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5화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왠지 스토리 전개상 이럴 것 같아서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뒤돌았다. 노을 녘에 시작된 전야제는 어느새 컴컴한 어둠으로 물든 상태였다.
마물로 인해 다 깨진 전등 중 살아남은 몇몇 개의 빛이 나를 부른 이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쳤다.
[호감도 20%]
그러나 나는 어둠 속에서도 능히 남주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후작님.”
뷘터를 이렇게 부르긴 처음인지라, 영 낯설게만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도하게 반말을 했는데…….’
가면무도회가 끝이 났으므로 이제는 그러면 큰일이었다.
내가 속으로 입에 붙지 않은 ‘후작님’을 열심히 연습해 보는 동안, 뷘터가 빠르게 걸어와 내 앞에 당도했다.
호칭과는 달리 낯설지 않은 그의 눈동자 색깔.
“오늘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내게 정중히 묵례했다.
‘뭐, 이 정도도 예상했어.’
이제 제법 하드 모드 짬바가 생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딱히 후작님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제게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색하게 느꼈던 것에 비해 매끄러운 존칭이 흘러나왔다.
“그도 있지만…….”
“…….”
“무리하면서까지 사람들을 구해 주셨지 않았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가 고개를 들며 얌전히 놓여 있던 내 손에 흘긋 눈짓했다.
그 시선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내린 나는 천천히 눈이 커졌다.
내 두 손이 간헐적으로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게. 이 체력 낮은 몸뚱이로 너무 무리했어.’
나는 석궁을 쏘기에 팔 힘이 영 좋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떠는 것은 비단 무리를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그 상황이 무서웠다.
나를 짓밟기 위해 높이 쳐들렸던 거대한 닭발의 그림자와 오로지 나만을 노리며 달려오던 수많은 마물
내 통제를 벗어나 미친 듯이 움직이던 몸과 손.
등골이 선뜩한 장면들이 다시금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바르르 떨리는 양손을 뒤로 맞잡아 숨겼다.
“제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랬을 거예요. 괘념치 마시…….”
“아니요.”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한 것이 무색하게 뷘터가 부정했다.
“그 누구도 영애만큼 용기 있게 나서지 못했을 겁니다. 그토록 쉽게 처치할 수 있는 마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현듯 하던 말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무언가에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마법사임을 끝내 숨기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이 드는 건가?’
나는 뷘터의 고충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내 안위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구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충분히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내가 나름대로 시스템에 몸을 맡겨 내 목숨을 구하고, 덩달아 게임이 안배해 놓은 엑스트라들의 목숨을 구했던 것처럼.
“각자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거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저 또한 석궁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못 한 채 마물에 쫓기기만 했을지 몰라요.”
“…….”
“후작님도 후작님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시려 했잖아요. 저는 황태자님 앞에서 그렇게 못 나서요, 무서워서.”
내 입으로 내뱉고도 지극히 맞는 말이라 좀 우스웠다.
뷘터가 먼저 나서지 않고, 내게 마물을 쏴 죽였다는 공이 없었더라면
아까처럼 황태자의 명령을 가로막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웃음기 섞인 얼굴로 키득거리는 나를 고요하게 응시하던 군청색 동공이, 그 순간 세차게 흔들렸다.
그리고.
[호감도 24%]
그의 머리 위가 반짝였다.
4%. 꽤 커다란 상승 폭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어차피 곧 여주 만나면 돌아설 놈인데, 자꾸 부딪혀 봤자 좋을 것 없어.’
내 입에 지어져 있던 웃음기가 찬찬히 사그라졌다.
“……치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나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실은 이제 더 버틸 수 없을 만큼 피곤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놈은 뷘터뿐이네.’
그나마 정상적인 남주인지라, 아닌 걸 알면서도 영 미련이 남았다.
짧게 묵례를 하고 막 돌아섰을 무렵이었다.
“영애.”
뜨거운 손바닥이 다급히 팔을 붙잡았다.
화들짝 고개를 돌리니 뷘터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보내 주신 답례는…… 잘 전달받았습니다.”
잠시 달싹이며 주저하던 입술이 벌어지더니, 그가 나만 들리게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도, 오늘 도와주신 것에 대한 답례를 드려도 됩니까?”
그때였다.
“페넬로페!”
옆쪽에서 누군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호감도 27%]
어두컴컴한 사위로 인해 외양보다 호감도가 더 먼저 보였다.
하지만 심기 불편한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기요. 제 동생한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레널드.”
과연, 남주들의 총집합 날이 맞는 듯 이번에는 레널드가 등장했다.
‘먼저 간 줄 알았더니…….’
소매를 잡아도 매정하게 떠날 땐 언제고, 기가 막히는 순간에 나타난 놈이었다.
한껏 찌푸려진 눈으로 나와 뷘터를 노려보는 분홍 머리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이리 와, 페넬로페.”
레널드는 내 팔을 붙들고 있는 뷘터를 잔뜩 경계하며 나를 불렀다.
그러나 뷘터는 내 팔을 놔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레널드의 기세가 흉악해졌다.
‘왜 기시감이 드는 걸까…….’
불현듯 연무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놈들 사이에 낀 채 눈치를 보다가 이내 뷘터가 잡은 팔을 살살 흔들었다.
“……후작님.”
다른 남주들과는 달리, 나를 붙든 뷘터의 아귀힘은 그다지 세지 않았다.
데릭과 이클리스에게 했을 때처럼 온 힘을 줘 쳐 내면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예의를 차려 주는 유일한 남주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후작님……?”
그러나 그럼에도 뷘터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널드의 목소리가 점점 삐딱해졌다.
“얘가 놓으라잖아요.”
“…….”
“하! 안 놔?”
결국, 다혈질인 레널드가 이를 바득 갈며 나를 잡아떼려고 성큼 다가서던 그때.
마침내 잡힌 팔이 스르륵, 풀렸다. 체념한 듯 통 힘이 없는 손길이었다.
뷘터의 속박이 풀리자마자, 이번에는 레널드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잡아챘다.
그리고 마치 숨기기라도 하듯 제 등 뒤로 나를 거세게 밀어 넣었다.
이젠 더 거리낄 것이 없는지 놈은 잔뜩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뷘터를 향해 마구 비아냥댔다.
“저기요, 후작님.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애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그러시는 모양인데, 본인 나이를 좀 생각하시죠, 예?”
나는 놈이 지껄이는 무례한 말에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 그의 어깨를 퍽 때렸다.
“너 미쳤어? 그런 거 아니야!”
“넌 조용히 하고 있어! 계집애가 겁도 없이……!”
그런 내 반응에 레널드 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그딴 말 할 거면 이거 놔. 나 혼자 갈 거니까.”
차갑게 읊조린 후 잡힌 손을 마구 비틀자, 놈이 당황했는지 황급히 소리쳤다.
“아무튼, 택도 없으니까 앞으로 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쇼!”
“너 진짜…….”
“아, 가자, 가! 어휴, 성질머리하고는…….”
마치 원래 가려 했던 사람처럼 제가 먼저 앞서가며 레널드 놈이 투덜댔다.
‘누가 할 말인데?!’
나는 놈의 성질머리 운운에 어처구니가 없어 불쑥 욕설이 차올랐지만, 꾹 내리눌렀다.
아직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와 닿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터덜터덜, 레널드에게 반쯤은 끌려 가던 나는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보고 있던 뷘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달싹였다.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영애.”
나는 생각보다 집요한 그의 일면에 새삼 놀랐다.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적.
갑자기 걸음이 우뚝 멈추더니 앞쪽에서 산통 깨는 소리가 들렸다.
“아, 거! 답변 올 일 없으니까 헛물켜지 말라……!”
“아니요, 괜찮아요.”
허겁지겁 레널드의 말을 끊고 내 입으로 답을 건넸다.
부정의 말이어서 그런지, 다행히도 공포의 주둥아리가 닫혔다.
“심부름꾼에게 답례에 대한 답변은 전달받지 않겠다고 전해 둔걸요.”
나는 이전에 그에게 직접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되뇌며 생긋 웃어 주었다.
가면을 썼을 때는 미처 지어 주지 못했던 웃음을.
그리고 다시금 한차례 흔들리는 군청색 동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호감도 26%]
이전에도 그랬지만, 단호한 거절에도 상승하는 호감도가 의외라고.
레널드에게 끌려 나오다시피 야외 연회장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아가씨!”
“페넬로페!”
입구 근처에 초조하게 서 있던 에밀리와 공작이 나를 보고 반색하며 달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게냐? 응?”
그들이 번갈아 가며 내 몸을 살폈다.
나는 생각지 못한 환대에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전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고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얘가 마물들 다 쓸어버린 걸 못 봐서 그러시는가 본데…….”
습관처럼 빈정거리려던 레널드는 ‘스읍!’ 하며 눈을 부릅뜨는 공작의 모습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불만스럽게 찌푸려진 놈의 표정이 좀 볼만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디 다친 곳 없으시고요? 에밀리는?”
“난 중간에 카바나에 들릴 일이 있어 연회장 밖으로 나간 탓에 다행히 변고는 피했다.”
“저도 아가씨 심부름 덕분에 멀쩡해요!”
“다행이네. 첫째 오라버니는요?”
“황태자 전하와 함께 범인들을 심문하러 갔다.”
사실 놈이 어디 갔는지 알 바 아니었지만, 예의상 물어보았다.
“너야말로 다친 곳 없다니 다행이다.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아비가 어찌나 놀랐는지 아느냐?”
많이 놀라긴 했는지 공작이 꼬박꼬박 답변을 해 주며 퍽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