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69화
“무슨…….”
나는 깜짝 놀라 뒤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정오의 햇빛을 받은 황금색 머리칼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오, 애뮬릿이군.”
고민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남자가, 당당하게 남의 선물 상자를 열어 보고 있었다.
“내 머리 색에 맞춰 준비했나 보지?”
방어 마법 주문이 새겨진 황금색 에뮬릿을 본 황태자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지껄였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이리 돌려주세요.”
나는 상자를 도로 가지고 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놈이 팔을 휙 쳐들었다. 닿을 듯 말 듯한 높이였다.
‘아오! 이 망할 놈이!’
오기가 생긴 나는, 까치발로 깡충 뛰며 상자를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막 잡아채려는 순간, 놈의 손이 다시 훅 올라갔다.
낑낑거리며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놈의 거대한 키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어느 사이 폴짝폴짝 제자리 뛰기까지 하던 중.
“아이처럼 잘도 뛰는군.”
문득 머리맡에서 ‘피식’하고 작은 바람이 터져 나와 이마를 간질였다.
나는 그제야 상자 되찾기를 멈추고 황태자 놈을 돌아보았다.
조롱기가 다분히 섞인 시뻘건 눈이 반달로 한껏 휘어 있었다.
정수리에 열이 확 몰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내 거 맞잖아? 내숭 떨지 말고 그만 인정하지 그래.”
아. 니. 거. 든?! 버럭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참아야 했다.
[호감도 10%]
메인 퀘스트를 하는 동안 개고생을 하며 얻은 소중한 10%였다.
아직 죽음에서 완전하게 멀어졌다고 할 수 없는 수치였다.
“아뢰옵기 황송합니다만…….”
나는 이를 꽉 깨물고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 드릴 선물 아닙니다.”
“그럼, 어떤 새끼한테 주려 했는데?”
“……예?”
“말해 봐, 어떤 새낀지. 내가 대신 전달해 줄 테니까.”
전달해 준다면서 주변을 휙 돌아보는 시뻘건 눈빛이 섬뜩했다.
습관인 건지 놈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누군지 말하면 당장 칼을 뽑아 들고 죽일 것 같았다. 그게 나든, 아니면 내가 말한 대상이든…….
‘하…… 노멀 모드에선 이렇게까지 미친놈이란 설정은 아니었잖아요.’
나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힘겹게 삼키며 대답했다.
“둘째 오라버니한테 주려고 했어요.”
미안, 레널드.
나는 속으로 사과하며 레널드를 팔아먹었다. 생판 남인 뷘터보다는 나을 테니까.
다행히 ‘가족’이란 핑계가 먹히긴 하는지, 황태자는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진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대의 둘째 오라비는 그대가 주는 선물 따윈 안중에도 없을 것 같은데?”
다만, 마치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레널드가 있는 쪽을 흘깃 눈짓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그쪽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나는 곧바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레널드와 데릭의 주변은 그새 선물을 주기 위해 다가선 영애들로 북새통이었다.
“봐요, 아버지! 인기가 없긴 누가 없답니까?”
그 와중에 아침에 들었던 타박을 반박할 수 있게 된 레널드가 신난 얼굴로 공작을 불러 젖히는 게 보였다.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
바글바글한 여자들을 뚫고 과연 레널드에게 선물을 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주고 싶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황태자에게 줘야겠단 마음이 드는 것도 단연코 아니었다.
“……전하야말로 저 말고 선물을 드릴 영애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난 이게 마음에 드는군.”
놈이 아예 상자에서 애뮬릿을 꺼내 들고 제 가슴팍에 붙였다.
“한때 깊이 연모하던 사람에게 주는 정표라고 해 둬.”
“저, 정표……?”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라버니께 드릴 선물이라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는데요.”
“아니면 제국의 백성으로서 황태자에게 바치는 공물이라고 생각하든지.”
놈이 별안간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협박했다.
선물이 아니면 공물이라는 명목으로 빼앗겠다는 소리다.
“하…… 그렇게 하세요, 그럼.”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저 애뮬릿을 가지고 싶다는데 내가 어찌한단 말인가.
어차피 누굴 줄지 아직 확정한 상태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황태자 놈도 남주가 맞긴 했다.
나는 황태자의 가슴팍에 완벽하게 부착된 황금색 애뮬릿을 바라보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전하께 잘 어울리시네요.”
마지못해서 하는 입바른 소리였다. 그러나 썩 듣기 좋았는지 황태자가씨익 웃었다.
“그런가?”
[호감도 12%]
그와 동시에 호감도가 2% 상승했다.
‘뭐 나쁜 결과는 아닌 건가.’
그때였다.
뿌우우우-. 단상 쪽에서 커다란 각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출전 직전임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황태자가 끌고 온 커다란 적마 위에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내 친히 공녀에게 어울리는 사냥감을 잡아다 주지.”
“예? 아, 아니요! 그러실 필요는…….”
“기대해도 좋아.”
거절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놈이 말을 몰아 공작과 두 오라비가 있는 선두로 휑하니 가 버렸다.
‘안 마주쳐 주는 게 답례라고…….’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황망히 되뇌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신가, 에카르트 공작.”
황태자가 커다란 목소리로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출전을 앞둔 참가자 대열의 주변에는 바짝 긴장감이 돌았다.
때문에 아까와는 달리 그쪽의 소리가 내가 있는 곳까지 잘 전달됐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공작이 황태자에게 묵례했다. 놈은 그런 공작을 유심히 살피다가 유쾌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작도 공녀에게 나와 같은 선물을 받았나 보군?”
“……예?”
“그러고 보니 내 애뮬릿에는 어떤 효과가 있는지 묻지 못했군. 공작이 착용한 것은 무슨 주문이 새겨진 것이지?”
‘저런 미친놈! 닥쳐!’
나는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에 입을 떡 벌렸다.
황태자가 태연하게도 지껄인 말에 공작과 데릭, 레널드. 셋의 시선이 동시에 내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호감도 -1%’
[호감도 29%]
‘호감도 -1%’
[호감도 30%]
30%였던 데릭과 31%였던 레널드의 호감도가 차례대로 떨어졌다.
만약 공작에게도 호감도 게이지 바가 있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떨어졌으리라.
“하…….”
분노에 떨며 황태자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불타오르는 내 시선을 느낀 황태자가 나를 바라보며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중지를 들고 마주 흔들어 줄까, 진심으로 갈등했다.
뿌우우우-!
하지만 내 갈등을 현실로 구현하기도 전에 출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랴-!”
“이얏!”
말에 올라탄 귀족들이 앞다퉈 숲속을 향해 내달렸다.
두두두두-. 얼마 후 뿌연 모래바람이 잦아들 때쯤, 꽉 차 있던 공터의 중앙은 텅 비었다.
‘결국 황태자 말고 아무랑도 인사를 못 했네…….’
아무리 남주들을 최대한 피해 다니고자 마음먹었다지만, 호감도를 깎아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멍하니 남주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정체 모를 자괴감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녀님?”
문득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옆을 돌아보자, 처음 보는 여자가 우아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오지 않으실까 우려했는데, 제 초대에 응해 주셨군요. 너무 기뻐요.”
“아…….”
나는 그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잠시 어떻게 답변할지 고민했다.
지위상으로는 내가 더 높았지만, 여자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게다가 제국은 미혼보다 혼인을 한 이들을 윗사람으로 대우하는 암묵적인 풍습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도르테아 백작 부인.”
고민을 끝낸 나는 이윽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진짜 페넬로페였다면 ‘당신 누구야?’ 내지는 ‘응해 준 것을 영광으로 알아.’ 등의 오만방자한 말들을 내뱉었겠지만…….
- 이 기회에 페넬로페 너도 사교계에 새로이 입지를 다지는 게 좋겠다.
불현듯 아침 식사 중에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보던 공작의 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낼 수 있게 되었네요.”
딱히 초대에 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주최자와 직접 마주친 이상 안 간다고 하기도 뭐 했다.
‘공작가의 미친개’라는 소문보단 정상 같아 보였는지, 내 인사에 도르테아 부인의 눈이 살짝 커다래졌다.
잠시 후, 그녀는 놀란 기색을 지우고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티 파티는 정오부터 이미 시작되었어요. 모두들 모여 있는데, 공녀님도 같이 자리를 옮기실까요?”
도르테아 백작 부인은 뒤를 돌아 안내를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며 나는 방금 전 그녀가 지었던 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좀 찜찜한데…….’
하지만 뭐, 나를 죽이려는 남주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녀린 여자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곳에서 별일이야 있겠는가.
‘재미없으면 적당히 핑계 대고 바로 나오면 되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 게임이 늘 그렇듯, 당연히 별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