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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59화 (5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9화

누가 마차 안에 찬물이라도 부은 것처럼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하. 망했구나, 망했어.’

나는 그냥 해탈한 채 웃었다.

“……페넬로페가 주었습니까?”

데릭이 한층 더 낮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왜인지 분노가 서린 듯해서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눈치도 없는지 공작은 실실 웃으며 놈들의 약을 박박 올렸다.

“큼큼. 네놈들도 말이야.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라고. 성격들이 그 모양이니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지, 쯧쯧.”

“……하?”

레널드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때였다. 묵묵히 공작을 바라보던 데릭이 문득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파란 동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울렁거렸다.

“너는, 내게…….”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호감도 -1%’

[호감도 25%]

‘아, 왜! 그깟 부적 좀 준 게 뭐라고!’

나는 터무니없이 쉽게 떨어지는 하드 모드의 호감도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 * *

황궁 근처에 다다르자 마차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졌다.

창문 밖으로 슬쩍 보니, 입구서부터 마차가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지난 연회 때는 줄 같은 것 없이 금방금방 통과되었기에 의아해졌다.

내 혼잣말에 답을 준 것은 공작이었다.

“살상용 마법 무기나 마물, 마법사들이 있는지 검문하는 게다.”

“검문요?”

“그래. 황태자가 직접 주최하는 사냥 대회니 목숨 귀한 줄 알면 철저히 수색하겠지.”

의아했던 나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전쟁 영웅인 황태자는 제국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적이 많았다.

왕좌에 오르기 전까지 아마 끊임없는 견제와 목숨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인성이 파탄 날 만도 해.’

나는 놈의 미친 성격을 납득했다.

그렇다고 동정심이 이는 건 절대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제일 불쌍했다.

‘그런데 마법사인지도 검문하는 거면…… 뷘터도 참여 못 하는 건가?’

얼마 후 공작가의 마차가 검문소에 이르렀기에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당연히 쉽게 통과했다.

내 석궁의 구슬들이 마력을 읽는 수정구에 걸리긴 했지만, 명백한 사냥용이었기에 문제없었다.

황궁 마법사가 검문을 마치고 내 석궁 케이스를 다른 마차에 타고 있는 에밀리에게 돌려주었다.

“이번엔 또 어떤 짓을 벌이려고. 아주 단단히도 준비해 왔네.”

창문 너머로 그것을 바라보며 레널드가 빈정거렸다.

데릭도 동감하는 건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흘기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흠!”

손수 단단히 준비해 준 공작은 불편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고 나는 또다시 억울해졌다.

전야제가 이뤄지는 장소는 사냥터인 숲에서 조금 떨어진, 널따란 정원이었다.

과연 황궁은 황궁인지 야외임에도 연회장은 훌륭하게 꾸며져 있었다.

색색의 꽃들과 화원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일 수 있게 장식된 고운 천과 리본들.

바깥에서 안을 훔쳐볼 수 없도록, 연회장 주위를 은밀하게 감싼 높다란 덤불 벽의 군데군데 달린 화려한 조명들이 꽤 멋있었다.

이미 도착한 이들이 많은지 각 가문별로 마련된 동그란 테이블 사이를 시종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공작과 두 오라비는 도착하자마자 사냥 대회 동안 쓸 카바나와 말들부터 점검하러 가 버렸다.

때문에 나는 에밀리만 뒤에 달고 홀로 정원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어딨지? 아직 안 왔나?’

나는 수많은 귀족 사이를 누비며 정신없이 주변을 살폈다.

황태자 놈의 위치 파악부터 해 두기 위해서였다.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몰라 괜히 가슴이 수런거렸다.

‘그냥 다른 식구들 따라갔다가 같이 올 걸 그랬나…….’

제아무리 안하무인인 미친놈이라지만, 공작가의 일원들이 다 있는 곳에서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을 거 아닌가.

뒤늦은 후회로 낙심하는 중이었다.

불쑥 귀에 거슬리는 쑥덕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아무리 참여 금지령이 풀렸다지만 여기가 어디라고 낯짝을 들이미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에카르트 공은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지…….”

“어머, 부인! 그런 소리 말아요. 교육을 받는다고 천출이 어디 가나요?”

누가 봐도 나를 욕하는 소리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정원에 있는 모두가 나를 보며 쑥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작년의 슈퍼스타가 등장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욕먹는 게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까 전 태평하게 황태자의 인성이 파탄 나게 된 경위나 납득할 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내부와 외부 모두에 적이 있는 것은 페넬로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고로 그녀가 패도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휴! 저 천박한 옷 좀 봐요.”

“성인식도 안 치른 영애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녀들과 합심하여 내 미모를 돋보여 줄 드레스를 정해 주었던 에밀리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오늘만 옷 가지고 벌써 네 번째 면박을 받는 중이었다.

‘세 번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던데.’

그 세 번이 넘어갔으니 이제 난동을 부려도 되는 걸까?

“에밀리.”

나는 모두에게 들릴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녀를 불렀다.

“가서 내 석궁 꺼내 와.”

에밀리의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네, 아가씨! 금방 가져올게요!”

그러나 이내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우렁차게 대답한 후 뒤돌았다.

제발 그런 무서운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며 몸서리를 칠 때는 언제고.

헐레벌떡 카바나가 쳐 있는 쪽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군거림이 만연했던 조금 전과 달리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디 한마디만 더 해 봐.’

나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주변을 쭈욱 훑었다.

마주치는 동공마다 눈에 띄게 흠칫거리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꼴이 우스웠다.

하나뿐인 하녀조차 사라지고 외따로이 남은 상황이었지만, 누구도 섣불리 입을 놀리려 들지 않았다.

‘과연 미친 침팬지가 쏘는 석궁에 맞고 싶진 않다는 건가.’

황태자의 위치 파악을 해 두겠다는 생각은 우선 집어넣었다.

천만 다행히도 놈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여기 있다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가만있을 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안심하고 앞쪽에 있는 에카르트 가문의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며 지나가는 시종을 불렀다.

“이봐.”

“예, 예!”

“술 가져와. 잔 말고 병째로.”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선입견 속 망나니의 표본에 정점을 찍자 사방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가씨!”

얼마 후 에밀리가 석궁 케이스를 들고 왔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갔다 온 건지 그녀는 내게 석궁을 전달하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고했어, 에밀리.”

내 치하에 에밀리가 우쭐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예전에 날 바늘로 깨웠을 때 본 비열한 미소였다.

타앙!

나는 테이블 위에 케이스를 세게 올려놓고 석궁을 꺼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구슬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또르륵, 달칵. 또르륵 달칵…….

고요해진 연회장은 쇠 구슬이 석궁에 장착되는 소리만이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세상에! 누, 누가 좀 말려 봐요…….”

“근위병들을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디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지 않고 크랭크마저 돌리고 있을 때였다.

“하. 너 지금 뭐 하냐?”

문득 머리 위에서 헛바람이 터졌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공작과 아들놈들이 당도해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주변에서 눈에 띄게 안도하는 한숨들이 새어 나왔다.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구네. 이왕 침팬지 소리 듣는 거, 아예 대놓고 쏠 준비하는 거냐?”

레널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철컥. 마침내 장전을 마친 나는 석궁을 등 뒤로 둘러메며, 그를 돌아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상관 마.”

“지금 다 너만 쳐다보고 있는 거 안 보여? 너 때문에 또 어떤 수치를 당할지 알고…….”

“레널드.”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놈에게 공작이 주의를 줬다.

레널드는 잠시 주변을 훑어본 후 내게 바싹 수그려 뇌까렸다.

“……그딴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앉아 있겠다는 거냐, 이 미친 계집애야.”

이를 악물고 욕설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섬뜩했다.

내가 생각해도 화려한 드레스 위에 웅장한 석궁을 둘러메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말해 봤자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런 나를 미친년 보듯 바라보는 인간이 한 명 더 있었다.

“1년 만에 풀린 금제다. 경솔하게 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예요.”

나는 별수 없이 가장 잘 먹힐 핑계를 댔다. 레널드가 눈을 번뜩이며 득달같이 물었다.

“정말입니까, 아버지?”

“크흠! 흠!”

눈을 부라리는 공작의 모습에 나는 조금 찔끔했다.

다행히도 그는 못마땅하게 혀를 찰지언정, 아니란 말은 하지 않았다.

“……연회장에서 사냥 무기를 소지하지 말란 소린 없었지 않느냐. 시끄럽게들 굴지 말고 앉아.”

“하지만 아버지! 쟤는 이미 전과가 뚜렷……!”

“어허! 네 동생을 그렇게 못 믿는 게야. 크게 반성했다고 하니 지켜보거라.”

“…….”

“그리고 페넬로페, 너 또한.”

공작이 나를 돌아보며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이번에도 소란을 피우면 황궁 감옥에 갇히든 말든 내버려 둘 테니 그런 줄 알아.”

“그럼요! 믿어 주세요, 아버지.”

나는 샐쭉 웃었다.

레널드는 할 말이 엄청나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결국 입을 다물고 거칠게 내 왼쪽에 착석했다.

얄밉게 웃고 있는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살벌했다.

‘에베베. 억울하면 너도 애뮬릿 사다 주든가.’

속으로 놈을 잔뜩 골려 주며, 나는 애뮬릿의 위력에 무척 만족했다. 역시 공작에게 주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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