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2화
“감히 기사씩이나 돼서 레이디를 모욕한 천박한 짓거리를 고하는 일이 어찌 가치 없는 일이야!”
나는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은 아버지와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들이지 제게 충성하는 기사들은 아니잖아요?”
호위를 직접 데리고 오면서 이미 다 끝난 얘긴 줄 알았다.
공녀를 인정하지 않는 기사들에게 나 역시 충성을 바라지 않는다.
이건 기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고용인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사실 밥을 코앞에 두고 굶은 것에 비하면, 그런 욕쯤은 정말 별거 아니다.
이클리스가 연관만 되어 있지 않았어도 그냥 지나쳤을 일이었다.
“페넬로페. 대체…….”
그러나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막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문의 기사들은 모두 네 기사들이기도 하다. 그건 네가 에카르트의 일원인 이상 앞으로도 불변할 일이고.”
“제겐 이클리스면 충분해요.”
“단순히 호위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저도 제 기사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버지.”
나는 공작에게 지지 않고 이어 말했다.
“절 보호하고 싶지 않은 자들에게 피차 제 안위를 맡기고 싶지 않다고 일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하지만 변한 것은 없었지.
이클리스가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의 숙소가 아닌 견습 기사들이 머무는 숙소로 배치된 것 외엔.
“어제도, 축제 첫날에도, 절 지켜 준 기사는 이클리스 하나뿐이에요.”
그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인간 옆에서 맞장구를 치거나, 말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놈들은 영원히 내 기사가 될 일이 없었다.
“후…….”
눈을 부릅뜨고 읊조리는 내 모습에 더 설득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공작이 아연한 얼굴로 깊은 날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런 대화가 조금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며 고요히 물었다.
“……그래서. 어제 일 때문에 목검을 600개씩이나 사들인 게냐.”
‘600개나 돼?’
일일이 세 보지 않아서 미처 몰랐다.
집사가 아침에 대경실색하여 내 방에 올라온 이유를 알 것 같아 좀 웃겼다.
나는 이왕 혼날 거 이클리스를 아예 기사로서 곁에 둘 것을 암시하기로 했다.
“안쓰러워서 마검도 하나 사 줬어요.”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런 데나 쓰라고 백지 수표를 준 것이…….”
“너무 혼내기만 하지 마세요, 아버지.”
나는 이어지는 잔소리를 덥석 가로막으며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기분 풀고 오라고 주신 거잖아요.”
사랑스러운 막내딸처럼 보이도록. 더 이상의 잔소리를 들기 싫어 시도한 흉내였다.
새침하게 덧붙인 후 나는 식은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입 안이 바짝 말랐기 때문이다.
‘말 막았다고 난리 치진 않겠지?’
나는 원래 애교 같은 건 젬병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어제 일로 크게 화를 낼 시선물을 주면서, 애교나 좀 떨어 볼 계획이었는데…….
뭔가 순서도 상황도 크게 틀어져 버렸다.
‘나는 왜 맨날 이 모양일까…….’
눈물을 삼키며 들고 있는 찻잔 너머로 열심히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쯧. 감기 걸리게 왜 다 식은 걸 들이켜고 있어. 찻물을 덥혀 오면 그때 다시 먹거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작은 차를 마시는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볼지언정, 그만 잔소리하라고 불평한 것에 대해 더 화를 내진 않았다.
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녀를 불러 주전자를 덥혀 오라 지시했다.
‘이것도 좀 먹히는 방법이나 보네.’
나는 내심 안도했다.
저번, 사과로도 해결되지 않는 레널드와의 대화 이후 대비책을 생각하길 잘했다.
노멀 모드의 여주를 여러 번 되새기다 보니 매 상황에 호구처럼 사과만 하는 것이 답은 아니었다.
하드 모드의 난이도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앞으로 매 상황에 맞게 변별력을 길러야 해.’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페넬로페.”
문득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아버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공작이 음산하게 뇌까렸다.
“노예는 안 된다.”
“……예?”
“설사 신분을 획득한다 해도, 놈은 패전국 출신이 아니냐.”
“무슨…….”
나는 뜬금없는 말에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그러나 말을 잇는 공작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한없이 진지했다.
“반반한 얼굴 뒤에 무슨 탐욕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에카르트의 하나뿐인 공녀를 노리는 자가 어디 한두 명일 것 같으…….”
“아버지, 아버지.”
나는 당황해서 그를 연이어 불렀다.
‘설마, 지금 내가 이클리스를 정부로 삼기 위해 곁에 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면 아주 심각한 착각이었다. 언제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놈인데.
‘반반한 얼굴은 무슨! 호감도 떨어질 때마다 심장도 같이 떨어지는구만!’
당황하니 말이 빨라졌다.
“제가 다른 영애들에 비해 미흡한 건 알지만,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계집애처럼 곱상한 그놈 얼굴을 보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 혹시나.”
“통속 소설도 아니고 무슨 호위 기사와 정분이 나겠어요? 그리고 저는 저보다 어린 사람 취향 아니에요.”
어차피 남주들은 결국 여주의 차지다.
게다가 나는 그놈이 성년이 되기도 전에 엔딩을 본 후 뒤도 안 돌아보고 여기서 떠날 것이다.
기가 막힌다는 심정이 전해졌는지 공작이 무안해하며 헛기침을 했다.
“큼,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믿으마.”
“걱정 마세요, 아버지.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도, 일어나서도 안 되니까.”
헛된 기대와 쓸모없는 감정들은 탈출에 방해만 될 뿐이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정 걱정되시면, 당분간은 아무 데도 외출하지 않고 방 안에서 근신을…….”
“근신은 충분히 했으니, 이번 사냥 대회에 너도 꼭 참석하도록 해라.”
“네? 그렇지만…….”
“방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이번 기회에 네 또래 영애들과도 좀 어울리고 해라. 그 고약한 성질머리도 좀 줄이고!”
공작이 혀를 끌끌 차며 타박했다.
불쑥 억울함이 차올랐다. 누가 보면 좋아서 집에 처박혀 있는 줄 알겠다.
나는 마지막 미련을 끝내 놓지 못하고 질척거렸다.
“……그렇지만 아버지. 제가 어제 아주 크은! 문제를 일으켰잖아요.”
“문제는 무슨! 그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됐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꾸나.”
공작이 이를 빡빡 갈며 윽박지르다 갑자기 말을 멈췄다.
더 하다간 심한 욕을 내뱉을 것 같아 스스로 자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쳇. 아무리 소중한 기사한테 목 좀 조르라고 시켰기로서니,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짓이라니! 너무하잖아.’
나는 입을 삐쭉였다. 그럼에도 이 정도에서 분노를 그쳐 준 공작에게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 서러웠다.
꼼짝없이 사냥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무서운 벌이 주어졌지만.
“이거 받거라.”
그때였다. 공작이 갑자기 몸을 숙여 바닥에서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였다. 테이블에 가려져 있어서 그곳에 있는지 몰랐다.
탁, 꽤 무게가 있는 듯 테이블 위에 얹어진 상자에서 묵직한 소음이 났다.
가까이 보니 단순한 상자가 아닌 무언가를 보관하는 가방 같았다.
상단에 들 수 있는 손잡이와 잠금 버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금도 모조리 푼 공작이 가방을 열어 내 쪽으로 돌렸다.
“이건…….”
나는 내 앞에 내밀어진 가방 안의 물건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디 중세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은빛의 화려한 석궁이 푹신한 쿠션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새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빛깔.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과 군데군데 박혀 있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였다.
“손질을 맡겨 뒀던 네 석궁이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보상으로 [마법 석궁 1개]를 획득했습니다.
‘보상? 무슨…….’
갑자기 떠오른 네모 창을 보며 어리둥절하던 순간, 불현듯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 보상으로 [레널드]의 [호감도 +3%]와 [석궁]을 얻었습니다.
망할 레널드 놈과의 퀘스트로 얻은 석궁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
어이가 없어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 받아들인 건지 공작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번엔 안전을 위해 좀 더 손을 봐 뒀지.”
나는 그 말에 다시 나무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석궁은 무기라기보단 벽에 걸어놔야 할 웅장한 장식품 같았다.
‘안전을 위한다더니, 아예 쏠 수 없게 만든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즈음, 공작이 그것을 부정하듯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었다.
화려한 석궁에 시선을 빼앗겨 미처 보지 못한 검은색 주머니였다.
“이걸 보아라, 페넬로페.”
공작이 주머니의 끈을 풀고 입구를 열어 내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엄지손톱만 한 동글동글한 쇠 구슬이 가득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뭐예요, 아버지?”
“화살 대신 마법이 걸린 구슬로 대체했다.”
“마법요? 어떤…….”
“맞으면 구슬이 터지면서 즉시 뇌전이 터져 한동안 기절하게 되지. 죽음에 처할 정도로 강한 세기는 아니니 혹여 사람이 맞더라도 크게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나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뒤늦게 열심히 설명해 준 공작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참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이미 모든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사냥은 무슨…… 황태자 놈 눈에 안 띄게 잘 숨어나 있으면 다행이게.’
내가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자, 공작의 낯이 조금 굳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는 전보다 어두워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구슬을 맞는 즉시 맞기 직전의 기억을 잃는 마법이 걸려 있지.”
“네? ……기억을 잃는 마법이요?”
대관절, 석궁과 기억을 잃는 마법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이번에도 영문을 알 수 없어 멀뚱멀뚱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마지못해 이야기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 쏘고 싶거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유인하여 쏘거라.”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