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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55화 (5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5화

레널드의 말이 맞았다.

연무장에 도착하니 이제 막 기사들의 검술 훈련이 끝난 듯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다행히 궁술 훈련은 없었는지, 대련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과녁 터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몰려 있는 기사들을 피해 연무장을 빙 돌아 그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가로지르면 더 빠르겠지만, 바로 얼마 전에 공작과 대면하고 온 참이었다.

당분간은 괜히 분란을 더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있는 편이 좋았다.

마침내 과녁 앞에 선 나는 화살을 석궁에 장착한 후 시위를 당겨 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크랭크(장전장치)를 돌리며 자세를 취해 보았다.

나는 1년간 석궁을 사용했다던 이 몸의 주인을 믿었다.

“……왜 이러지?”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과녁을 향한 활 끝이 불안정했다.

그냥 들고 서 있을 때는 가볍다고 느꼈는데, 막상 어딘가를 향해 겨누려 들자 생각보다 묵직해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얘도 사실 안 쏴 본 거 아냐?”

견디지 못하고 다시 팔을 내리며 불평을 토했다.

장전은 간신히 하겠는데 어떻게 잡고 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얍!”

아릿한 손목을 탈탈 털던 나는 다시 기합을 뱉으며 석궁을 들어 보였다.

이번엔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전에 재빨리 쓸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잡으면 조준할 수 없어요.”

문득 등 뒤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턱-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바들바들 떨리던 석궁이 뻗어져 나온 손에 의해 가뿐히 받쳐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려 했다.

“주인님.”

그러나 뒤에 닿은 단단한 몸으로 인해 무산됐다.

“……이클리스?”

나는 그제야 타인의 두 팔 안에 완전히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쉬. 앞을 보셔야죠, 주인님.”

당황한 내가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자 이클리스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냥감이 다 달아나겠어요.”

나는 그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등이 이클리스의 가슴팍에 완전히 밀착됐다.

왠지 모르게 입이 말라 마른침을 삼켰다.

“왼손은 놓고, 오른손으로 방아쇠를 잡은 다음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안으세요.”

그는 석궁을 받쳐 들던 오른손을 스윽 움직여 내 손 위에 겹쳐 잡았다.

손등 위가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로 덮였다.

그러나 그보다 그의 숨결이 닿은 목덜미가 더 신경 쓰였다.

“왼손으로는 틸러 아래를 받치시고요. 이제 과녁을 바라보세요.”

이번엔 그의 왼손이 먼저 내 손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의 도움으로 자세를 다시 취하니 조준이 훨씬 안정적으로 되었다.

“숨 쉬세요, 주인님.”

귓가에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틸러 너머로 보이는 과녁의 빨간 점이 문득 아스라해진다는 생각이 들 무렵.

피슉- 방아쇠가 당겨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녁의 정중앙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잘하셨어요.”

겹쳐 잡고 있던 온기가 손등을 은근히 쓸어내렸다.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둬 두고 있던 단단한 팔이 내려갔다.

다음 순간 등 뒤에 바싹 붙어 있던 이클리스는 깔끔하게 떨어져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여전히 손등이 무언가에 덮인 것처럼 갑갑하고 화끈거렸다.

나는 천천히 호흡하며 들고 있던 석궁을 내렸다.

“훈련은 끝났니?”

이윽고 그를 향해 얼굴을 들었을 땐, 알 수 없는 간지러움은 모두 사라진 후였다.

이클리스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물었다.

“언제부터 와 계셨어요?”

“얼마 안 됐어.”

“절 찾지 않으시고요.”

왜 자신을 찾지 않았느냐고 불평하는 듯한 어투였다.

“서운했니?”

밀랍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소리를 잘도 하는 게 좀 웃겨서 나는 짧게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밉보였는데 훈련 중에 나까지 부르면 안 되지.”

“걱정하셨어요?”

“그럼. 난 항상 네 걱정뿐이지.”

그 순간, 그의 입술 끝이 조금 움찔거렸다. 그리고.

[호감도 44%]

치솟는 호감도가 기분을 썩 괜찮게 만들었다.

입가에 걸쳐진 내 미소가 좀 전보다 더 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젠 제법 기사 티가 나는구나. 새로 산 훈련복들은 마음에 드니?”

확실히 돈값을 하긴 하는지, 이전의 구질구질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이클리스는 귀티가 났다.

내 물음에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이네.”

대충 중얼거리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알 바 아니었다. 해 줄 만큼 해 줬으니.

나는 다시 석궁을 들었다. 이번에는 그가 잡아 준 대로 자세를 취했다.

내 멋대로 잡았을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었지만, 여전히 정확한 조준을 하기 쉽지 않았다.

“아.”

잘 쓰지 않는 팔 근육을 사용해서 그런지 금방 다시 팔이 저렸다.

낑낑대는 나를 보고 다시 도와줄 법도 하건만.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노예 상전께서는 멀뚱멀뚱 내 모습을 구경하다 대뜸 물었다.

“……사냥 대회 때문이에요?”

“으으…… 헉.”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다시 석궁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얕게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1등 해서 상금으로 너 호강시켜 줄게.”

물론 진짜 1등 같은 거 할 일 없었다. 이건 온전히 내 목숨을 위한 연습이었으니까.

그런데 ‘푸흐’ 하고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휙 그를 돌아보았다.

이클리스는 여전히 건조한 얼굴이었지만, 내게 향해진 잿빛 눈동자에 희미한 웃음기가 비쳤다.

그가 제대로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그런지 좀 얼떨떨했다.

“비웃는 거니?”

톡 쏘아 묻자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 석궁 잘 쏘기 힘들어요.”

“왜?”

“너무…….”

그가 눈을 내리깔며 조그만 소리로 뭐라 웅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아 “응? 작고, 뭐 하니까?” 하고 되물었지만,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제대로 된 자세를 잡지 않으면 반동을 버티기 힘드실 거예요. 자칫하면 손목에 무리가 가서 뼈에 금이 갈 수도 있어요.”

“그래?”

귀가 좀 솔깃해지는 말이다.

“그랬으면 좀 좋겠네…….”

그러면 망할 사냥 대회 같은 거 참여 안 할 수 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진심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이클리스의 눈동자가 동그래진 것을 보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넌 석궁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야?”

이맘때의 이클리스는 분명 무술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활만은 꽤 능숙하게 다룬다는 게 의아했다.

“델만에서는.”

내 물음에 그가 입을 열어 답하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정정했다.

“……고향에서는 활을 기본 소양으로 익히거든요.”

‘이클리스의 고국 이름이 델만이었구나.’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은 정보라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좀 신기한 건 후에 소드 마스터가 될 그가 검보다 활을 먼저 배웠다는 것이다.

“검이 아니라?”

“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잘됐네. 그럼 내가 1등 할 수 있도록 네가 자세를 잡아 주면 되잖니.”

“…….”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후 조금 탁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전처럼요?”

“응.”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산뜻하게 대꾸하자 그의 머리 위가 깜빡였다. 그리고.

[호감도 49%]

‘그래, 이거지!’

나는 대폭 상승하는 호감도를 보며 샐쭉 웃었다. 역시 연무장에 오기를 백번 천번 잘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게 언제였다는 양 이클리스는 곧바로 내 뒤에 다가와 붙어 섰다.

양옆으로 나를 감싸 안은 팔.

뒤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또 한 번 내 손등 위를 겹쳐 잡고 석궁을 들어 올려 조준할 무렵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불현듯 왼쪽에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순간, 휙- 몸이 거칠게 돌아갔다.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이클리스의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기척을 느낀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불청객을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나를 안은 채로.

순식간에 반전된 시야 속으로 딱딱하게 굳은 흑발의 사내가 보였다.

“……소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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