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3화
황태자로부터 오싹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전쟁 영웅이라는 게 진짜로 말만 그런 게 아닌가 봐.’
그는 마물을 해치울 때처럼 쏜살같이 튀어 나가 검은 옷 무리를 단번에 쓸어버릴 기세였다.
미친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대단한 미친놈인 것 같았다.
조금 착잡한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륙되는 건 네놈이겠지!”
그때, 대체 무슨 객기인 건지 검은 옷 남자가 비열하게 지껄였다.
“킬킬, 뒤를 봐라!”
찌지지직.
놈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킴과 동시에, 선득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저, 저게 뭐야……!”
누군가 경악하며 외쳤다.
그 소리에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검은 옷이 가리키는 쪽으로 쏠렸다.
찌지지직. 황태자가 눈에서부터 동강 내어 머리 부분만 간신히 붙어 있던 마물이 자발적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찌직, 찌이이이익-.
몸에 점성이 많은 건지 한참을 늘어지던 마물이 마침내 완전히 분리되었고.
“큐우!”
“큐우, 큐우우!”
두 마리의 마물이 생겼다.
“어떠냐, 신이 내려준 저 아름다운 생명력이!”
경악하는 사람들을 보며 검은 옷은 낄낄 웃었다.
“아무리, 베고 또 베도 소용없다! 계속 늘어나기만 할 테니까!”
“꺄아아악!”
“저, 저런 마물은 난생 본 적도 없소……!”
황태자가 마물을 처치했을 때 안도하던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다.
하나뿐인 입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렸다.
그러나 아무도 바깥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보이지 않은 막에 가로막혀 있듯, 입구로 몸을 날리는 사람들이 계속 튕겨 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원 사방을 촘촘히 감싼 덤불 벽은 높고 미끄러워, 타고 오르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그사이 두 마리가 된 마물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쫓아 활보하기 시작했다.
“큐우, 큐!”
“큐큐!”
“꺄아아아악-!”
거대한 닭발들이 다시 푹신한 잔디밭을 짓밟고 뛰었다.
황태자와 데릭은 묵묵히 눈빛을 교환하더니 각각 한 마리씩 맡아 달려갔다.
무기를 소지한 다른 귀족들도 덩달아 마물을 공격했다. 레널드 또한 그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마물은 벨수록 끊임없이 증식됐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꺄아아악! 살려 줘요!”
“끄으으!”
잠시간 휴식이 찾아왔던 연회장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나는 황망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았다.
공작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모두들 쫓아오는 마물을 피해 술래 잡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도망 다니고 있었다.
그 난장판 한가운데.
나만 홀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좀체 느껴지지 않았다.
온갖 비명과 괴성이 난무하는 그 사이에서, 나는 나처럼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뷘터?’
마법사인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들 새가 없었다.
“으아아악! 사, 살려 줘!”
그의 근처에 한 남자를 덮치고 있는 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안 피하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는 그의 한 손이 품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지금 고민하고 있었다.
품 안에 있는 지팡이를 꺼낼지 말지를.
마법사임이 밝혀지는 것을 감수하고도 마법을 써서 사람을 구할지 말지를, 말이다.
‘어떻게 저러지?’
밝혀지면 그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 소란을 일으킨 것마저 마법사들을 탄압하는 무리들의 소행일진대…….
‘아무리 선량하다지만, 남을 위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망설이는 그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흰 토끼 상단에서 본, 가면을 쓴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그냥 끝까지 마법사임을 밝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뷘터는 결정을 내린 듯했다.
품에 집어넣은 그의 손이 빠져나오려는지 움찔거리던 찰나.
“페넬로페-!”
격렬하게 나를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들은 건지 문득, 뷘터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군청색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그를 보기 여념 없던 나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큐우, 큐우-!”
고개를 돌리자,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풍선 괴물 한 마리가 보였다.
쿠구구궁, 땅이 진동한다.
“페넬로페! 도망쳐!”
마물을 따라 달려오며 목에 핏대를 바짝 세운 채 내게 소리치는 레널드가 보였다.
그 뒤로, 마물을 상대하던 데릭과 칼리스토가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그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냥제의 퀸이 되어 보자!~
[첫 번째. 위험으로부터 주변인들 구하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모든 남자 주인공들의 호감도 +5%, 명성 +50.)
[수락 / 거절]
한번 거절했던 퀘스트 창이 다시 떴다.
“하.”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거네.’
냉소적인 생각이 든 찰나, 새로운 글씨가 떴다.
〈SYSTEM〉 메인 퀘스트이므로 5초 후 자동 수락됩니다.
〈SYSTEM〉 5
〈SYSTEM〉 4
게임을 플레이할 적에도, 에피소드 진행을 위해 메인 퀘스트는 약간의 강제성을 띠었다.
하지만 현실로 이것을 겪어야 한다니,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이 더러워졌다.
이게 진짜 게임에 불과하고, 내가 화면 너머에서 플레이 중인 상태였다면, 분명 수락 후 ‘마물을 모두 처치했습니다!’ 하는 알림과 함께 간단하게 끝날 일이었다.
일러스트 장면과 대사 선택으로 진행되는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이런 격한 움직임 구현에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게임 화면이 아닌 현실이었다. 현실.
“큐우우우-!”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괴물은 지척에 와 있었고, 보상 대상들은 모두 나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
[수락]
나는 괴물이 나를 짓밟기 직전, 가까스로 퀘스트를 수락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오른손이 엄청난 속도로 등 뒤에 메고 있던 석궁을 앞으로 잡아끌었다.
왼손으로 틸러를 척 받친 후,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타앙-!
“쿠에에엑-!”
요철이 박혀 있는 단단한 발바닥에 무언가가 ‘퍽!’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를 밟으려던 마물이 순식간에 뒤로 자빠져 덜덜 경련했다.
“큐으…….”
얼마 안 가 마물이 축 늘어졌다.
그도 모자라 고무처럼 탱탱하던 불투명한 몸체도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게 아닌가.
“뭐, 뭐야! 저거 뭐야!”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쓰러진 마물 한 마리를 보고 동요했다.
그뿐만 아니라, 남주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위급 상황임도 잊고 일순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게 뭐야?’
물론 그중 내가 제일 많이 당황했다.
너무 정신이 없던 나머지, 난 석궁을 메고 있던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 에카르트 공녀가 마물을…….”
모두의 눈에 서서히 충격이 감돌기 시작할 때.
휘익-. 내 몸은 다시 움직였다. 절대로 자의가 아니었다.
급박하게 몸을 돌린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다시 석궁을 조준했다. 이어서.
철컥, 타앙-.
“큐에에엑!”
뷘터 근처에서 한 남자를 덮치려던 마물이 쓰러져 경련했다.
이번에도 녹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내 몸이 신속하게 일어나 다른 방향으로 돌아선 후 또다시 석궁을 쏘았기 때문이다.
타앙-!
“큐엑!”
쏘는 것마다 놀라울 만큼 속속들이 적중했다.
사람들을 쫓던 마물들이 하나둘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끝도 없이 게임 시스템에 의해 휘둘러졌다.
“저, 저 계집부터 죽여라! 어서!”
검은 옷 무리가 나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증식된 마물들이 오로지 나를 노리며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편이 퍼져 있는 것보다 나았다. 정신없이 몸이 회전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철컥, 탕! 탕, 탕! 타앙-!
얼마나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석궁을 쏘아 댔을까.
동시에 달려오던 마지막 두 마리를 끝으로, 나는 괴물들을 모두 전멸시켰다.
생각보다 많이 증식된 것은 아니었나 보다.
게다가 개체마다의 크기가 커서 맞추기 수월했다.
“허억,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는 들고 있던 석궁을 내렸다.
양팔이 걷잡을 수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집에서 연습할 때도 제대로 못 든 건데…….’
이렇게 장시간 강제로 들고 있으려니 죽을 것 같았다.
‘이게 퀘스트냐. 고문이지.’
나는 찔끔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연회장 위로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모두들 멍한 얼굴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이 모든 악행을 저지른 신국의 잔당들마저.
‘하하. 이번 연도에도 슈퍼스타 침팬지가 되었네.’
나는 체념한 채 웃었다. 피식 터지는 헛바람에, 사람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짝.
어디선가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그것을 필두로 우레와 같은 박수 세례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에카르트 공녀가 우리를 구했어요!”
“오, 신이시여! 공녀님이 없었다면 정말로 어찌 되었을지……!”
“정말 감사하오, 공녀! 생명의 은인이오!”
쏟아지는 환호성에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였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냥제의 퀸이 되어 보자!~
[첫 번째. 위험으로부터 주변인들 구하기] 퀘스트 성공!
〈SYSTEM〉 보상으로 [모든 남자 주인공들의 호감도 +5%], [명성 +50]을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80)
내겐 딱히 필요 없는 명성이 수직 상승했다.
‘오. 호감도나 이렇게 줬음 좋겠네.’
그렇지만 개고생을 한 대가로 [모든 남주들의 호감도 5%]란 나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위험했던 황태자 놈의 호감도가 죽음에서 많이 멀어졌으니까.
비록 시스템에 몸을 휘둘리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이 정도면 썩 후한 편이었다.
내 주위로 잔뜩 몰려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놈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흰 글씨들은 잘 보였다.
[호감도 27%]
제일 근처까지 달려온 레널드부터.
[호감도 30%], [호감도 9%]
데릭과 칼리스토.
[호감도 20%]
뷘터까지.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공을 치하하는 다른 엑스트라들과는 달리, 남주들은 그저 나를 멍하니 바라만 볼 뿐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노멀 모드에서 여주가 이랬다면, 눈이 하트가 되어서 곧장 달려왔겠지.’
생각해 보니 명목상 오라비들은 물론이고, 남주들 중 그 누구 하나 나를 지키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서운하다거나 힘 빠지지는 않았다.
‘필요 없어.’
[호감도 60%]
내게는 이미 몰빵을 확정 지은 남주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