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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61화 (6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1화

‘이게 뭐야?’

난데없이 나타난 하얀 네모 창에 나는 당황했다.

노멀 모드에서도 사냥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음으로 이딴 퀘스트가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하얀 네모 창에 새로운 글씨들이 추가됐다.

〈SYSTEM〉 메인 퀘스트이므로 5초 후 자동 수락됩니다.

〈SYSTEM〉 5

〈SYSTEM〉 4

〈SYSTEM〉 3

빠르게 줄어드는 카운트다운에 나는 더 생각할 새 없이 허겁지겁 [거절]을 눌렀다.

흰 네모 창은 바로 사라졌다. 그러나 대신 그 자리에는…….

“오랜만이야, 공녀.”

시뻘건 눈알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친.’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삼켰다. 눈동자가 지진 나듯 마구 흔들렸다.

‘대체 어느 틈에……!’

황태자에게서 눈을 뗀 건 시스템 창을 확인하던 그 잠깐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기척 하나 없이 다가온 것이다.

테이블 맞은편에 두 팔로 몸을 지지한 채 상체를 숙인 황태자는, 꼭 먹잇감을 바라보는 짐승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났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장면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제……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힘겹게 쥐어짰다.

“얼굴 구경하기 참 힘들군.”

“…….”

“그간 쇳독으로 열이 펄펄 끓었다던데, 이제 몸은 좀 괜찮나?”

놈은 내 인사를 받는 대신 딴소리를 했다. 조롱에 가까운 어투였다.

놈에게 목이 베인 이후 며칠간 끙끙 앓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안 괜찮다고 쏴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목숨 귀한 줄 아는 빙의자였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쾌차했습니다.”

필사적으로 입꼬리를 당기며 답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대경실색할 소리를 늘어놓았다.

“병문안이라도 오라 했으면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갔을 텐데 말이야.”

“…….”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통 연락이 없더군.”

“네? 무, 무슨……!”

어찌 그리 끔찍한 개소리를 신박하게도 지껄이는 거니?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뒤흔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간절하게 외쳤다.

“제, 제가 감히 어떻게 공사다망하신 황태자님을 오라 마라 하겠습니까? 전 정말 괜찮아요, 전하. 정말로요.”

“이거 서운한걸. 장차 연인으로 발전할지 모르는 사이에,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네?!”

나는 이번에야말로 기절하는 심정이 무엇인지를 절감했다.

‘이 새끼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웃는 얼굴 따윈 집어치우고,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벌려 물었다.

“누가…… 누구랑요?”

“그야 당연히, 나와 공녀지.”

쿠궁. 귓가에서 천둥이 내리치는 환청이 들렸다.

쐐기를 박은 황태자 놈이 상체를 일으킨 후 테이블을 빙 돌아 걸어왔다.

그리고 막을 새도 없이 데릭이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놈이 나른하게 턱을 괸 채 새빨간 눈으로 그런 나를 응시했다.

“나와의 약속을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공녀?”

“무슨…….”

“다음에 만날 땐 분명 왜, 어떻게, 무슨 연유로 날 좋아하게 됐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을 텐데.”

놈은 마지막에 날 풀어 주면서 했던 대사를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고스란히 읊었다.

“물론 답변은 준비해 왔겠지?”

“…….”

“자. 어디 한번 말해 봐.”

황태자가 고개를 까딱이며 설명을 종용했다. 그와 동시에 찬란한 금발 위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호감도 3%]

고작 3%였다.

잘못 벙긋했다간 놈이 휘두른 칼에 목이 베이기도 전에 하락해서 게임 오버당할 만한 수치.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 그게…….”

“부끄러워할 것 없으니 편히 얘기해. 어차피 주변에 듣는 쥐새끼도 없으니까.”

놈의 말처럼 어느새 테이블 반경 1m 내로 아무도 없었다.

모두 멀찍이 떨어진 채 황가의 망 나니와 공작가의 미친개의 만남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서 얘기하래도.”

황태자가 다시 한번 나를 재촉했다.

“그게…… 그러니까…….”

할 말을 필사적으로 쥐어짜며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죽을까 봐 무서웠어도 그렇지, 왜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놈과는 이제 겨우 2번 마주친 상태였다.

게다가 장점이라곤 머리 색이 눈에 띈다는 것 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놈인데, 연유는 무슨 연유.

“……공녀.”

황태자가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너무 지체됐는지 놈의 음성이 스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죄, 죄송한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젠 모르겠다.

“저 이제 화, 황태자님 안 좋아해요.”

“……뭐?”

황태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불쑥 치켜 올라갔다.

놈이 언제 칼을 빼 들지 무서웠다. 나는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뇌까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외사랑은 일찍이 접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란 것을 깨달았어요.”

“…….”

“제 일방적인 감정으로 곤란하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앞으로 제 처지에 걸맞은, 좀 더 현실적인 사람을 찾아볼 예정입니다.”

머릿속을 엄습한 공포로 인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땐 죄송했습니다. 죄송했어요…….”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더듬거림 없이 꽤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쳤다.

‘이 정도면 다들 들었겠지.’

말하는 동안 부러 크게 소리쳤다.

원래 사랑은 변하는 법이다.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황태자라지만, 설마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과하는 공녀를 쳐 죽이겠는가.

이 게임이 아무리 근본 없는 스토리라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미친놈으로 설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하!”

한참 동안 말없이 내 말을 되새기는 듯하던 황태자가 불현듯 커다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새 다른 놈이 생기셨다?”

“……예?”

“어떤 새끼지?”

스르릉-.

갑자기 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었다.

과연, 사냥 대회에도 전투용 장검을 차고 오는 상 미친놈이었다.

“이번엔 또 어떤 새끼한테 그 요망한 입으로 연모를 속삭였는지 말해.”

나를 노려보는 시뻘건 눈이 부리부리했다.

당장이라도 내게 겨눌 것처럼 든 칼끝에서 섬뜩한 예기가 흘렀다.

‘시발, 이 게임 대체 왜 이래!’

나는 절규했다.

“난 인내심이 매우 좋지 않아, 공녀.”

“…….”

“그러니 대답을 빨리하는 편이 좋을 거야.”

“아, 아직 누구를 연모할지 정하지는 않았는데요…….”

난 진땀을 뻘뻘 흘리며 마지못해 대꾸했다.

[호감도 4%]

썩 괜찮은 답변이었는지 호감도가 1% 상승했다. 하지만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머리 위와는 달리, 황태자가 눈썹을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공녀가 말하는 사랑은, 원래 그렇게 쉽고 가벼운가?”

“네.”

또 꼬투리 잡힐까 두려워, 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저는 원래 금방 사랑에 빠지는 편으로…….”

“그 말은, 제국에 나보다 괜찮은 사내가 존재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어…….”

사실이었다. 너 빼고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왠지 그렇다고 답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다.

놈의 머리 위를 흘끔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황태자가 과장되게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것도 검을 들고 있는 손으로.

“정말 너무하는군, 공녀. 나는 밤잠까지 설쳐 가며 이날만을 학수고대했는데 말이야.”

장검이 그의 얼굴에 베일 듯 말 듯 위태롭게 스쳤다.

미친놈 바라보듯 그를 생경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마치 구원자처럼 누군가 등장했다.

“오, 오라버니!”

매정하게 떠났던 방패막 하나가 도착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데릭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왜 이제 온 거야!’

나는 속으로 우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허겁지겁 그의 뒤에 숨었다.

“아, 소공작 아니신가.”

시뻘건 적안이 그런 내 모습을 묘하게 응시하다가, 뒤늦게 아는 체를 했다.

데릭은 의외로 황태자에게 적대적이었다.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건지 물었습니다, 전하.”

“자네 누이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검을 빼 들고 말입니까?”

“아, 이거?”

황태자 놈은 제가 빼든 칼을 곁눈질하며 히죽 웃었다.

“별거 아니야. 숲 근처라 그런지 어디서 자꾸 날파리 새끼들이 윙윙거려서 말이지.”

그러며 정말로 날파리라도 잡듯 허공에 ‘휙휙’ 두어 번 검을 휘돌린 후 이내 검집에 척 집어넣었다.

멀찍이서 봤다면 꽤 멋진 묘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냥 광인 같았다.

“……페넬로페가 전하께 어떤 결례라도 저질렀습니까?”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데릭이 서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결례라…….”

황태자 놈은 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손뼉을 치며 지껄였다.

“맞아. 아주 큰 결례를 저질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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