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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57화 (5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7화

망할 사냥 대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꼭두새벽부터 하녀들에게 깨워져 강제로 때 빼고 광내는 중이었다.

황궁 내 사냥터에서 열리는 전야제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타국의 왕족과 귀족들도 대거 참여하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더욱 규모가 클 예정이었다.

두 번째로 향유에 절여진 나는 하녀들의 손길에 젖은 머리를 맡긴 채 졸린 눈으로 불평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데? 어차피 내일 사냥할 땐 머리 틀어 묶고 바지 입을 텐데.”

“그러니 오늘 누구보다 아름답게 꾸미셔서 남성분들한테 사냥감을 가장 많이 받으셔야죠!”

에밀리가 활기차게 대꾸했다. 그러자 아침부터 내 방에 쳐들어온 하녀 들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아가씨!”

“이번에는 아가씨가 사냥제의 퀸이 되실 거예요!”

“맞아요! 작년에 그 사건으로 켈린 영애가 1등을 해서 그쪽 애들이 얼마나 기고만장…….”

마지막으로 조잘대던 하녀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에밀리가 그 하녀를 찌릿하고 째려 보며 눈치를 주는 게 거울에 비쳤다.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모시는 주인의 흑역사를 입 밖에 냈으니, 혹여라도 내게서 역정이 떨어질까 두려운 듯했다.

‘뭐,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나는 하녀의 말실수를 관대하게 넘겼다. 그리고 그들이 고대하는 사냥 대회에 대해 생각했다.

노멀 모드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으나, 이곳의 사냥 대회는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참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사냥감의 최종 개수로 우승자를 선별하는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굳이 본인이 직접 사냥하지 않아도 가지고 있는 개체 수만 많으면 1등을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곰이나 호랑이 같은 잡기 어려운 사냥감은 따로 점수를 매겼다.

때문에 뭇 남성들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우승의 영예를 안겨 주기 위해 열심히 사냥해서 사냥감들을 바치곤 했다.

구애의 일종이었다.

‘어째 사냥 대회도 딱 여성향 게임 같은 설정이네. 사랑의 마니또야 뭐야.’

켈린 백작 영애는 작년 사냥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녀에게 패악을 떤 페넬로페 덕분이었다.

공작가의 미친개, 아니, 침팬지가 쏘는 석궁에 맞을 뻔했다는 동정론이 들끓어 참석한 남성들이 사냥감을 몰아 준 것이다.

‘그걸로 공작가 식솔들을 약 올리고 다녔나 본데…….’

애석하게도 나는 내 목숨 지키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아.”

그때, 한쪽 머리가 잡아 당겨졌다.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헉. 아프세요, 아가씨?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녀 한 명이 다 마른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고정하는 중이었다.

내 짤막한 신음에 그녀는 후다닥 손을 놓고 물러섰다.

“됐어. 계속해.”

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종용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네?”

“기회 되면 꼭 잡을게.”

뜬금없는 말에 하녀들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무엇을요, 아가씨?”

“사냥감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여자 말이야.”

“……?”

“적당히 지켜보다가 마지막 날에 그 여자를 석궁으로 쏴 죽이고 사냥감 다 뺏어 오면…….”

“아, 아가씨!”

분위기 풀려고 한 농담이었는데 하녀들의 얼굴이 단번에 사색이 됐다.

에밀리가 기겁을 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제발 그런 무서운 소리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마시고요! 자! 이제 다 끝나셨어요. 화장만 하시면 돼요.”

“한참 남았단 거잖아.”

나는 불퉁하게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들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눈을 감았다.

어쨌든 예쁜 건 좋은 거니까.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치장은 늦은 오후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나는 하녀들이 골라 준 새하얀 진주 액세서리 세트와 쇄골이 깊이 파인 피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

‘역시 이 얼굴에는 이런 모습이 어울려.’

악한 것은 아름답기 마련이었다.

노멀 모드의 여주와 일부러 상반되는 이미지로 설정했다기엔, 거울 속에 비친 페넬로페의 모습은 위험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고양이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커다란 눈꼬리가 묘하게 색정적이다.

겉보기엔 그 어느 것보다 붉고 탐스럽지만, 사실 독을 잔뜩 품고 있는 사과처럼.

하녀들이 드레스와 걸맞은 새까만 에나멜 구두를 가지고 왔다.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으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비틀거리니, 에밀리가 얼른 잡아 주며 물었다.

“아가씨, 1층까지 부축해 드릴까요?”

“아니, 이클리스를 불러와.”

“네? 그분은 왜…….”

의아하다는 듯 에밀리가 되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호위 기산데 당연히 날 호위해 가야지.”

“그, 그렇죠!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지금 불러올게요.”

에밀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그러는 것도 이해가 됐다. 노예는 황궁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부르는 이유는 사실 호위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간 후 데릭이랑 진짜 싸웠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겸사겸사…….

‘공들여 치장했으니 이제 호감도를 올릴 차례지.’

얼마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아가씨. 호위분을 데리고 왔어요.”

“어서 와.”

에밀리의 뒤를 따라 이클리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

테이블에 턱을 괴고 나른한 자세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잿빛 눈동자가 한차례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껏 치장한 내 모습 때문 임이 확실했다.

[호감도 50%]

이전과 달리, 곧바로 소폭 상승하는 호감도에 나는 짙게 미소 지었다.

“에밀리, 넌 내 석궁 케이스를 가지고 먼저 내려가 있으렴.”

“오늘 가지고 가시게요?”

“미리 카바나에 가져다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그럴게요, 아가씨.”

잠시 후 그녀는 석궁 케이스를 들고 방을 나갔다.

“이리 가까이 오렴, 이클리스.”

나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툭툭 쳤다.

멍한 얼굴로 굳어 있던 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클리스는 테이블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 남겨 둔 채 멈춰 섰다.

“더 가까이.”

다시 한번 고개를 까딱이자, 그는 말없이 거리를 좁혀 내 앞에 바짝 다가섰다.

“무릎 꿇어.”

다소 뜬금없고 강압적인 명령에도 이클리스는 지체 없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며칠 전 데릭과 대립한 날 이후 스치듯 마주친 적도 없었기에 자세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요리조리 살펴도 매끈한 피부에 흠이 난 곳은 없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이리저리 턱을 돌리는 무례한 손길과 달리, 나는 짐짓 상냥하게 물었다.

‘얼굴은 티가 나니, 몸을 후드려 팼을 수도 있으니까.’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이클리스는, 내가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을 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싸우진 않았나 보네.”

“……주인님 가시고 나서 단장님도 그대로 갔어요.”

내가 뭘 궁금해하는 건지 바로 눈치챈 그가 순순히 이후의 일을 고해 바쳤다.

“걱정하셨어요?”

얼마 전과 똑같은 물음이었다. 그때 나는 흔쾌히 그렇노라 답해 주었다.

그게 꽤 마음에 든 건지 잿빛 눈동자가 나를 맹목적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이 꼭, 당장 그렇다고 대답하라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놈이 예상치 못한 적의를 드러낸 바람에 심장이 철렁했던 나는 당근 말고 채찍을 들었다.

“앞으론 함부로 나서지 마.”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를 혼내듯 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아서 할 수 있다며. 여기 머무는 걸 인정받기도 전에 쫓겨나고 싶어?”

“그자가 먼저 주인님의 손목을……”

“그자라니.”

나는 그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거두며 차갑게 경고했다.

“첫째 오라버니가 방자하게 기어오르는 널, 나처럼 관대하게 넘길 사람으로 보이니?”

“…….”

억울하다는 듯 반박하던 이클리스의 눈꼬리가 조금 쳐졌다.

무표정한 건 평소와 같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물론 착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머리 위에 선명히 떠 있는 흰 글씨를 바라보며 힘을 빼고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네가 오래도록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호감도가 다 찰 때까지 이클리스가 공작가에서 쫓겨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탈출할 수 있으니까.

“그러려면 네 개인적인 적개심에서 날 제외해야겠지.”

“…….”

“제국을 향한 네 원한을 내게 분풀이하지 말란 뜻이야.”

내가 불안했던 건 비단 데릭과 이클리스의 기 싸움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 그 천박한 야만인이 제국의 하나 뿐인 공녀에게 어떻게 활 잡는 법을 가르치는지.

이클리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불현듯 비 오는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누구 하나 죽일 듯이 허공에 목검을 휘두르던 그와 내 목 옆에 바짝 들이밀어졌던 그의 검.

이클리스는 저를 데리고 와 돌봐주는 나를 경외하면서도, 한편으론 결국 제국인의 손아귀에 굴려지고 있다는 것을 격렬히 혐오하는 것 같았다.

성공적인 탈출을 위해서, 이클리스가 그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계속 품게 하면 안 된다.

‘내게 온전한 호감만 품게 해야 해.’

하여 나는 그에게 한 번쯤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널 사 온 내가 밉니? 여기서 버티면서 괄시받는 것보다 경매장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아?”

“…….”

“난 내게 쓸모 있는 자가 필요해. 네가 싫은데 내가 강요하는 거라면, 이 루비 반지를 주마. 언제든지 떠나렴.”

난 언제나 내 왼손 검지에 끼여져 있는 루비 반지를 당장이라도 뺄 것처럼 굴었다.

초강수였다. 그가 옳다구나 하고 진짜 간다 그러면 바로 태세를 전환해서 사과해야 한다.

하지만 노멀 모드를 플레이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페넬로페의 온갖 패악과 짜증을 받아 주면서도 끝끝내 공작가에 붙어 있었다.

패전국의 노예에게는 갈 곳도, 공작가에서 주는 만큼의 안온함을 느낄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님.”

기어이 루비 반지를 빼내 건네자 이클리스의 동공이 한차례 흔들렸다.

예상대로 그는 반지를 받지 않았다. 대신,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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