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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62화 (6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2화

“무, 무슨……!”

나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버럭 외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가마니처럼 있던 사람한테 굳이 와서 건든 게 누군데!’

황태자의 답을 들은 데릭이 즉각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싸늘하게 식은 푸른 눈이 이번에는 내게 못 박혔다.

불현듯 그의 머리 위가 반짝거리더니.

‘호감도 -1%’

[호감도 25%]

나는 떨어지는 호감도가 억울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강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 아니야! 나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감옥에 구금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놈이 경고가 귓가에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 같았다.

데릭은 고개를 젓는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이내, 나만 들릴 만큼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제 누이가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입니다, 전하.”

“…….”

“어떤 결례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

“공녀가 나를 기만했다.”

“기만……?”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나만 모르는 나에 관한 이야기들이 놈들의 주둥이에서 속출되고 있었다.

“둘만의 내밀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으며, 내 마음을 서슴없이 짓밟고 농락했지.”

나는 황급히 놈의 근거 없는 개소리를 정정하려 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나 데릭이 한발 앞섰다. 그의 눈살이 어느덧 불쾌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황태자가 그 꼴을 보고 어깨를 으 쓱였다.

“기억 안 나나? 나는 아직도 미로 정원에서 공녀가 내게 속삭였던 말들을 똑똑히…….”

“저, 전하!”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며 놈의 말을 가로막았다.

공작과 두 오라비들은 내가 미친 황태자한테 이유 없이 목이 베인 줄만 알고 있지, 저런 헛소리를 한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이 새끼, 빨리 사람 없는 곳으로 끌고 가서 석궁으로 기절시켜야겠어!’

나는 그렇게 마음먹고 허겁지겁 내뱉었다.

“조금 전에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단둘이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저와 이동을…….”

쏟아지는 망언들을 더는 참지 못하고 놈을 끌고 데릭의 앞에서 사라지려던 찰나였다.

쿠우우우웅-!

“꺄아아악-!”

불현듯 커다란 굉음과 함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휙 돌아갔다.

“저, 저게 뭐…….”

연회 한구석에 거대한 풍선이 두둥실 솟아 있었다. 족히 2층 건물을 웃돌 만한 크기.

현생에서 호숫가 근처를 지나치다 본 거대한 고무 오리가 떠올랐다.

“큐우우, 큐우-!”

그 순간, 풍선이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헐.’

아까 전 타국에서 온 여자들 무리 중 누군가 꺼냈던 희귀 동물이 저렇게 거대해졌다는 걸.

그 순간, 풍선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뒤뚱뒤뚱 몸을 움직였다.

“큐우우, 큐우우-!”

“아아악, 마물이다! 피해-!”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커다란 닭발과도 같은 괴물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귀엽다고 생각했던 외양과 울음소리가 이제는 섬뜩하게 느껴졌다.

“꺄아악! 살려 줘요!”

그때, 난데없이 나타난 마물을 피해 도망가던 영애 중 한 명이 풀썩 넘어졌다.

“큐우우-!”

“꺄아아아악!”

닭발을 닮은 풍선 괴물의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찬찬히 내려앉을 무렵.

“제기랄.”

내 옆에 있던 데릭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튕기듯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달리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든 그는, 마물이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그리고 여자를 짓밟으려던 거대한 닭발의 바닥에 칼을 박아 넣었다.

“큐우우우-.”

마물의 발이 땅을 짓밟기 전,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피이잉- 칼이 곧 부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휘었다.

그러나 데릭이 엎어져 있는 여자의 팔을 붙잡고 끌고 나오기엔 충분했다.

어느새 혼절한 건지 그의 품에 안긴 영애는 추욱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빠져나오고 얼마 안 가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데릭의 칼이 마물의 발바닥에 완전히 짓뭉개졌다.

“근위병을! 근위병을 부르게!”

“큐우, 큐우!”

마물이 전보다 광포하게 날뛰었다. 조금 전까지 잔잔했던 야외 무도회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황태자는 저기 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누군가 거세게 외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죽여라!”

아까 전 마물을 처음 꺼냈던 검은 옷을 입은 여자 무리가 황태자를 가리키며 무어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러자 날뛰던 마물이 거짓말처럼 방향을 틀었다.

‘미친.’

나와 황태자가 나란히 서 있는 쪽으로.

‘이런 게임 아니었잖아! 왜 연애 시뮬레이션에 갑자기 괴물이 등장하는 건데!’

나는 이 황당한 전개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경악에 가득 찬 채 굳어 버렸다.

“큐우, 큐우우우-!”

그사이 새로운 지령을 받은 마물이 땅에 발을 굴렀다.

꼭, 금방이라도 달려들 투우 같은 몸짓이었다.

“네 오라비는 하나뿐인 누이보다 생판 모르는 여자의 안위가 더 소중한 모양이로군.”

그때였다.

저 때문에 마물이 날뛰는데도 태연자약하게 서 있기만 하던 황태자가, 불쑥 앞으로 나서며 지껄였다.

“나라면, 누이를 죽일 뻔한 놈과는 단둘이 절대로 남겨 두지 않았을 텐데. 그것도 이런 위험한 상황에선 더더욱 말이야.”

“…….”

“내가 조금 전의 대화로 인해 수틀려서 그대를 미끼로 던지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나는 그 말에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가 정말 그런다면, 나는 꼼짝없이 마물에게 짓밟혀 죽을 것이다.

아무런 답도 못 하고 그저 굳어만 있자, 황태자가씨익 웃었다.

“농담이니 얼굴 풀어, 공녀. 내 설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럴까.”

“그게…….”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둬야지.”

그게 지금 할 농담이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그가 방금 전의 데릭처럼 칼을 빼 들며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큐우, 큐우!”

때마침 마물 또한 발 구르는 것을 멈추고 쿵쾅쿵쾅 달려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땅이 진동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던 황태자는 마물과 격돌하기 직전 허공으로 높이 도약했다.

그리고 한껏 쳐든 검을 그대로 마물의 커다란 눈에 박아 넣었다.

“큐우우욱-!”

마물이 고통스러운 괴성을 지르며 마구 날뛰었다.

황태자의 몸이 공중에서 종잇장처럼 덜렁였다.

‘저, 저러다 떨어지겠어……!’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였다.

한 손으로 검을 잡고 버티던 그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더니, 이내.

좌아아악-! 검을 내리꽂은 채 아래로 힘껏 떨어졌다.

그의 양발이 마침내 바닥에 닿았을 때, 마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큐……!”

거대한 신형이 그대로 무너졌다.

정수리 부분만 간신히 달랑달랑 붙은 상태로 두 동강이 난 채.

흐물거리며 바닥에 흘러내린 풍선 괴물의 모습은 정말로 씹다 뱉은 풍선껌 같았다.

‘어…….’

나는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혈혈단신의 몸으로 채 몇 분도 안 돼 괴물을 해치운 황태자는 새빨간 눈을 빛내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마물을 조종하던 검은 옷 무리였다.

그들은 어느덧 원형으로 모여 빛나는 수정구를 하나씩 꺼내 들고 사방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무기를 가진 귀족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생각보다 잘 먹히는 방법인지, 근처에서 부러진 칼을 챙겨 든 채 서 있던 데릭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마물로부터 구해 내어 품에 안고 있던 여자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황태자가 악의 무리들을 주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근위병들이 올 때가 됐는데.”

그 말에 멀찍이 피신해 있던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이었다. 이 정도 소동이라면 누가 부르러 가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직 아무런 기척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지원 세력이 늦는다면, 지금은 사람들을 학살하기 딱 좋은 시점이었다.

데릭과 황태자처럼 연회장까지 유난스럽게 무기를 챙겨 온 몇몇 젊은 남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빈 몸뚱이였기 때문이다.

“끝난 줄 알면 오산이다, 칼리스토 레굴르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무리 중 한 명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걸걸한 목소리였다.

왜소한 체구로 보아 여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다.

“네놈은 오늘 여기서 절대로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레일라 신국의 잔당들이군. 허, 세티나 복식으로 위장한 계집들까지 동원할 줄이야.”

세티나는 잉카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사막 나라였다.

황태자가 놈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검은 옷 무리들이 주춤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패전국 중 하나인 듯했다.

“검문을 통과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조력자가 누구지?”

“너 같이 잔악무도한 놈은 절대로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질문에 전혀 엉뚱한 답이 돌아오자, 황태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정말로 자신이 왜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 약이 올랐는지 검은 옷 무리들이 펄펄 뛰었다.

“전쟁을 일으킨 네놈 때문에 흘린 피와 앗아간 목숨이 수만이 넘거늘!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이 천인공노할 놈아!”

“글쎄. 마물 실험을 위해 인간들을 먹이와 실험체로 쓴 네놈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다, 닥쳐라!”

“게다가 최근에는 마력을 지닌 어린아이들마저 납치해서 학대했다지?”

“그, 그건 모두 위대하신 레일라 여신께서 명하신 일로, 신에 반하는 더러운 족속들이 사라져야 비로소 진정한 황제가……!”

귀가 번뜩 뜨이는 말이었다. 일전에 뷘터에게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 마법사들이 모두 사라져야 신이 선택한 진정한 황제가 탄생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뷘터가 말했던 게 바로 저 무리?’

새로 알게 된 사실에 검은 옷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사이 황태자가 조소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네놈들의 무단 점거지를 박살 내 준 것에 감사를 전하는 게르 일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가, 감히 그 하찮은 놈들이 우리 신성 왕국을…….”

“뭐 대답은 그만하면 됐다.”

갑자기 질문한 이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손을 들어 대화를 멈췄다.

“어차피 네놈들은 오늘 가지고 온 저 마물처럼 내 손에 모두 도륙될 테니까.”

스르릉-.

그는 섬뜩한 말과 함께,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커다란 장검을 바짝 세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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