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6화
나는 잔뜩 당황했다.
‘쟤가 왜 여기 있어?’
레널드와 데릭 조합을 제외하고, 남주 두 명과 동시에 만나는 일은 게임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가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스산한 한기가 뒷목을 타고 엄습했다.
‘이건 매우 좋지 않아.’
뭐가 됐든 빨리 이 상황을 타파해야 했다.
나는 서둘러 이클리스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손등 위로 겹쳐 잡은 뜨거운 손바닥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클리스?”
나는 그를 부르며 다시 한번 손목을 뒤틀었다.
그러나 내가 버둥거릴수록, 되레 옥죄는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았다.
“이클리스, 손 놔. 아프니까.”
나는 결국 고개를 한껏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잿빛 눈동자가 스르륵 내게로 움직였다.
잠시간 나와 눈을 마주하던 그는, 그제야 나를 붙들고 있던 힘을 풀었다.
떨어져 나가는 손길이 아까완 달리 서늘했다.
나는 서둘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데릭에게 묵례했다.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저놈이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
얼마 전 기사들과의 일도 공작과 잘 마무리 지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데릭도 별말 없었고, 그 후 딱히 책잡힐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영 좋지 않은 데릭 놈의 기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분고분 답했다.
“호위와 같이 석궁 연습 중이었어요.”
“가문의 궁수들은 뻔히 놔두고 말이냐.”
싸늘한 시선이 나를 너머 내 뒤쪽에 있는 이클리스에게까지 미쳤다.
“훈련 중인 사병들을 괴롭힐 순 없잖아요.”
나는 데릭으로부터 보호하듯 이클리스의 앞을 슬쩍 막아서며 덧붙였다.
“그리고 제 호위가 석궁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가르침을 받기 충분했어요.”
“가르침?”
무엇에 빈정이 상한 건지 데릭의 눈에 퍼런 스파크가 튀는 게 보였다.
놈의 머리 위가 위태롭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호감도 게이지보다 살벌하게 변해 가는 그의 얼굴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데릭은 나와 이클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경멸 어린 어조로 뇌까렸다.
“제 또래 영애들에게 활을 겨눌 만큼 기본 상식도 없는 네가, 대체 뭘 배울 수 있단 말이지?”
“기본 상식이 없으니까 대회 참석 전에 조금이라도 배워 두려는 거예요, 소공작님.”
내가 한 일은 아니라서 크게 타격감은 없지만, 그래도 날 선 반응에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연무장을 이용하는 것이 불쾌하시다면 다른 곳으로 갈게요.”
“…….”
“가자, 이클리스.”
나는 이클리스를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막 데릭을 지나치려던 찰나였다.
탁-.
“어딜.”
팔을 잡아채는 손아귀에 의해 걸음을 더 옮길 수 없었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니, 놈이 서슬 퍼런 얼굴로 뇌까렸다.
“그렇게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가르쳐 주지.”
“……네?”
“너.”
그는 갑자기 내게서 시선을 돌려 이클리스를 바라보았다.
“추가 훈련이 없다면 그만 네 숙소로 돌아가라.”
오만하게 명령을 내리며 턱짓하는 데릭의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데리고 와 호위로 삼겠다 했지만, 어쨌든 단장인 데릭의 암묵적인 허락 덕분에 이클리스는 훈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어느 군대나 그렇듯, 에카르트 기사단은 상명하복이 무척이나 철저했다.
때문에 나는 그가 순순히 제 숙소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클리스는 떠나는 대신 데릭에게 잡히지 않은 맞은편, 석궁을 들고 있는 내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주인님께선 제게 가르침받기를 원하시는데요.”
그리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얘들이 대체 왜 이래?’
양손을 붙들린 처지가 된 나는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둘의 눈치를 보았다.
반항 어린 이클리스의 모습에 데릭의 표정이 대번 사나워졌다.
“노예 주제에 감히 누가 누굴 가르친단 말이냐.”
“제국군도 리비우스 전투에선 델만의 궁술에 처참하게 패배했지요.”
곧장 맞받아치는 이클리스의 대답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건 분명한 견제였다.
어느 순간부터 피부가 따가울 만큼의 살기가 느껴졌다. 누구에게서 흘러나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좀 놓고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슬쩍 양 손목을 비틀어 보았지만 둘 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델만?”
잠시간 말없이 이클리스를 노려보던 데릭이 문득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조소했다.
“아.”
“…….”
“약탈하던 소국들에게 배신당해서 손 쓸 틈도 없이 지도에서 지워진, 천박한 야만인들의 나라 말인가?”
일순 이클리스가 잡은 손목에 꽉 힘이 들어갔다.
‘망할, 이러다 싸움 나겠어!’
나는 신음도 못 내고 흔들리는 눈으로 두 놈을 정신없이 번갈아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클리스가 이게 그만 입을 다물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어쨌든 제국에서는 데릭과의 신분 차이가 매우 크니 말이다.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이클리스는 데릭을 마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한번 구경해 보시죠.”
“뭐?”
“그 천박한 야만인이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에게 어떻게 활 잡는 법을 가르치는지.”
“이런 건방진…….”
잔뜩 빈정거리는 어조에 데릭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놈들의 머리 위가 위태롭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랐다.
이러다 놈들이 싸우는 게 에피소드 중 하나라면, 틀림없이 휩쓸려서 개 죽음당하는 건 나뿐일 것이다.
괜히 나섰다가 등 터질까 숨죽이고 있었지만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만! 그만!”
있는 힘껏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목을 털어 내며 크게 외쳤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던 놈들이 방심한 덕분에 무사히 내 손목을 회수할 수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다시 잡힐세라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저 그만 갈래요. 갑자기 연습하기 싫어졌어요.”
그리고 데릭 쪽으로 먼저 몸을 돌린 후 허겁지겁 통보했다.
‘당장 여길 떠나야 돼!’
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그대로 과녁 터를 빠져나가려 들었다.
그런 내 행동에 당황했는지 두 놈이 곧바로 나를 붙잡으려 들었다.
“페넬로페.”
“주인님.”
안 그럴 것 같던 이클리스마저 경주라도 하듯 바짝 다가와 붙었다.
나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그런 그를 냉정하게 쳐 냈다.
“따라오지 마. 혼자 내 방으로 돌아갈 거니까.”
이클리스한테 말한 것 같지만, 실은 데릭에게 향한 말이기도 했다.
저는 오라비랍시며 저택 가는 길까지 따라올 수도 있으니까.
‘제발 싸울 거면 나가고 둘이서만 싸워!’
“그럼 이만.”
나는 혹여나 두 사람이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부랴부랴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들이 박히는 게 느껴졌다.
빠른 걸음은 놈들에게서 멀어질수록 점점 뜀박질로 바뀌었다.
“헉, 허억…….”
숲길에 막 들어선 나는 가뿐 호흡을 몰아쉬며 연신 뒤를 흘깃거렸다.
다행히 쫓아오는 놈은 없었다.
그제야 속력을 천천히 줄였다.
“휴…… 괜히 껴 있다가 죽을 뻔했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기 마련이다.
아까 느껴졌던 스산한 한기가 다시금 떠올라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석궁은 꼭 챙겨 들고 온 내 모습이 웃겨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잘 도망 나와서 다행이야…….”
내가 빠지고 둘이서 치고받기 시작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설사 그러더라도 이젠 상관없었다.
둘이 처싸운 건데 엉뚱하게 자리에도 없는 내 호감도가 떨어질 일은 없을 것 아닌가.
‘그냥 공작한테 궁술 선생을 따로 붙여 달라 해서 혼자 뒤뜰에서 연습해야겠어.’
나는 당분간 연무장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여러 번 다짐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