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3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공작의 말은 꼭 사람을 쏴도 된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 아버지. 그게 무슨 뜻…….”
나는 버벅대다가, 알아들은 게 맞는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그러자 공작이 크게 혀를 찼다.
“쯧, 이전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아지처럼 날뛰어 가문에 먹칠할 생각 말고!”
“…….”
“어차피 기절하고 나면 기억을 잃을 테니 네가 왔다는 목격자만 남기지 말란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꼭 사고 치기 직전의 철부지 딸을 회유하는 듯한 말투였다.
‘석궁으로 쏴 죽이겠다고 난리 쳐서 1년간 참가 금지였다며?!’
그런데 하지 말란 말 대신, 화살을 기절하게 만드는 구슬로 바꾸고 기억을 잃게 하는 마법까지 걸다니.
‘참…… 공작가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페넬로페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대답이 없는 게야.”
말이 없는 나를 석연치 않은 듯 바라보며 공작이 채근했다.
“아. 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웅얼거리듯 답했다.
인간 사냥 같은 건 안 하고 얌전히 있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피하고자 했던 사냥 대회 참석이 이로써 확정되었기에…….
“……알았어요, 아버지. 감사히 잘 쓸게요.”
“크흠. 알아들었으면 됐다.”
시무룩하게 한 번 더 확답하자, 공작이 헛기침하며 말을 보탰다.
“네 입장에서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겸사겸사 이걸 주려 했던 것이지, 혼을 내려고 부른 것이 아니다.”
뜻밖의 위로였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공작을 보았다.
“큼, 알았으면 그만 가지고 올라가거라. 대화가 길어졌구나.”
본인도 이런 소리를 할 줄 몰랐는지, 그는 조금 멋쩍게 웃으며 황급히 자리를 정리했다.
막을 틈도 없이 하녀를 불러 석궁을 내 방에 갖다 놓으라 지시한 것이다.
나는 순식간에 깔끔해진 테이블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아, 저…….”
공작이 여전히 앉아 있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음?”
에라, 모르겠다. 이왕 가지고 온 거 주지 뭐.
“저도 드릴 게 있어요, 아버지.”
나는 치마 옆에 대충 가려 놓았던 것을 주섬주섬 꺼냈다.
에밀리에게 준 것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벨벳으로 포장된 상자였다.
그것을 열어 조심스럽게 공작 앞에 내밀었다.
찬란한 은빛이 공작의 커다래진 눈동자 안을 수놓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선물에 퍽 놀란듯 했다.
“이건…… 애뮬릿이 아니냐.”
“긴급 텔레포트 마법이 발동되는 주문서가 새겨진 것이에요.”
“네가 이걸 내게 왜…….”
역시나. 공작의 반응을 보니, 그간 막내딸에게 정원에 널린 꽃 한 송이 받아 본 적 없는 게 분명했다.
나는 어리석은 페넬로페를 향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살가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요즘 사냥 대회에 참석하는 귀족들끼리 가장 많이 주고받는 선물이래요, 아버지.”
“선물……?”
“네. 이번 사냥 대회는 타국에서 온 객들도 참여하고, 그들이 데리고 온 희귀한 동물들도 풀어 놓을 예정이라면서요.”
“그렇지.”
“혹시 모르니 대회 기간 내내 몸에 꼭 지니고 계셨으면 해요.”
“……감히 누가 이 제국에서 나를 공격하려 들겠느냐.”
“공격은 하지 않겠지만, 에카르트의 정치적인 위치를 노리고 어떤 세력이 접근할지 모르잖아요.”
내 대답에 공작은 처음 보는 낯선 생물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준 은색의 화려한 애뮬릿은 긴급 텔레포트 발동 주문이 새겨져 있어 가격도 꽤 비쌌다.
실은 방어 주문이 새겨진 것과 이것 중 고민했지만, 이편이 나았다.
중립파를 표방하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에카르트였다.
그런데 공작을 죽이거나 공격한다면 에카르트마저 적으로 돌리고 전쟁이 재발발할 테니, 그런 멍청한 짓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납치해서 협박할 수 있겠지.’
“혹여라도 아버지의 신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에카르트를 파벌 싸움에 끼어들 게 만들려는 세력들이 분명 나타날 거예요.”
“네, 네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공작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중얼거리다, 흠칫하더니 나를 보고 “아니, 아니다.”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그래. 내 꼭 지니고 있으마.”
그는 조금 전 ‘맞은 사람의 기억을 잃게 만드는 마법이 걸린’ 석궁을 받은 나처럼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천방지축 수양딸에게 이런 뜻깊은 선물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그럼 올라가 볼게요.”
본래는 그의 화를 조금이라도 피하고자 가져온 선물이었다.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이 주게 됐지만, 어쨌든 선물 전달식이 끝났다.
괜히 가슴이 간지러워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급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페넬로페.”
문득 뒤에서 나지막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지.”
“……요즘 들어 제법 의젓해졌구나.”
공작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듣기 좋은 칭찬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말에 목이 메었다. 이유는 나도 알지 못했다.
그냥, 그 순간 입이 절로 움직였다.
“……공작님.”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공작의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는 게 보였다.
“그간 원망한 적 없다고 말하진 못해요.”
“…….”
“그렇지만…….”
이건 가엾은 페넬로페를 위한 말인 걸까. 아니면,
“저를 데리고 와 주신 것을, 단 한 번도 감사하지 않다고 여긴 적은 없어요.”
페넬로페처럼 철없는 망아지 취급조차 받지 못한 내가 비참해서 하는 말인 걸까.
그 순간이었다.
〈SYSTEM〉에카르트 공작과의 관계 개선으로 명성이 +15 상승했습니다.
(total : 30)
어느 쪽이건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 * *
사냥 대회가 부쩍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오전에 집사를 불러 촉이 뭉툭한 연습용 나무 볼트(Bolt, 화살)를 받아 냈다.
마법이 이중으로 걸린 비싼 구슬들을 고작 연습용으로 소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그리고 이것…….”
내게 볼트 뭉치를 건넨 후에도 집사는 바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내게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나는 의아했다.
뷘터와의 만남이 성공한 이후, 집사에게 내게 날아오는 초대장들을 모조리 불태우라고 재지시를 해 뒀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온 편지인지라 제가 멋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황…… 궁?”
집사의 말에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황궁에서 나한테 편지를 보낼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황룡이 새겨진 황금색 밀랍이 불길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읽기 싫다.’
그러나 대비를 위해선 읽어야 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녀.
미로 정원에서의 만남 이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간 황궁에서 크고 작은 연회가 열릴 때마다 빼놓지 않고 공녀에게 초대장을 보내 두라 일렀는데, 단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더군.
아직도 쇳독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건가?
다행히 곧 사냥 대회이니 그대와 다시 만날 날도 머지않았군.
참가 금지령이 해제됐다는 소식을 공녀도 전해 들었겠지?
내 아픈 공녀를 위해 친히 목소리 높여 그것에 찬성했다.
그러니 부디 하루속히 쾌차하여 멀쩡한 낯으로 만날 수 있길 바라지.
추신 : 나와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좋을 거야, 공녀.
그대가 내게 줄 답변이 몹시도 고대되어, 그 빌어먹을 쇳독이 낫길 오랫동안 인내했거든.
- 칼리스토 레굴루스.]
“미친!”
강한 필기체로 휘갈겨진 서명까지 읽은 나는 치를 떨며 들고 있던 종이를 사정없이 구겼다.
‘왜 아직도 안 잊은 건데!’
황태자 놈의 집요함에 나는 몸서리를 쳤다.
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빙의됐는데 연서는커녕, 협박 편지나 받고 있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아, 아가씨?”
집사가 그런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관절 무슨 편지이기에 그러십니까?”
응. 할 일 더럽게 없는 어느 미친놈의 협박 편지.
“……집사.”
나는 그 말을 간신히 씹어 삼키며 대뜸 물었다.
“오늘 기사들의 훈련 시간이 언제까지지?”
“오후 6시까지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째서 물으시는 겁니까?”
원래는 시간 날 때 시험 삼아 한 두 번 쏴 볼 생각이었다.
이 몸의 활 실력이 어느 정도기에 작년에 그 난리를 쳤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당장 연무장 좀 사용해야겠어.”
필사적으로 석궁을 능히 다뤄야 할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