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54화 (5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4화

집사로부터 저녁 훈련이 없다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책을 보며 해가 지길 기다렸다.

‘에휴…… 게임에 빙의돼서, 무슨 팔자에도 없는 석궁 쏘기 연습이냐.’

귀찮고 억울했지만, 별수 없었다.

황태자에게 협박 편지까지 받은 나는, 이제 내 목숨을 위해서라도 호신할 줄 알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썩 괜찮은 물건을 획득했다는 건가.’

나는 공작의 걱정처럼 신경을 거스르는 여자들을 응징하는 게 아닌, 나를 죽이려 드는 남주들을 쏴서 기절시킬 것이다.

특히 제일 위험하고, 건드리기도 제일 까다로운 황태자!

그놈한테 잘못 왔다간 황족 시해범으로 몰려 그대로 데드 엔딩일 테니까.

하지만 천만 다행히도 쇠 구슬은 터지면서 충격이 오르기 때문에 증거도 남지 않고, 맞은 기억마저 잃는다.

“완벽해.”

나는 거품 물고 기절하는 황태자 놈의 몰골을 상상하며 기립 박수를 쳤다.

‘이건 어디까지나 방어책이야.’

절대 개인적인 감정이 섞인 것이 아니다. 애써 그렇게 자기 합리화했다.

얼마 후 창밖으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나는 사냥용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잉카 제국의 귀족 여성들은 사냥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의복이 따로 없었다.

하여 소년들이나 입는 두꺼운 타이즈에 멜빵 반바지를 입었다.

가죽조끼와 타이까지 걸친 후 거울 앞에 섰다.

남성복을 입었으니 우스꽝스럽겠다 싶었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대박, 완전 잘 어울리잖아.”

과연 미친 외모는 한낱 의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마저 한데 모아 위로 틀어 올리자 아르테미스 여신처럼 사냥에 익숙한 여전사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석궁까지 꺼내 구색을 맞췄다.

겉보기엔 무거운 줄 알았으나 경량 마법 때문인지 의외로 가뿐했다.

1년 전 이맘때, 페넬로페가 자주 사용하였다더니 정말로 손에 익은 듯 손에 쥔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마지막 점검을 마친 나는, 화살 묶음도 잊지 않고 챙겨 든 채 방을 나섰다.

“헉!”

“흐읍……!”

오늘따라 마주치는 고용인마다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내리깔기 급급했다.

본디 복도를 거닐 때마다 곱지 않은 시선들이 날카롭게 와 박혔다.

석궁과 화살을 든 내 모습이 퍽 흉흉해 보이는 듯했다.

‘기를 눌러 줄 때 종종 들고 활보 해 줘야겠어.’

덕분에 나는 방해꾼 하나 없이 무사히 저택을 나올 수 있었다.

연무장으로 가는 길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일부러 기사들이 모두 사라졌을 시간에 맞췄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인물로 인해 부서졌다.

노을빛을 받은 분홍 머리가 평소와 달리 짙은 붉은색을 띠었다.

내 머리 색과 얼추 비슷하게 보일 정도로.

하지만 그놈의 머리 색보다 그 위에 적힌 [호감도 17%]를 먼저 알아본 나는 황급히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놈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망할…….’

어쩌다 보니 어정쩡하게 서로를 마주 보는 상황에 부닥치게 된 나는 깊게 탄식했다.

하필 마주쳐도 기피 대상 1순위와 마주치다니. 어떻게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 있을까.

‘어떡하지?’

바로 얼마 전에 이를 드러낸 채 싸워 놓고 이제 와 레널드 놈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렇다고 눈까지 마주친 상태에서 몸을 돌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하여 나는 그냥 뻔뻔하게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뭐 어쩔 거야. 저도 염치란 게 있으면 무시하겠지.’

그러나 레널드 놈은 내 생각보다 훨씬 염치가 없었다.

“사냥 처음 나서는 촌뜨기 같은 몰골이네.”

막 곁을 지나치려는 순간, 놈이 빈정거렸다.

“쪽팔리게 지금 그 꼬라지로 연무장 가려고 하는 거냐?”

나는 우선 주변부터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다행히도 잘못 넘어져 머리를 찧을 만한 돌멩이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이제 내 말은 아예 무시하기로 했나 봐?”

재빨리 앞을 막아서는 놈에 의해 더 갈 수 없었다.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뭐 할 말 있어?”

내 물음에 레널드는 할 말이 굉장히 많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시빈지 들어나 보자.’

나는 놈을 바라보며 돌아올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놈은 그저 나를 빤히 응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 없으면 말 걸지 마.”

나는 다시 놈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제야 레널드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직 훈련 안 끝났어. 며칠간 계속 늦게까지 추가 훈련이 있어서 지금 가면 기사 놈들이랑 마주칠 거다.”

놈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확실히 건네진 말대로라면 곤란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기사들이랑 다퉜다는 소식이 벌써 놈의 귀에까지 들어갔나 보다.

‘그렇지만 뭐 어때? 피하려면 뒷담 깐 놈들이 피해야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상관없어. 나 쓸 과녁 하나쯤은 있겠지.”

“…….”

“할 말 다 끝났으면 갈게.”

그리고 그대로 그를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였다.

“……다락방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

의외의 말이 발목을 붙들었다.

“이제 가든 말든 신경 안 쓸 테니까.”

무슨 소릴 하나 가만히 듣던 나는 문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꼭 적선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네.’

페넬로페라면 그 다락방에 애착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었다.

괜히 올라갔다가 또 불꽃인지 지랄인지 보면서 소원 비는 거냔 추궁을 받을지 어찌 아는가.

나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싫어.”

“……왜?”

“너랑 마주치기 싫으니까.”

파란색 동공이 일순 커다래졌다. 놈의 머리 위 흰 글씨들이 깜빡였다.

무표정하게 그 일련의 과정들을 바라보았다.

[호감도 17%]

이 정도면 1, 2% 정도 떨어진다고 해도 별 차이 없을 것이다.

나는 시시껄렁한 그의 호감도보다 그가 전달해 준 덜 끝난 훈련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럼 이클리스도 아직 있으려나?’

사냥 대회 때 이클리스의 호감도나 왕창 올려야겠다는 계획은 실패했으니, 가기 전에라도 올려 둬야겠다.

그때였다. 계속 주저하던 레널드의 입술이 가까스로 벌어졌다.

“그때는…… 했다.”

“……뭐?”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그가 뭐라 말하는지 놓쳤다.

그를 돌아보며 되묻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말이 좀…… 했다.”

그런데도 레널드가 뭐라 말을 한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직감했다.

‘사과할 거면 사내답게 좀 할 것이지.’

속으로 혀를 차며 나는 다시 물어 주었다.

“뭐라고?”

“내가…… 하다고.”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리는데?”

쑥스러워하는 꼴을 보자니, 절로 이죽거리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이런 내 심보가 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그간 놈한테 당해 왔던 걸 생각하니 멈출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그땐 내가 말이 좀 심해서 미안했다고-!”

레널드가 갑자기 번쩍 고개를 쳐들더니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푸드더덕- 수풀 저편에서 놀란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나는 따갑게 울리는 귓가를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놈이 시뻘게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다른 땐 제가 먼저 와서 잘도 말 걸더니, 이번엔 왜 그렇게 오래 처 삐지고 그래? 하여튼 계집애들이란…….”

나는 그런 레널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순한 투덜거림일 뿐인데도 그간 그와 페넬로페의 관계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정상적인 게임 루트였다면 여기서 어떻게 진행됐을까.

‘레널드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당연히 먼저 사과해 줘서 고맙다 해야겠지.’

그런데 왤까.

왜 나는 매번 고맙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하는 걸까.

“레널드.”

내 부름에 놈이 나를 흘겨보며 불퉁하게 대답했다.

“뭐.”

“네 사과, 받아들일게. 나도 뭐 잘 한 건 없으니까.”

“알면 다행이네.”

먼저 사과를 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구겨져 있던 레널드의 얼굴이 곧바로 당당하게 펴졌다.

마치 내가 사과를 받아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양.

“그런데 그거 알아?”

“뭘?”

“너한테 처음으로 받은 사과야.”

난 적선하듯 받은 사과에 고맙다는 말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넌 지금까지 수도 없이 혀로 나를 난도질했고, 난 네 사과 같은 거 없어도 수없이 널 용서해 왔어. 그러니까…….”

“…….”

“이번에도 널 용서할 거야.”

대신 환하게 웃었다.

네가 사과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널 받아 주는 거란 생각이 들 수 있도록 악착같이 웃었다.

반전된 자리 탓에 산등성이 너머로 타오르는 노을빛이 이번에는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휘몰아치는 바람결에 잔머리가 흩날렸다. 한 손으로 옆머리를 추슬러 귀에 꽂고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응?’

나를 바라보던 레널드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눈빛이 혼몽하더니, 눈이 마주치자 눈가 아래부터 홍조가 발갛게 번지는 게 아닌가.

“네…….”

순식간에 벌게진 얼굴로 그가 말을 더듬었다.

“네까짓 게 하는 용서 따위 필요 없거든?”

“…….”

“할 말 다 했으니까 난 간다.”

그리고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몸을 돌려 쏜살같이 사라졌다.

“……뭐야. 왜 저래?”

숲길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멀어지는 놈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놈의 머리 위가 크게 반짝이더니.

[호감도 22%]

나는 점점 작아지는 흰색 글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여러 번 확인해야 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