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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67화 (6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7화

“네?!”

공작의 카바나 안에 모여 다 같이 아침 식사를 들던 중이었다.

나는, 새벽 늦게까지 심문을 마치고 돌아온 데릭이 전한 소식에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왜, 왜요? 어제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어째서 그대로 진행이 되는 거죠?”

“사망자가 나온 것도 아니고, 타국인들마저 참석한 마당에 이대로 사냥 대회가 무산되면 제국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느냐.”

데릭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마물이 나타나서 날뛰었는데, 그가 위신 따위가 뭣이 중헌디!’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신 입을 뻐끔댔다.

“잘되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물러서는 꼴을 보여 봤자 하잘것없는 놈들에게 얕잡힐 뿐이야.”

공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아오 씨. 이게 아닌데.’

하룻밤만 자고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지, 망할 놈의 사냥 대회를 정말로 지속할 줄은 몰랐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최선책을 내놓았다.

“……저는 몸이 안 좋은 관계로 대회 참석은 힘들 것 같아요.”

“그래. 네가 어제 무리를 많이 하였지.”

다행히 공작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기회에 페넬로페 너도 사교계에 새로이 입지를 다지는 게 좋겠다. 마침 도르테아 백작 부인이 이른 아침 하녀를 보냈더구나.”

“……네? 백작 부인이요?”

“출전식 때 열리는 티 파티에 참여해 달라던데.”

이곳에 와서 나는 한 번도 사사로운 티 파티에 참여한 적 없기에, 초대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나 공작은 왠지 모르게 뿌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카바나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너도 심심할 것 아니냐. 예쁘게 차려입고 나와서 티 파티에 참여도 하고, 네 또래 영애들이랑 좀 어울리기도 해라.”

“쟤는 사냥복만 잔뜩 챙겨 왔어요, 아버지.”

밥을 먹다 말고 레널드가 비죽 웃으며 지껄였다.

‘어떻게 알았지?’

사실이라서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숲까지 와서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으려면 얼마나 짜증 나겠는가.

때문에 에밀리에게 사냥복을 비롯한 단출한 옷 위주로만 챙기라고 지시했었다.

의아한 눈으로 레널드를 바라보는 나와 달리, 공작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놈을 타박했다.

“그럼 더 잘됐지. 요즘은 진취적인 여성이 대세인 게야, 이 미련한 녀석아! 쯧.”

그리고 혀까지 끌끌 차며 덧붙였다.

“네가 그러니까 여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게다.”

“인기가 없긴 누가요!”

레널드가 발끈해서 반박했지만, 공작은 이미 내 쪽으로 팩 고개를 돌린 후였다.

차마 더 반박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놈을 보니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혹시 모르지 않느냐. 어떤 놈팡이들이 어제의 네 용감무쌍함에 반해, 사냥감을 물어다 바쳐서 네가 이번 사냥제의 퀸이 될지.”

“아버지, 그쯤 하시지요.”

그때까지 말없이 묵묵히 식사하던 데릭이 얕은 한숨을 쉬며 입을 뗐다.

“괜히 그런 허황된 기대감을 품고 오만방자하게 굴기라도 했다간 오히려 전보다 더 좋지 않은 구설로 이어질 겁니다.”

놈은 푸른 동공을 잠시 내게로 옮겼다가 이어 말했다.

“이제야 조금 사람다워졌다는 말이 오르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크흠…….”

부정할 수 없는지 공작이 침음을 흘리며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가만있다가 두들겨 맞은 나는 기가 막혀서 어이가 없었다.

나만 보면 빈정대기 바쁜 레널드 놈보다 훨씬 더 기분 나쁜 소리였다.

‘허, 허황된 기대?! 나도 퀸 같은 거 될 생각 없거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부릅뜨고 데릭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마주쳐 오는 시선은 없었다.

‘……재수 없는 놈. 넌 탈락이다.’

식탁 아래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다잡으며 나는 복수를 다짐했다.

* * *

“아가씨, 정말 이러고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에밀리가 마땅찮은 얼굴로 연신 내 차림새를 살폈다.

“뭐, 어때. 사냥 대회잖아. 참여는 하지 않아도 구색은 맞춰야지.”

“그렇지만…….”

그녀는 할 말이 많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거울을 확인했다.

석궁을 연습할 때마다 입던 사냥복을 입은 채 머리를 한데 모아 묶은 상태였다.

진분홍빛 머리가 등 너머로 굽실거렸다.

에카르트의 문양이 금사로 새겨진 새로 맞춘 진회색의 재킷과 반바지가 머리와 썩 잘 어울렸다.

‘예쁘기만 한데?’

나는 미리 구슬을 장착해 둔 석궁을 들고 주섬주섬 등 뒤에 둘러댔다.

“석궁은 또 왜 들고 가시려고요, 아가씨. 몸도 좋지 않으시다면서…….”

에밀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말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여인과 아이들을 위해서 소동물들을 따로 풀어 놓는 구역이 있다며? 이따 가 보려고.”

“직접 사냥을 하시게요?”

“티 파티 가서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나는 산뜻하게 대꾸했다. 그와 동시에 집에 놓고 온 누군가를 떠올렸다.

‘……호언장담하고 나왔는데, 토끼 하나 못 잡아가면 내 체면이 영 살지 않겠지.’

‘푸흐’ 하고 작게 바람 빠지던 소리. 미미하게 웃음기가 섞인 잿빛 눈동자가 아직도 선연했다.

‘분명 비웃었지? 딱 기다려라. 누 나가 네 목도리감 하나 정돈 잡아간다.’

결연하게 되뇌고 있을 때였다.

“야, 아직도 멀었냐?”

천막 밖에서 레널드의 재촉이 들려왔다.

나는 허겁지겁 주머니에 석궁 총알을 담은 천과 벨벳 상자 하나를 쑤셔 넣으며 에밀리에게 인사했다.

“갔다 올게.”

카바나 밖으로 나오니 공작가의 남정네들은 이미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레널드가 나를 보며 성을 냈다.

‘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나도 모르게 눈으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진갈색의 제복을 차려입은 그는 퍽 멋들어져 보였다.

그 옆에 우아한 올블랙의 제복을 입은 데릭도 마찬가지였다.

남주들답게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가 근사한 사냥복과 만나니 더욱 돋보였다.

그 지랄 맞은 성격들도 상쇄하고 눈이 호강한다는 생각이 들 만큼.

‘……게임으로 봤으면 더 환호했을 텐데.’

이것이 암담한 현실이란 것에 나는 입이 썼다.

“예쁘게 좀 차려입으라니까, 어찌 그걸 또 됐어.”

공작은 내 차림새가 썩 마음에 차지 않는지 석궁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 말처럼 허황된 기대감 안 품으려고요.”

나는 흘끔 그 누군가를 곁눈질하며 대꾸했다.

당사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데, 괜히 찔리는지 공작이 크게 헛기침 했다.

“크흠! ……사냥은 안 하겠다 하지 않았느냐? 몸도 좋지 않다며.”

“이왕 온 김에 소동물 사냥터라도 구경하고 싶어서요.”

그 말에 공작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불현듯 내게 바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들놈들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 아비 말 명심하고 있겠지?”

“네?”

“정 쏘고 싶으면, 인적 드문 곳으로 가란 말 말이다.”

“아…….”

일전에 석궁을 받으며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화살이 아닌, 마법 구슬로 대체하게 된 이유에 관하여.

“알겠느냐? 어?”

대답을 종용하는 푸른 눈이 불신과 불안으로 흔들렸다.

조금 전 석궁을 메는 나를 보던 에밀리의 눈빛과 비슷했다.

나는 설핏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 * *

출전식이 열리는 숲의 입구 쪽에 도달하자 이미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말들의 상태를 보고 오마.”

공작과 두 놈들은 북적이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나는 사냥을 나설 준비를 하는 무리를 피해 배웅 나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햇빛을 피해 차광막 밑에 앉아 있는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내가 나타나자 잠잠했던 분위기가 즉시 술렁였다. 나를 향해 하나둘 꽂히기 시작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제 이미 겪은 일이었음으로 개의치 않았다.

‘악녀는 어딜 가든 슈퍼스타인 법이지.’

그러나 얼마 안 가, 나는 비단 나를 향한 수군거림이 단순한 호기심 혹은 멸시 때문이 아님을 알아챘다.

주변을 둘러보니, 에밀리가 왜 그토록 언짢은 얼굴로 나를 본 건지 알 만했다.

‘사냥복 입은 여자는 나밖에 없잖아.’

주변은 온통 화려한 드레스의 향연이었다. 내 또래 영애들이건, 지체 높으신 귀부인들이건.

깃을 부풀리는 공작새처럼, 누가 누가 더 풍성하게 치마를 부풀리는지 시합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사냥 무기가 아닌, 부채나 양산 따위였다.

그 사이에서 홀로 사냥복을 차려입은 채 장엄한 석궁을 메고 있는 나는 당연히 튈 수밖에 없었다.

동공이 지진 나듯 흔들렸다.

‘성별 관계없이 참여할 수 있는 사냥 대회라며……!’

그런데 왜 나만 ‘관심 종자’처럼 이러고 있는 거란 말인가.

에밀리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아니야. 쟤네들은 나처럼 편하게 돌아다니지도 못해.’

나는 애써 내 차림새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준비를 마쳤다면 중앙으로 모이십시오!”

그때 대회를 주관하는 단상 쪽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어느새 출전 시간에 근접했다. 점검을 마친 귀족들이 말을 끌고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공작의 모습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줄을 맞춰 서는 가벼운 것조차 서열로 이루어지는 건지, 가장 선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문의 수장답게 웅장하고 화려한 마갑을 씌운 준마 위에 앉은 그는, 옆에 있는 이와 대화를 나누는 데 여념 없었다.

두 아들놈들은 아직 오지 않은 듯 보이지 않았다.

“어……?”

데릭과 레널드를 찾으며 무심결에 공작의 옆에 있는 이를 확인하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헉, 저기 봐. 후작님이야!”

“작년에는 참석하지 않으시더니, 올해는 직접 사냥하실 건가 봐. 활을 메고 계셔! 너무 멋있다…….”

가까운 곳에서 호들갑스러운 쑥덕임이 들렸다.

공작의 말 상대는 다름 아닌, 뷘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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