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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66화 (6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6화

공작의 반응이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일이 눈 깜짝할 새 발생해서…….”

“그 처죽일 놈들이, 감히 예가 어디라고!”

내가 괜찮은 것을 보고 안도했는지, 공작이 갑자기 버럭 분통을 터뜨렸다.

“집으로 돌아가면 당장 병사들을 풀어야겠다. 그 잔당들을 잡아들인 후에 하나하나 사지를 부러뜨려서 씨를 말려……!”

“아버지, 아버지.”

이대로라면 연회장 앞에 서서 신국의 잔당들을 어떻게 소탕할지에 대한 계획 설명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하여 나는 적당히 말을 끊고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저 정말 피곤해요. 빨리 쉬고 싶어요.”

“그래, 그렇겠지. 얼른 가자! 무겁게 메고 있지 말고, 석궁은 이리 내거라.”

다행히 공작은 내 말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고 석궁을 정말로 공작에게 들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제가 들게요, 아가씨. 주세요!”

그냥 메고 있자, 다행히 에밀리가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에밀리. 무거워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석궁 끈을 풀고 건넸다.

메고 있을 땐 몰랐는데 건네고 나니 정말로 몸이 홀가분해졌다.

“쯧, 페넬로페 에카르트. 다시는 이런 일에 먼저 나서지 말아라.”

공작이 그런 나를 흘끔거리며 혀를 찼다.

“근위병들이 올 때까지 숨어나 있지, 어린 영애가 겁도 없이 어느 상황이라고 나서길 나서! 먼저 나온 귀족들에게 네 얘길 전달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저 잘했어요, 아버지.”

공작의 못마땅한 잔소리에 나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버지가 붙여 주신 선생님께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데요. 그 덕분에 제가 다 쏴 죽인 거란 말이에요.”

실상은 시스템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의 영웅이었다.

‘잘한 건 칭찬해 줘라, 좀.’

언제까지 철부지 망나니로만 살아야 하는 건지.

불만스럽게 생각했지만, 딱히 큰 기대는 안 했다.

사람 인식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마물들을 맞춘 것을 똑똑히 보고도 못 미더워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분명 운 좋게 얻어걸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어느 정도 운발…… 아니, 시스템발이라고 생각하니까, 뭐.’

“……그래.”

하지만 갑자기 우뚝 멈춰선 채 나를 돌아보는 공작의 얼굴은.

“네가 내 딸인 것이 무척 자랑스럽구나, 페넬로페.”

예상치 못한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었다.

격려와 칭찬을 하듯 한쪽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낯설었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너무 이상해졌다.

* * *

에카르트가의 야영장에 설치된 카바나는 총 5개였다.

과연 공작가의 세가 드높긴 한지 하나같이 호화스럽고 커다란 천막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최대한 편의를 살폈다 하더라도 야영장은 임시 처소였다.

여인이 지내기엔 썩 불편하니, 공작은 걸어오는 내내 원한다면 황궁 안에 처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나는 거절했다. 번거로워서였다.

사냥터가 위치한 숲은 본궁에서 꽤 멀리 떨어진 탓에 마차를 타고 한참 동안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집에 보내 줬으면 했지만, 아직 피습 사건의 심문이 끝나지 않아 사냥 대회의 개최 여부가 결정 나지 않았단다.

‘게임님, 제발 취소되게 해 주세요.’

전야제부터 남주 놈들에게 치일 만큼 치인 나는 간절히 빌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는 카바나의 모습은 꼭 캠핑장을 연상케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좀 더 구경했을 테지만, 나는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 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얼른 쉬어라.”

야영장으로 들어서며 나는 공작과 일별했다.

“이쪽으로 오셔요, 아가씨.”

공녀가 지낼 숙소는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에밀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차, 레널드도 공작에게 인사를 하고 같이 움직였다.

‘바로 옆 천막인가?’

만약 사냥 대회가 변동 없이 진행된다면, 나만 보면 빈정거리기 바쁜 놈과 가장 자주 마주칠 게 분명했다.

나는 그럴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다시 한번 소원했다.

그런데 내가 쓸 천막 입구 앞까지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널드는 내 뒤를 쫓아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뒤돌았다.

“…….뭐야?”

“뭐가.”

“왜 계속 쫓아오는데?”

“차, 참나! 쫓아오긴 누가!”

놈이 내 물음에 발끈해서 버럭 외쳤다.

“여기가 내 숙소거든?”

그리고 내 옆에 세워진 카바나를 손가락질했다.

우려가 현실이 됐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럼 잘 자.”

그리고 바로 등을 돌려 기다리고 있는 에밀리에게로 걸어가려던 찰나였다.

“야! 자, 잠깐!”

놈이 다시 한번 나를 막아섰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또.”

“성질이 왜 그렇게 급하냐? 누가 너 잡아먹는데?”

“나 피곤해.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짜증스럽게 재촉했지만, 놈은 답지 않게 우물쭈물할 뿐 막아선 이유를 바로 말하지 않았다.

‘왜 저래.’

남매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읽은 듯, 에밀리마저 눈치껏 카바나 안으로 자리를 피한 후였다.

여전히 말이 없는 레널드를 지켜보던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아오, 여기 상처 났잖아, 이 계집애야!”

그때, 레널드가 불쑥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내 목덜미를 가리켰다.

“……상처?”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자 레널드가 삿대질하던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목덜미 어딘가를 건드렸다.

닿을 듯 말 듯, 거의 스치는 듯한 손길이었다.

“여기 말이야.”

“아.”

따끔-. 전엔 느끼지 못했던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 많이 아프냐?”

놀라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신음에 레널드가 화들짝 놀라 내게로 뻗었던 손을 움츠렸다.

그렇게 엄청 아프지는 않았다. 커다란 상처였다면 일찍이 통증을 느꼈을 테니까.

정신없이 마물을 상대하는 사이 나도 모르는 새 어딘가에 살짝 긁힌 모양이었다.

“괜찮아. 별로 안 아파.”

진짜 아무렇지 않아서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런데 왜인지, 본인이 아프기라도 한 양 레널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잠깐 기다려.”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작고 넓적한 통이었다.

“이게 뭐야?”

“약.”

놈의 소지품이라기에는 너무나 의외의 물건이었다.

“네가 이런 걸 다 가지고 다녀?”

“치료소까지 가서 얻어 온 거거든?!”

그 소리에 나는 도르륵 눈을 굴렸다.

그러고 보니 공작도, 에밀리도, 같이 오지 않은 데릭마저 예의상 안부를 물었지만 레널드에게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까 어디 다쳤어?”

“에휴…….”

놈은 꼭 ‘내가 이런 걸 데리고 뭘 한다고…….’ 하는 표정으로 한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때문이잖아, 멍청아.”

“내가 뭘…….”

“가만있어 봐.”

레널드는 약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 안에 푹 찍어 약을 퍼 올렸다.

초록색 액체가 찐득하게 묻어났다. 구린 냄새가 풍겼다.

그걸 피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레널드가 그런 내게로 성큼 다가오며 불퉁하게 내뱉었다.

“가만있으라니까. 옆머리에 묻는다.”

그 말에 나는 움직임을 우뚝 멈췄다.

놈이 내게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찐득한 약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내 목덜미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까 전, 그가 가리켰던 상처가 난 부분이었다.

“어…….”

레널드의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코와 입술 근처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몸을 굳혔다.

피부에 차가운 액체가 치덕치덕 발렸다. 느낌이 이상했다.

“……그 새끼도 너 여기 상처 난 거 알아채디? 모르지?”

내 상처 위에 직접 약을 발라 주며 놈이 불쑥 물었다.

굳어 있던 나는 한발 늦게 답했다.

“……그 새끼?”

“아까 그 나이 많은 놈 말이야.”

나는 게임 프로필상 뷘터의 나이를 떠올렸다.

‘스물다섯이었나, 여섯이었나…….’

실제로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으나, 여주와 나이 차가 가장 많이 나는 남주인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주’와의 관계일 뿐.

후일을 생각하면, 나는 뷘터와 썩 가깝게 지내지도, 그렇다고 척을 지는 관계를 구축해서도 안 되었다.

“후작님께 그게 무슨 무례야?”

아까 전 레널드 놈의 경악스러운 언행을 떠올리니, 절로 핀잔이 튀어 나왔다.

코앞에 놓인 레널드의 고운 미간이 와작 찌푸려졌다.

“무례는 무슨! 석궁 뒀다 뭐 하냐? 치근대는 그런 새끼들한테나 쏘지 않고.”

“그런 분 아니셔.”

“그런 분, 아닌 분이 따로 있냐? 남자는 다 똑같아, 이 맹추야.”

“아!”

놈이 약이 묻지 않은 손으로 옆머리를 심술 맞게 잡아당겼다.

나는 짧게 비명 지르며 놈을 사납 게 째려보았다.

“죽을래?”

“어쭈? 아주 맞먹어라.”

나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 나갔지만, 레널드는 화내지 않았다.

그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씩 웃으며 숙이고 있던 상체를 들었다.

코끝을 간질였던 숨결이 멀어졌다.

“붕대는 네 하녀한테 감아 달라고 해.”

그가 환부를 눈짓하며 말했다. 처치가 모두 끝난 것 같았다.

‘……살다 보니 얘랑 이런 날도 다 오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싸웠는데.

그 사실이 영 신기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고마워, 오라버니.”

얄밉기 그지없는 놈이지만, 어쨌든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순수하게 호의를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런데 그 순간, 레널드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그러더니, 연무장 가는 길에 마주쳐 뜬금없는 사과를 받았을 때처럼, 눈 밑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아닌가.

“네…….”

“…….”

“네, 네까짓 게 하는 감사 인사 같은 거 필요 없거든!”

연신 입을 벙긋대던 레널드는 돌연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홱 몸을 돌려 제 카바나로 빠르게 걸어갔다.

‘또 왜 저래…….’

그때였다. 거칠게 흩날리는 분홍 머리 위가 반짝였다.

[호감도 31%]

놀란 눈이 천천히 커다래졌다.

요원하기만 하던 레널드의 호감도가, 노멀 모드에서 주어지는 기본 호감도를 넘어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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