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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64화 (6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4화

왜 모든 종류의 지원군은 위급 상황이 끝나서야 투입되는 걸까.

나는 근위병들이 하나뿐인 입구를 통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빛의 갑주들 사이에 황금색 로브를 입은 사람들 서너 명이 섞여 있었다. 황궁 소속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반쯤 녹아내린 마물을 신속히 확인하고 죽음을 확정지었다.

“마법 공격에는 취약한 개체인지라 전투용으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인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잘은 몰라도 사냥 대회에 마법사들의 참가가 금지된 것을 노리고 무력에 특화된 무한 증식 마물을 가지고 온 듯했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연회장에 나처럼 무기를 들고 나타난 귀족은 드물었다.

한차례 검문도 했기 때문에 마법 무기를 소지한 자는 더더욱.

자고로 매년 사냥 대회에 참여하는 귀족들의 긍지란, 마법의 도움 없이 타고난 사냥꾼의 감과 실력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뇌전 마법이 걸려 있는 내 석궁 공격만이 유일하게 먹힌 것이다.

역시 스토리가 존재하는 게임은 맞는지, 꽤 납득 가는 전개였다.

‘그런데 뷘터는 대체 어떻게 참여한 거지?’

다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알아낼 방도 같은 건 없었다.

마물을 조종하는데 총력을 다하여선지, 신국 잔당들의 반항은 예상보다 거세지 않았다.

독 안에 갇힌 쥐 꼴이 된 놈들은 얼마 안 가 제압되었다.

“이거 놔라! 이거 놔! 신이 무섭지 않느냐, 이놈들!”

어떤 인간들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구경했다.

황태자는 꼴사납게 버둥대는 놈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천들을 하나하나 우악스럽게 벗겨 냈다.

“이, 이게 끝인 줄 아느냐, 칼리스토 레굴루스-!”

수장은 예상대로 노파였다.

이어서 나머지 다섯 명의 얼굴도 드러났다.

놀랍게도 비쩍 마른 여자 3명과 10살 남짓한 어린 남자아이 두 명이었다.

“신께서 잔악무도한 네놈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반드시 네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짓밟힌 신국을 되찾을 것……!”

노파는 끝까지 황태자를 향한 저주를 쏟아내며 발악했다.

칼리스토는 섬뜩한 말에도 무덤덤했다.

오히려 그는 다소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수장인 노파와 여자들은 기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갔다.

남은 것은 비루먹은 아이 두 명뿐이었다.

기사들이 마저 그들을 끌고 가려 했지만, 황태자가 손을 들어 잠시 막아섰다.

그는 근위대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지?”

“그, 그게…… 연회장 주변으로 강력한 접근 금지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다. 급히 마법사들을 소환하여 수식을 해제하려 했지만, 워낙 마력이 강력했던지라…….”

근위대장이 송구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황태자는 딱히 개의치 않은 채 턱을 까딱였다.

“이것들의 짓이군.”

이유를 알아차린 듯 황태자의 무시무시한 적안이 남은 아이들을 향했다.

정체가 모두 드러났으니, 정상적인 아이들이라면 겁에 질려야 마땅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집중된 시선에도 아이들은 동요가 없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텅 빈 동공이 조금 소름 끼쳤다.

“몸을 수색해 보아라.”

칼리스토의 명령에 기사들이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을 우악스럽게 벗겼다.

잠시 후 몸을 수색하던 기사들이 소리쳤다.

“마력 증폭 장치를 찾았습니다!”

아이들의 귀밑에 검은색의 네모난 작은 칩 같은 것이 부착되어 있었다.

‘마력 증폭 장치라면…… 마법사?’

황궁 마법사들이 아이들의 몸에서 조심스럽게 칩을 뜯어냈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던 두 아이는 장치가 떨어져 나가자마자 끈 떨어진 인형처럼 픽 고꾸라졌다.

나는 그 모습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황태자에겐 어린아이라고 자비롭게 봐주는 것 따위 없었다.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예!”

충실한 기사들이 아이들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그 상태로 질질 끌고 가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들 사이에서 누군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흩날리는 은색 머리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뷘터였다.

“무슨 일이지, 베르단디 후작?”

“전하. 부디 이 아이들의 신병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허겁지겁 아이들의 앞을 가로막은 뷘터는 고개를 조아리며 읍소했다.

황태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어째서지?”

“이 아이들은 오랜 시간 최면을 통한 세뇌를 받아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상태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가 세뇌를 풀 수 있습니다. 이전의 하일 자작령에서의 납치 사건 때처럼, 죄 없는 피해자들을 그냥 죽이는 것보단 기억을 되살려 남은 잔당들을 파악하는 것이 더 도움될 겁니다.”

뷘터는 시종일관 침착한 어조로 아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지금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나서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반마법 단체에서 구해 온 어린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공녀를 서슴없이 협박한 사람이다.

“후작, 이건 한낱 자작령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차원이 달라.”

그러나 뷘터의 제안을 황태자는 칼 같이 잘랐다.

“무려 황궁 내의 연회장을 피습한 사건이지. 연루된 자들은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즉결 처형한다.”

“하오나 전하, 제 의사가 반영된 일도 아닌데 주범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입니다. 약간의 아량을 베풀어…….”

“그만. 어서 끌고 가라.”

더 듣기 싫은 듯 황태자가 말을 끊으며 명령했다.

뷘터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동물 가면을 쓰고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을 떠올리자니, 설정값이 과하다고 함부로 그를 업신여길 수 없었다.

기사들이 막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아이들을 끌고 가기 시작할 무렵.

나는 몸을 움직여 가볍게 그 앞을 막아섰다.

“베르단디 후작님의 말에 찬성해요.”

나직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로 확 쏠렸다.

그 안에는 뷘터와 황태자를 제외한 나머지 남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부에 닿는 푸른 눈빛이 유난히 따갑게 느껴졌다.

낯이 서늘하게 굳어 있는 데릭이나,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는 레널드나.

‘나서지 말고 가만있어라’ 하는 압박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후작님에게 맡겨 세뇌를 풀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전하.”

“……뭐?”

황태자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금씩 깜빡이기 시작하는 금발 위를 흘긋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대를 당한 흔적이 이렇게나 뚜렷한데, 처형까지는 너무한 듯합니다.”

그리고 나는 기사들의 손에 멱살이 잡혀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늘어난 옷으로 인해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는 얼룩덜룩한 멍 자국과 흉터들이 한가득했다.

몰려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그것을 알아보았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수군거렸다.

아이들을 향한 동정론이 끓기 시작했다.

“하.”

황태자는 내가 나서는 게 몹시도 불쾌한 듯,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차게 웃었다.

“언제부터 공녀가 이 나라의 대소사에 말을 보태게 된 거지?”

“그럼 제가 다 쏴 죽였는데 이 정도 발언도 할 수 없는 건가요?”

나는 주변을 쭉 둘러보며 물었다.

시종들이 연회장 곳곳에 녹아내린 마물들의 잔해를 치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참 민망했지만, 내 엄청난 활약을 나타내는 증거들이 명백했다.

황태자는 내 물음에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하기야, 할 말이 없겠지.’

놈의 머리 위가 위태롭게 깜빡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가장한 강요를 거듭했다.

“어린아이들이잖아요. 아량을 부탁드려요, 전하.”

특별히 뷘터를 돕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엄청나게 선량한 인간이라 이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한 후 쓰레기처럼 버려져 죽을 처지에 놓인 비루먹은 모습들이…….

가만 보고만 있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랬다. 나답지 못하게.

머리맡에서 따가운 시선이 한껏 느껴졌다. 이윽고.

“……포박하여 베르단디 후작가의 마차에 태워라.”

황태자가 결국 못마땅한 음성으로 허락했다.

바로 고개를 들고 그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다행히 9%에서 변한 것은 없었다.

안도와 동시에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렸다.

〈SYSTEM〉 평판 상승으로 인해 명성이 +10 되었습니다. (total : 90)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평판이 올랐다. 얼떨떨한 눈으로 시스템 창을 바라보고 있으니.

“공녀가 이리도 동정심이 많았는지 내 미처 몰랐군.”

황태자가 한껏 비아냥댔다.

“따로 포상을 내리려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겠어.”

그는 그대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칫, 쪼잔한 놈. 네가 주는 포상 필요 없거든?’

멀어지는 황태자를 바라보며 구시렁대던 나는, 이내 기분이 묘해졌다.

[호감도 10%]

황태자의 호감도가 1% 올랐기에.

‘어쨌든 이 에피소드는 이대로 무사히 넘긴 건가?’

난데없이 마물이 나타나 날뛰는 바람에 까무러칠 뻔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예상치 못한 황태자의 호감도 상승도 그렇고, 어쨌든 오늘 일로 이번 사냥 대회가 취소될 것 같았기에.

‘제발 이대로만 갔으면…… 그리고 그 메인 퀘스트인지 뭔지는 이제 제발 안 나오게 해 주세요.’

설령 나오더라도 두 번은 안 할 것이다.

자의로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불편함을 떠나 이건 정말 할 짓이 못 된다.

황태자가 사라지고 긴장이 풀리니 온 삭신이 쑤셨다.

‘당장 누워야 돼. 안 그럼 죽을 거야.’

주위를 둘러보니, 얼추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것 같았다.

들것에 실려 가는 부상자들도 있었지만, 천만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는 듯했다.

‘한시라도 빨리 에밀리한테 가야겠어.’

나는 카바나가 어느 쪽에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사이 홀연히 사라진 두 오라비 놈들을 찾아 헤매기는 싫었다.

피습 사건으로 근위병들을 제외하고 연회장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상태이기에, 에밀리를 만나려면 내가 밖으로 나가야 했다.

다른 귀족들 또한 근위병과 마법사들에게 간략한 증언과 확인을 하고 연회장을 하나둘 떠났다.

나 또한 그 시류에 따르기 위해 석궁을 둘러메고 터덜터덜 발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페넬로페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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