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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60화 (6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0화

그렇게 피식거리고 있을 때쯤 비어 있던 오른쪽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처신 잘해라.”

서늘한 음성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내 옆을 차지한 데릭이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읊조렸다.

“또 가문에 먹칠을 한다면, 감옥에 구금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맞은편에 공작이 앉으면서 에카르트 가문은 전원 착석 완료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나를 혐오하는 두 남주들 사이에 끼게 됐다.

‘왜지……?’

나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옆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째서 좌 엑스 우 에스가 되는 거지?’

놈들이 양옆에 있기에 황태자가 함부로 나를 죽이려 들지는 못하겠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석궁뿐만 아니라 포크, 나이프, 남자들이 차고 있는 사냥용 라피에르까지.

이렇게 나를 죽음에 처하게 만들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물건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데.

하필이면 양옆마저 망할 놈들이 점령하고 있다니!

‘좋지 않아.’

시작부터 썩 좋지 않은 예감이 발목을 타고 오를 때였다.

“황태자님 드십니다!”

좋지 않은 예감이 현실로 다가왔다.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놀라 휙 시선을 돌리자, 정 가운데 깔린 레드 카펫을 밟고 빠르게 걸어 들어오는 커다란 신형이 보였다.

[호감도 2%]

황금색 머리칼이 어두컴컴한 밤하늘 아래 찬란하게 휘날렸다.

언제나 내 눈엔 그 무엇보다 흰 글씨가 가장 먼저 들어오곤 했는데, 유독 저놈만은 반짝이는 머리칼이 먼저 보였다.

멍하니 반짝이는 금발을 바라보고 있을 적이었다.

시선을 느낀 건지 불현듯 놈이 이쪽으로 스윽, 고개를 돌렸다.

‘헉!’

시뻘건 눈과 마주치려던 찰나.

나는 테이블에 엎드리다시피 상체를 확 숙였다.

내 이런 기행에 ‘좌 엑스 우 엑스’들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게임님! 제발 여기서 눈 안 마주쳤다고 해 주세요! 제발!’

매일 같이 욕하던 게임에게까지 싹싹 빌고 있을 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남쪽으로 정양을 하러 가신 터라.”

멀리서 황태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이번 사냥 대회는 내가 주최하게 됐소.”

개회사가 시작됐다. 의외로 놈은 멀쩡한 사람 말을 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켰다.

단상 위 황금 의자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랫단에는 낯선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타국에서 왔다는 왕족들인 것 같았다.

황태자의 시선은 다행히도 내게 닿아 있지 않았다. 나는 안도했다.

“이번 사냥에는 친선 국가에서 온 귀빈들도 참석했으니, 더 치열한 경쟁이 되겠지. 타국에서 가지고 온 특이한 동물들도 많다 하니 모쪼록 재밌게들 즐기다 가시오.”

황태자는 성격답게 개회사도 짤막하게 대충 읊은 후 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한쪽 테이블에서 그런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전하! 황공하지만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망할 놈들이 감히 황태자마마 가시는 길을 붙잡나 싶어 그쪽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 엘렌 후작이군. 오랜만일세.”

엘렌 후작가는 황비의 외가였다.

그래도 외할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예우란 게 있을 만도 한데, 황태자는 대놓고 하대를 했다.

“물어볼 게 무엇이지?”

“화, 황비마마와 2황자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번 사냥 대회에 참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단상의 가장 상단에는 황족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앉아 있는 것은 황태자뿐이었다.

엘렌 후작의 적의 어린 물음에 황태자의 입에 위험한 미소가 걸쳐졌다.

“황비마마 또한 폐하처럼 몸이 영 편찮으신가 보더군. 초대장에도 응답이 없는 걸 보니.”

“어, 얼마 전 뵈었을 때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갑자기 몸이 편찮으시단 말입니까?”

“나도 모른다. 내가 사냥 대회를 주최하는 꼴이 보기 싫어 화병이라도 났나 보지.”

칼리스토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뇌까렸다. 엘렌 후작의 낯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 그럼 2황자께서는 어디에…….”

“내 하나뿐인 아우는 사냥 대회 동안 정양 가신 폐하가 보고 싶을 것 같다며 울기에 행차에 따라 보냈다.”

“…….”

“떨어지기 싫다며 떼를 쓰는 어린아이는 마땅히 부모 곁에 있어야지. 안 그런가?”

2황자는 빈말이라도 어린아이라고 할 수 없는 나이였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황태자가 지난번 2황자의 탄신 연회의 치욕을 갚아 줬다는 걸.

“하하하! 옳소이다!”

그때, 한편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태자를 지지해 전쟁에 참석한 가문들이었다.

타국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정적을 깔아뭉개는 황태자는 그 누가 봐도 완전한 포식자였다.

원래 황위 싸움이란 게 개싸움만큼 치열한 거겠지만, 이건 연애 시뮬레 이션 게임이다.

게다가 원래 이런 장면들은 잘 나오지도 않았는데…….

막상 게임 속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어 직접 겪게 되자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그가 문득 시뻘건 눈동자를 휙 움직였다. 그리고.

‘헉.’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눈을 내리려 했지만 늦었다. 나를 발견한 놈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호감도 3%]

황태자의 머리 위가 반짝였다.

‘X 됐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불안감이 온몸을 내리 덮쳤다.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던 황태자가 이내 고개를 돌려 엘렌 후작을 바라보았다.

“충분한 답변을 한 것 같은데, 후작.”

더 나대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예, 예…… 가, 감사합니다, 전하.”

엘렌 후작은 별수 없이 치욕이 서린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이제 황태자의 발목을 붙드는 모든 것이 사라졌기에 놈이 자리를 뜰 줄 알았다.

아니, 간절히 뜨기를 바랐다.

그러나.

“본래는 개회사만 마치고 갈 예정이었다만.”

“…….”

“생각이 바뀌었다.”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찾은 듯 내게 못 박힌 새빨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끝까지 전야제의 자리를 지키도록 하지.”

좌 엑스, 우 엑스, 앞 태자.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개회사를 마친 황태자는 단상 위에서 내려왔다.

본인을 지지하는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놈이 착실하게 내가 있는 쪽과 점점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때마침 공작도 다른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떴다.

“……아가씨. 어디 편찮으세요?”

너무 좌불안석인 티를 냈을까. 에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다 곧바로 말을 바꿨다.

“아니, 에밀리. 나 물 좀 갖다 줄래?”

속이 타서 연신 물을 들이켠 탓에, 물컵이 텅 비어 있었다.

지나다니는 시종을 불러도 됐지만, 그 행동마저 황태자 놈의 눈길을 끌까 겁났다.

“캐모마일 차도 있는지 물어보고 올게요.”

에밀리가 작게 속삭였다. 캐모마일은 진정 효과가 있는 차였다.

내 수족이 된다고 하더니, 정말로 내 안색을 주의 깊게 살핀 것 같았다.

“그래 주면 고맙겠구나.”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에밀리가 연회장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레널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어, 어디 가게?”

나도 모르게 불쑥 그의 소매를 잡아 버렸다.

놈이 내 손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친구들이랑 인사하고 오게.”

“꼭 가야 해? 그냥 나랑 같이 있으면…….”

“미, 미쳤냐?!”

놈이 기겁하며 내가 잡고 있는 소매를 홱 잡아당겼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테이블에서 떠나갔다.

[호감도 22%]

멀어지는 그의 머리 위가 반짝였다.

아까 소폭 하락했던 호감도가 다시 올랐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이로써 방패가 둘이나 사라졌다. 내 불안감은 더 고조됐다.

‘이제 너밖에 없다.’

나는 간절한 얼굴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테이블에 남은 것은 데릭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레널드를 붙잡는 사이, 그는 이미 누군가와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하여 일전에 나눴던 사업에 관해 마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그때 모였던 멤버들도 모두 참석한 상태입니다.”

“그러지.”

데릭은 인사를 나누던 남자를 따라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안 돼!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레널드와 달리 잡을 틈도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테이블에 혼자 남겨졌다.

그나마 쓸모가 있던 방패막들이 모두 사라지고, 죽음의 위기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삼삼오오 모여서 친목을 다지는 중이었다.

내게 다가오는 이는 황태자 말고 아무도 없었다.

‘어떡하냐…….’

막연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눈길을 확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귀족 영애들이 으레 입는 드레스 형식이 아닌, 독특한 형식의 옷을 입은 여자들이 모여 있는 무리였다.

속이 비칠 듯 말 듯 요염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천으로 감싼 채 눈만 쏙 드러낸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쪽에는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의상을 입은 여자들도 있었다.

타국, 정확히는 전쟁에서 패해 속국이 된 나라에서 온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그때,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들 중 한 명이 작은 우리에서 축구공만 한 하얀 뭉치를 꺼냈다.

‘저게 뭐지?’

그것은 꼭 부푼 풍선껌처럼 표면이 불투명하고 매끄러웠는데, 커다란 눈동자가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손이 없고 닭의 것처럼 가느다란 두 다리가 달린 희한한 모양새였다.

‘타국에서 가져온 동물을 사냥감으로 풀어 둔다더니, 그중 하나인 건가?’

처음 보는 낯선 생명체였으나 뒤뚱 뒤뚱 걸어 다니는 모양새가 퍽 귀여웠다.

입 밖으로 삐죽 돌출된 앙증맞은 양 송곳니 사이로 그 낯선 생명체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큐웅, 큐우!”

“어머나, 귀여워라…….”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영애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흘끔흘끔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냥제의 퀸이 되어 보자!~

[첫 번째. 위험으로부터 주변인들 구하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모든 남자 주인공들의 호감도 +5%, 명성 +50)

[수락 /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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