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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68화 (6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8화

* * *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베르단디 후작. 오랜만일세.”

말을 몰며 옆으로 다가온 뷘터에게 공작이 반갑게 아는 체를 하였다.

“근 1년 만에 사냥 대회에 참석하는 게 아니던가? 자주 좀 나오게. 이러다 얼굴 까먹겠어.”

“하하, 사냥은 통 적성에 맞질 않아서 말입니다.”

“계속하다 보면 다 느는 법일세.”

공작은 깍듯하고 예의가 바른 젊은 후작이 마음에 들었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문의 수장이 되었으나, 어린 나이에도 후작가를 이끌기 부족함 없는 인재였다.

‘이제 곁을 지켜 줄 여인만 있으면 완벽히 자리 잡겠거늘…….’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젊은 후작을 애송이 취급하는 귀족들이 더러 있었다.

전대 후작과 막역한 사이였던 공작은 해가 지나도 비어 있는 뷘터의 옆자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영애들에게 선물은 좀 받았나?”

“너무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안타깝게도 제게 돌아올 몫까진 없는 듯합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뷘터가 답했다.

후작가의 야영장으로 아침부터 바글바글 몰려들었던 하녀들이 들으면 분통을 터뜨릴 소리였다.

그가 모든 선물을 단칼에 거절한 것을 알지 못하는 공작은 안타까움으로 혀를 찼다.

“쯧쯧, 어째 우리 집 아들놈들과 똑같군. 자네도 어서 혼인하여 가정을 이룰 생각을 해야지.”

“공작님께서는 이번 사냥 대회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선물을 받으셨나 봅니다.”

뷘터는 공작의 왼쪽 가슴을 눈짓하며 덧붙였다.

“가슴에 착용하고 계신 애뮬릿이 멀리서도 한눈에 띄더군요. 훌륭한 장인이 제작한 것인 듯합니다.”

“크흠! 그, 그런가?”

역시, 괜히 꺼낸 주제가 아닌지 공작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는 가슴에 부착한 애뮬릿이 좀 더 잘 보이도록 어깨를 쭉 펴 보였다.

“내 아들놈들은 눈을 뒤통수에 달고 다니는지, 통 알아보질 못하던데. 눈썰미가 꽤 좋군, 자네.”

“아닙니다. 공작님의 늠름함에 무척 걸맞은 장식인지라 저 아닌 다른 이들도 모두 눈여겨보았을 겁니다.”

“하하! 이 사람, 아부도!”

공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아닌 척 자랑을 늘어놓았다.

“큼큼. 우리 막내 딸내미가 보는 눈이 좀 높은 편이긴 하지.”

그 순간, 고삐를 쥐고 있는 뷘터의 손이 움찔거렸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미한 동요였다.

“……공녀님이 드린 선물입니까?”

“아니 글쎄, 이런 것 필요 없대도 부득불 챙겨 주는 게 아닌가. 잉카 제국에서 그 누가 나를 건드릴 수 있다고, 굳이! 텔레포트 주문이 새겨진 값비싼 것을 말이야, 굳이!”

누가 들으면 자랑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어조로, 공작이 여러 차례 ‘값비싼 텔레포트 주문’이 새겨졌음을 반복했다.

커다란 목소리에 주변 귀족들이 그런 공작과 그의 가슴을 흘끔거렸다.

“따님께서 정말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언제 동요했냐는 듯, 뷘터는 어느새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예의 바른 미소를 덧그렸다.

“공녀님의 혜안이 느껴지는 뜻깊은 선물입니다.”

“그렇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굳이 줬다고 노발대발한 것이 무색하게, 중년 사내의 입이 곧바로 헤벌쭉 벌어졌다.

“네, 물론입니다.”

뷘터는 그가 원할 만한 답을 했다.

딸이 준 선물 자랑을 마치고 흡족하게 웃던 공작이, 뒤늦게 칭찬을 돌려주기 위해 그를 살폈다.

마침 후작의 옷소매에 미처 보지 못한 반짝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네 커프스도 꽤 괜찮아 보이는군. 색깔이 자네와 썩 잘 어울려.”

뷘터의 눈동자 색과 똑 닮은, 검푸른 청금석이 박힌 커프스였다.

이번에는 뷘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렇습니까? 선물받은 것인데 공작님께서 알아봐 주시니 기쁘군요.”

“정표 같은 거 하나도 안 받았다더니, 그사이 연인이라도 생긴 건가?”

공작이 놀란 눈으로 되묻다가 이내 반색하며 물었다.

“어떤 가문의 여식이야? 어서 남자답게 시원히 말해 보게. 내 이제야 자네 부친을 볼 낯이 서는군!”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뷘터는 애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전혀 믿지 않는 것인지 공작이 채근했다.

“그런 사이 아니긴! 여기까지 차고 온 것을 보니,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인데. 누군지 귀띔이라도 좀 줘 보게.”

뷘터를 바라보는 공작의 눈이 염문설을 접한 어린 영애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본인의 막내딸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추호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뷘터는 난감한 얼굴로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지 고민했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얼굴에 와 닿는 시선 하나가 느껴졌다.

이쪽을 흘끔거리는 시선들은 무수히 많았다.

선망 어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어린 영애들이나,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의 행보가 궁금한 귀족들의 이목이 잔뜩 쏠려 있었기에.

그런데, 참 이상했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마자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눈에 띄는 진분홍빛 머리칼, 청록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주인공을.

“……웃음이 박하신 분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공작이 달라던 귀띔이 튀어나왔다.

“음? 웃음이 박하다고?”

“저와는 마주칠 때마다 항상 거리를 두고 거절의 말만 내뱉으시지요.”

내뱉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

‘두 번째 만남에서의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아서일까…….’

뷘터는 얼마 전 만남의 끝을 떠올렸다.

- ……글쎄. 우리가 다시 볼 일이 또 있을까.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고 냉정하게 안녕을 고하던 목소리.

하지만 그녀는 토끼 가면을 쓴 마법사의 정체가 자신임을 모른다.

- 아니요, 괜찮아요.

- 심부름꾼에게 답례에 대한 답변은 전달받지 않겠다고 전해 둔걸요.

그러니 어제와 같이, 후작으로서의 만남에서마저도 매몰차게 선을 긋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예의 바른 자신의 모습에 쉽게 호감을 가졌다.

특히 어린 영애들은 약간의 호의에도 볼을 붉히며 수줍게 웃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토끼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을 때도 별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저 여인은…….’

뷘터는 그제야 자신이 페넬로페의 태도에 꽤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여인은 절대로 웃는 법이 없었지.’

무성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공녀는 소문보다 훨씬 차갑고, 날카롭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오늘도 변함없는 뚱한 표정에,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가끔 짓다 마는 그 미소가, 제게는 귀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 * *

뷘터와 스치듯이 눈이 마주쳤을 무렵이었다.

[호감도 32%]

나는 난데없이 반짝 오르는 그의 호감도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여 보았지만 그대로였다.

‘뭐야? 눈 마주쳤다고 6%나요?’

노멀 모드도 아니고, 이 망할 게임이 하드 모드에서 그렇게 후하게 호감도를 내줄 리 없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중한 얼굴로 튄터가 하는 말을 듣던 공작이 갑자기 활짝 웃으며 뷘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주 ……히 빠졌구만!”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는 듯했지만,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띄엄띄엄 끊겨 들렸다.

‘……빠져? 대체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공작의 말에 뷘터는 그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유 없이 오른 호감도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헉, 저기 봐! 에카르트 소공작님과 둘째 공자님이야!”

바로 옆쪽에 있던 여자 무리 중 한 명이 탄성을 지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들을 따라 고개를 무심결에 돌리던 나는, 공작 쪽으로 향하고 있는 두 놈을 발견했다.

‘하…… 진짜 남주는 남주인가 보네…….’

흑마와 백마에 각각 올라탄 그들은 그 어떤 귀족보다 당당하고 위엄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나지막이 한숨이 나왔다.

“세상에, 어쩜 저리 늠름하실까.”

“데릭 님께 수를 놓은 손수건을 드리면 받아 주실까?”

“나는 레널드 님께 드리려고 수호 팔찌를 준비했어!”

주변에 있는 영애들이 그들을 바라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 나이 때에 맞게 난리 법석을 떨던 그녀들은 얼마 안 가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주변을 돌아보니, 지금이 바로 선물 전달 타임인 듯 허겁지겁 자리를 나서는 여인들이 많았다.

데릭과 레널드 쪽으로 향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저놈들의 성질머리가 얼마나 개 같은지 알고 난 후에도 과연 늠름하단 소리가 나올까.’

나는 그 모습들에 차게 조소했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윽고 손에 들려 나오는 것은 작은 벨벳 상자였다.

나는 그것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누굴 주는 게 좋을까…….’

이전에 무기 상단에서 사 온 애뮬릿은 총 세 개였다. 에밀리의 것과 공작의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여분이었다.

사냥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이클리스에게 줄 생각이었고, 참석한다면 내 목숨 보전의 일환으로 쓸 일이 있겠거니 여긴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남주 중 한 명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 줄지 계속 고민했지만, 아침부터 재수 없는 소리를 거나하게 하신 덕에 데릭 놈은 깔끔하게 탈락했다.

‘어제 약이 좀 감동이어서 그냥 레널드한테 바로 주려고 했는데…….’

그런데 막상 공작의 옆에 있는 뷘터를 보니 다시 고민이 들었다.

[호감도 32%]와 [호감도 31%].

뷘터와 레널드의 호감도는 근소한 1%의 차이였다.

여기서 뷘터에게 선물을 주면, 더는 엮이지 않겠다는 계획은 폐기였다.

위험을 감수하고 다시 한번 보험으로 삼을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레널드 놈의 조롱 메들리를 더 자주 듣게 되느냐…….

그때였다.

“내 선물인 건가?”

불현듯 뒤쪽에서 휙 뻗어져 나온 손아귀가, 먹잇감을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벨벳 상자를 휙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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