 다행인 걸까.
“……네. 기사들과 마찰이 좀 있었습니다. 죄송해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매 읊던 대로 사죄를 입에 담았다.
딸깍-.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보아라.”
“들으신 그대로일 거예요.”
나는 목숨과 관련 없는 것까지 입 아프게 설명하며 잘못을 빌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대답이 영 신통치 않았는지,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들은 것이 무엇일지 알고.”
“뜬금없이 연무장에 나타난 제가 이클리스에게 한 기사의 목을 조르라고 시켰다는 것이겠지요.”
대수롭지 않게 읊조렸다.
그들이 제 잘못들은 쏙 빼놓고 저들 유리하게 증언했을 건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무렴. 입양된 딸이라지만, 어떻게 공작 앞에서 공녀의 욕을 하다 걸렸다는 말을 고스란히 올리겠는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부르셨다면, 네. 사실이에요.”
나는 공작을 마주 보며 당당하게도 선포했다.
“레이디로서 정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해 자숙을 명하신다면 받들게요. 사냥 대회 또한 참가하지 않고요.”
평소와 달리 잘못했다는 소리는 내뱉지 않았다.
온전한 내 의지로 행한 행동이기도 하고, 별로 잘못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은연중에 목적을 밝혔다.
‘피할 수 있으면 사냥 대회를 피하자!’
이클리스 몰빵을 완전히 확정 지은 나는, 노멀 모드의 여주를 본받아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그의 호감도나 왕창 올릴 생각이었다.
오찬에서 사냥 대회에 관해 들었을 땐 상황이 상황인지라,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사냥 대회는 자긍심 있는 귀족 남성들이라면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그러니 노예 출신이라 참가하지 못하는 이클리스만 빼고, 온 남주들이 총집합하는 날이 아니겠는가.
내가 아무리 피하려고 용을 써도, 숲은 너무 위험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지기 딱 좋은 에피소드야.’
게다가 황궁에서 열리는 것이니 매우 높은 확률로 황태자와 엮일 것이다.
초대장을 나한테만 따로 보낼 만큼 내게 관심을 가졌던 놈이다.
괜히 사냥이나 구경한답시고 나섰다가 간신히 꺼둔 놈의 호기심에 불이라도 붙인다면…….
‘안 돼-!’
나는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절대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
“…….”
한차례 싸늘한 정적이 집무실 안을 휩쓸었다.
공작이 이윽고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서늘하게 되물었다.
“가문을 지키는 기사를 시해할 뻔해 놓고, 잘못한 것이 없다고?”
“네.”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곧장 답했다.
그러자 공작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좋다. 그럼 네 호위를 시켜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하게 물어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가는 기사들에 대한 위상과 신뢰가 무척이나 높았다.
에카르트 소속 기사를 무시하는 것은 곧 에카르트를 무시한 것.
기사의 목을 조르는 무식한 짓까지 했으니 어느 정도의 처벌은 각오했다.
‘잘못한 거 없다고 뻔뻔하게 나가면 바로 벼락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근신이 필요한 나는, 공작의 반응이 뜻밖으로만 여겨졌다.
“……제 말보단 기사들의 말이 더 신뢰할 만하지 않으시겠어요?”
“페넬로페 에카르트.”
고심하며 뱉은 말이 무색하게 공작이 정색하고 풀네임을 불렀다.
“에카르트의 성을 달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의중을 묻고 있으니 신중하게 대답하도록 해라.”
“…….”
“설마 아무 이유 없이 심심해서 그랬다고 하진 않겠지. 그간 연무장 쪽으로는 발길도 들이밀지 않던 네가.”
공작의 의심은 정당했다.
하기야, 아무리 미친개처럼 날뛰는 악녀라지만 이유 없이 훈련하는 기사들한테 가서 시비를 걸진 않았을 테지.
“게다가 외출 전에 집사에게 네 호위의 처우에 관한 것들을 상세히도 물었더구나.”
“그, 그건…….”
나는 덧붙여지는 공작의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반사적으로 어떻게 알았는지 물으려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질문을 한 이가 집사뿐이니 새어 나간 것도 당연히 그쪽일 터.
‘에휴, 촉새 같으니라고…….’
나는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그르친 집사를 원망했다.
멈칫하는 내 모습을 알아본 공작이 나를 쏘아보았다.
“이제 좀 말할 생각이 생겼느냐?”
“모두 제 탓이에요, 아버지. 그냥 단순한 변덕으로 연무장에 갔다가, 기사들이 제게 인사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기사들의 증언으로는 네가 데리고 온 노예의 처벌과 관련되었다던데.”
“…….”
“주제도 모르고 분란을 일으킨 그 노예 놈을 기어이 견습 기사 자리에서 내쫓아야 입을 열 것이야!”
점점 분노가 실리는 공작의 목소리에 나는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단순한 변덕’이란 말에도 그는 믿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날 일을 빠짐없이 소상히 얘기해라. 안 그러면 모든 책임은 하극상을 벌인 그 노예 놈에게 물을 테니.”
이클리스를 들먹이는 말에 나는 별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외출을 하려고 산책 겸 연무장으로 제 호위를 데리러 갔는데.”
“…….”
“마크란 기사가 훈련 중 목검을 부러뜨렸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제 호위 기사에게 과한 처벌을 내리는 걸 보았어요.”
별거 아닌 일로 투정 부리는 철없는 애 같은 볼멘소리였다.
오죽했는지, 공작의 눈살도 바로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그게 이유라고 직감했는지 곧장 호통치듯 소리쳤다.
“군기를 위해 기사들의 상하 관계에서 엄중한 처벌이 발생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것을 모른다고 말할 나이는 이제 지났지 않아.”
“그 와중에 이클리스의 주인인 저를 모욕했고요.”
“뭐…… 뭐라?”
내 대답을 듣고 다시 혼을 낼 준비를 하던 공작이 눈을 부릅뜨며 말을 더듬었다.
역시나 놈들이 쏙 빼놓고 말한 배경일 것이다.
“그에 제 호위 기사가 발끈하여 반박하니 동료들과 함께 집단 구타하려 들더군요.”
“…….”
“그래서 이클리스에게 레이디의 명예를 더럽힌 기사와 결투를 하라 했어요.”
정확히는 죽이라 한 거였지만.
그런 상스러운 말을 공작 앞에 곧이곧대로 고해바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공작은 내 말에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멍하니 한 입도 대지 않은 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김이 뽀얗게 솟아오르던 내용물은 어느새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공작도 나도 누구 하나 새로 차를 따르려 들지 않았다.
‘……지겨워.’
딱딱하게 굳은 공작 쪽을 흘깃 곁눈질하다가, 문득 이 상황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출할 때까지, 얼마나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그놈이…….”
공작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깊게 잠긴 소리를 내었다.
“그놈들이 무어라 너를 모욕했느냐.”
“내쫓기면 제 앞가림도 못 할 가짜라고요.”
“…….”
“그러니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게 썩은 동아줄이란 걸 하루빨리 깨달으라 하더라고요.”
과장 하나 없이 고스란히 읊어 주었다.
자신들의 만행을 빼놓고 보고한 그 기사 놈들이 괘씸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내가 뭘 하든 신경 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하지만 천천히 일그러지는 공작의 얼굴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왜 나와 데릭에게 즉시 찾아와 고하지 않았지?”
그는 무언가를 인내하듯 크게 호흡하며 물었다.
확실히 페넬로페라면, 대번 공작의 방에 쳐들어가 기사들이 자기를 무시했다며 악다구니부터 질렀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냥 사실대로 말했다.
“……바로 응징을 하기도 했고,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가치가 없다니!”
대답을 끝내기 무섭게 공작이 버럭 노성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