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8화
그는 반지가 올려진 손에 제 얼굴을 마구 비비며 애원했다.
“다시는 건방지게 기어오르지 않을게요, 주인님.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커다랗고 딱딱한 루비가 보드라운 그의 피부에 닿아 덜그럭거렸다.
‘차라리 반지를 받고 그냥 철판 깐 채 뻔뻔히 붙어 있으면 될 텐데.’
그러면 제 목을 언제 조를지 모를 구속구에 대한 불안으로부터는 자유로울 것이 아닌가.
그러나 냉정한 내 얼굴에 이클리스는 그저 하염없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순진한 건지, 교활한 건지…….’
제 목에 스스로 목줄을 채우는 그를 바라보던 나는, 그가 얼굴을 부비고 있는 손을 힘겹게 떼어 낸 후 반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낑낑거리기 전에 텅 빈 양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이클리스.”
무기질적인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나는 고요하게 당부했다.
“내가 검을 준 순간부터 넌 내 기사야. 난 네 하나뿐인 레이디고.”
“…….”
“그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렴.”
놈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러 눈꺼풀을 사르륵 접어 웃었다.
빈말인지 진심인지 알아차릴 수 없도록.
나를 향한 잿빛 눈동자가, 일순 몽롱해졌다.
“……네, 주인님.”
[호감도 54%]
호감도가 반짝 상승했다.
‘드디어.’
드디어 절반을 넘겼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클리스의 양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바로 내렸다.
“좋아. 그럼 이제 기사로서 네 할 일을 해야겠지.”
그리고 테이블 위에 두었던 루비 반지를 다시 검지에 낀 후, 그에게 내밀었다.
“나를 1층까지 에스코트해 주렴.”
이클리스는 언제나 그랬듯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이클리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1층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막 걸어 나오던 성장한 공작과 집사를 마주쳤다.
“아버지.”
현관으로 향하던 그들은 계단을 내려온 나를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좋은 오후예요.”
나는 생긋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공작은 나를 그저 빤히 바라볼 뿐,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
“크흠.”
의아한 얼굴로 공작을 다시 부르자, 그가 그제야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옷차림이 그게 뭐냐.”
“뭐가요?”
인사에 대한 답도 아닌 대뜸 지적부터 하는 태도에 나는 기분이 상했다.
‘내 옷차림이 어디가 어때서?’
내가 빙의하고 난 후 튀지 않으려고 최대한 정숙하게 입어서 그렇지, 이건 원래 페넬로페가 즐겨 입던 스타일이었다.
공작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혀까지 차며 한 소리를 더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귀족 여식이 어찌 그런…….”
“화창한 오후입니다, 아가씨! 오늘 무척이나 아름다우시군요. 특히 입으신 드레스 색이 진주 귀걸이와 참 잘 어울립니다.”
그때, 집사가 불쑥 공작의 말을 끊고 빠르게 읊조렸다. 역시 눈치 하나는 기똥찬 아저씨였다.
“정말? 고심해서 고른 건데 집사가 그렇게 말해 주니 기뻐. 괜찮아 보여?”
나는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웃어 주었다. 집사가 찰떡같이 응수했다.
“물론이죠. 눈이 다 부실 지경입니다.”
“고마워, 집사. 집사 덕분에 기분 좋게 남은 하루를 보낼 수 있겠네.”
“크흐흠!”
단란한 대화에 공작이 불편한 티를 냈다.
‘흥! 이제 다신 먼저 살갑게 인사해 주나 봐라.’
나는 남몰래 공작을 흘겨보며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그런 내 다짐을 알아차린 건지, 공작이 슬쩍 말문을 돌렸다.
“그놈과는 왜 같이 내려오는 게냐.”
이번엔 타박 대상이 바뀌었다. 이클리스를 곁눈질하는 시선이 곱지 못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 호위 기사잖아요. 황궁까지 에스코트 좀 부탁했어요.”
“에스코트는 무슨! 오랜만에 가족끼리 이동할 것이니 그만 물려라. 네 오라비들이 직접 호위하기로 했다.”
“가족…… 끼리요?”
“그래.”
확인 사살을 하는 공작의 대답에 나는 미소 짓던 얼굴 그대로 굳었다.
‘하…… 시작부터 망테크구만…….’
넷이서 한 마차를 타고 황궁까지 이동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턱 막혔다.
“모처럼 잘됐습니다.”
이런 내 심정도 모르고 집사가 손뼉을 치며 덧보탰다.
“그런데 아가씨가 오늘은 높은 굽을 신어 거동이 불편하실 테니, 공작님께서 마차까지 에스코트를 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크흠, 큼. 번거롭게도 하는구나.”
“전 괜찮…….”
나는 적당히 웃는 낯으로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공작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 하느냐, 얼른 잡지 않고. 시간 없다.”
그러더니 1초도 지나지 않아 손을 마구 흔들며 채근하는 게 아닌가.
‘아니, 번거롭다며?’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었지만, 별수 없었다.
“이클리스.”
모처럼 불러들인 게 좀 미안해서 나는 그를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렴.”
“…….”
“말 잘 들으면 내가 상금으로 호강시켜 줄 테니까.”
그는 별다른 대답 없이 애매모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었다.
[호감도 55%]
고작 1% 오른 호감도와 마지막까지 내게 못 박혀 있는 눈빛이 묘했다.
‘어째 좀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공작에게 손을 바통 터치하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아 막 마차 위로 올랐을 때였다.
안에는 이미 남주 놈들이 한 자리씩 차지한 후였다.
‘둘이 붙어 앉지, 왜 저렇게 앉은 거야.’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앉은 그들을 보며 좌절했다.
공작저의 마차는 4명이 모두 타고도 자리가 남을 만큼 널찍했다.
그러나 나는 늦게 나온 죄로 놈들 중 한 명의 옆자리에 필연적으로 착석해야 했다.
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호감도 22%]
[호감도 25%]
의아하게도 얼마 전까지 20%였던 데릭의 호감도가 못 본 새 5% 올라 있었다.
‘그때 석궁 연습하던 날의 여파 때문인가?’
무작정 이클리스 편을 들지 않고 부랴부랴 도망간 게 나름 상승 작용을 했나 보다.
게다가 의외로 레널드가 호감도를 부쩍 따라잡았다. 3%의 차이.
“어서 앉지 않고.”
공작의 재촉에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냉큼 데릭의 옆자리에 앉았다. 레널드에 대한 사감을 떠나, 내겐 호감도 최우선이었다.
두 쌍의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찰나, 둘의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 순간이었다.
‘호감도 -1%’ ‘호감도 +2%’
[호감도 21%] [호감도 27%]
둘의 호감도가 동시에 바뀌었다.
1% 떨어진 쪽은 레널드고, 2% 상승한 쪽이 데릭이었다.
“야, 너 옷이 그게 뭐냐?”
상반되는 그들의 머리 위를 휘둥그레 바라보고 있을 무렵.
아니나 다를까 레널드 놈이 내가 앉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나는 새초롬하게 반문했다.
“왜?”
“왜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아주 그냥 벗고 다니지 그러냐?”
“지난번 연회 땐 사람이 좀 됐나 했더니, 여전하군.”
빈정거리는 레널드에 이어 데릭마저 못마땅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왜 또 별것도 아닌 걸로 시비들이실까.’
나는 그렇게 내 드레스가 심각한 건가 싶어 고개를 내려 점검했다.
그러나 브이넥으로 인해 쇄골만 좀 드러나 있을 뿐 괜찮았다. 딱히 야하지도 않았다.
“그만들 해라.”
억울함에 뭐라 반박하려고 입을 열던 찰나, 공작이 마차 위로 올라탔다.
“잘 어울리기만 한데, 왜 이렇게 타박들이야.”
“하. 진심이에요, 아버지?”
뜬금없이 내 역성을 드는 그의 모습에 레널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물론 조금 전 공작에게서 제일 먼저 타박을 들었던 나 또한 그랬다.
‘저. 기. 요.’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팩 돌렸다.
“출발하지.”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차 벽을 두어 번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이 걸린 마차가 소리 없이 출발했다.
내 예상대로 숨 막히는 정적이 마차 안을 점령했다.
‘그러니까 각자 타고 가지. 왜…….’
나는 데릭 놈과 닿지 않게 창문 쪽으로 바짝 몸을 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창문만 바라봐야 했던 지난날의 악몽이 되새겨지는 것 같았다.
한동안 지속되던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의외로 공작이었다.
“크흠. 네놈들은 사냥 대회 나가면서 정표 하나도 못 받았느냐?”
느닷없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레널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정표요?”
“거, 안전을 기원하면서 주는 것들 있지 않느냐! ……이런 것처럼 말이다.”
공작이 보란 듯이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아들놈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꽂혔다.
나 또한 별생각 없이 그것을 바라보다 눈을 부릅떴다.
‘저건……!’
“……웬 애뮬릿입니까?”
여태껏 한마디도 않고 있던 데릭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공작의 가슴팍에는 며칠 전 내가 선물로 주었던 은색의 애뮬릿이 훈장처럼 당당하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걸 왜……!’
아무리 탈부착이 쉽다지만, 누가 부적을 저렇게 대놓고 옷 위에 붙인단 말인가.
무기상이 말했었다. 몸에 은밀하게 부착할 수 있는 정표기에 더욱 인기가 많은 것이라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은 공작의의 모습이 황당해서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게다가 저건 목적이 있어서 공작한테만 몰래 준 것이었다. 당연히 레널드와 데릭 것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나만 못 받으면 당연히 짜증 나고 서럽기 마련인데…….
‘하물며 저 지랄 맞은 놈들한테 자랑이라도 한다면…….’
내 속 타는 심정을 알 리 없는 공작이 왠지 모르게 신이 난 얼굴로 설명하려 들었다.
“그게 말이다. 며칠 전 페넬…….”
“아, 아버지!”
나는 다급히 그를 막아섰다. 공작에게 향했던 시선들이 휙 내 쪽으로 쏠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부른 이유를 쥐어짰다.
“누가 줬는지 아버지랑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그러냐? 흠흠.”
공작은 내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에둘러서 권유했다.
“그래도 안전을 위해 옷 안쪽에 부착하지 그러셨어요. 괜히 누가 보고 불손한 말이라도 입에 담으면 어떡해요.”
가령, 에카르트의 수장은 사냥 대회에서 누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마법 부적을 부착하는 겁쟁이라든지 말이다.
그런 내 말을 곡해해서 알아들은 듯 레널드가 얄밉게 지껄였다.
“그러게. 다 늙어서 정부를 들였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참으로 명예로 우시겠네요.”
“내려면 내라지!”
그 순간 공작이 버럭 소리쳤다.
“어떤 음흉한 인간이 하나뿐인 딸 자식한테 받은 선물을 가지고 정부가 줬느니 마느니 지껄이는지, 내 그 낯짝 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