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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70화 (7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0화

사냥 대회를 주관하는 숲 초입의 너른 공터 옆에는, 작고 아담한 또 하나의 숲이 있었다.

대회 참가자들을 기다리는 여인들이 푸른 녹음을 보며 사교장을 가지도록 조경해 둔 듯했다.

정중앙에 놓인 꽃으로 장식된 기다란 테이블은, 백작 부인의 말처럼 대부분 자리가 차 있었다.

“여러분!”

주최자가 ‘짝!’ 손뼉을 치며 집중시켰다.

“모두 여길 보세요. 제가 어떤 분을 데리고 왔는지!”

“어머나.”

“도착했나 보네요.”

도르테아 부인을 따라 장내에 들어서는 나를 본 여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감상을 내뱉었다.

살랑거리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게 긍정적인 반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딱히 안 가리고 말해도 되는데.’

어차피 얼굴을 봐도 누군지 다 몰랐다.

티 파티에는 어린 영애부터 나이가 꽤 있는 귀부인까지 다양한 인원들이 참여한 상태였다.

좀 의아한 건, 에밀리를 두고 혈혈 단신으로 온 나와는 달리 대부분이 등 뒤에 하녀가 시립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대충 훑어봐도 나처럼 사냥복을 입은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아까 알아챈 사실이었지만, 홀로 튀는 복장을 한 것을 확인 사살당하는 것 같아 입이 썼다.

‘에밀리를 데리고 올 걸 그랬나? 하녀를 동행하란 소리는 없어서 놔두고 왔는데.’

약간의 후회가 들었다.

괜히 누군지 못 알아봐서 ‘상스럽고 예의 없는 공녀’란 소리를 들을까 우려됐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말을 삼가도록 결심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너무 나를 낮춰 보이지 않도록 적당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의중이 담긴 시선들이 속속 꽂혔다.

아까 전 도르테아 부인이 내 인사를 받고 묘한 표정을 지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들이었다.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공녀님.”

다행히 초대해 놓고 방치하는 유치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닌지, 도르테아 부인이 서둘러 나를 앉혔다.

파티의 주최자가 앉는 상석의 바로 옆, 가장 시선이 주목되는 자리였다.

페넬로페의 평판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의 처우였다.

“공녀님께 차를 따라드리렴.”

도르테아 부인이 뒤에 서 있던 하녀에게 지시했다.

내 앞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란 찻물이 부어졌다.

“이번에 저희 부군께서 세티나에 사절로 갔다 돌아오며 가져온 귀한 찻잎이랍니다. 드셔 보세요.”

나긋나긋한 부인의 권유에 나는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공작에게서 다른 귀족들과 어울리라는 잔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런 사교에 관심이 없던 나였다.

그런데 막상 이런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영 어색하면서도 좀…….

‘아씨, 좀 떨리네.’

조심스럽게 향을 맡은 나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한 모금 머금은 척한 후 다시 내려놓았다.

“향이 참 좋네요, 부인.”

사실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이국의 것이라 그런지, 찻물에서 미미하게 비위를 자극하는 지린내가 훅 맡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것을 곧이 곧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가요? 공녀님께서 그렇게 말해 주시니 기쁘네요! 모두 그렇죠?”

도르테아 백작 부인은 크게 웃으며 모두에게 동조를 구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것참 기쁜 소식이네요.”

이번에도 몇몇 여자들이 부채로 살랑살랑 입을 가리며 대꾸했다.

꽤 성황리에 내 첫 인사가 마무리 된 눈치이자, 나는 속으로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공녀님! 전야제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면서요?”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영애 한 명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물었다.

열다섯, 열여섯 살쯤 됐을까.

아직 많이 어려 보이는 소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아. 뭐, 엄청난 활약까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겸양은 귀족의 미덕이지.’

그리고 홀로 뿌듯해했다.

그런 내 태도에 이름 모를 영애는 사랑스럽게 양 볼을 붉히며 방방 외쳤다.

“어제부터 공녀님의 이야기로 황궁이 계속 들썩이던걸요!”

“아하, 그런가요?”

그녀는 돌연 시무룩한 얼굴로 덧붙였다.

“네. 저는 몸이 좋지 않아 일찍이 카바나로 돌아가서 미처 보지 못했지 뭐예요…….”

“아니, 아리스 영애. 그 진귀한 장면을 놓쳤단 말이에요?”

내가 채 답을 주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을 흘끔 살폈다.

그러나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있는 이 중 하나라 얼굴이 구분 가지 않아 금방 관심을 껐다.

‘……아리스 영애구나.’

나는 대신 먼저 호의를 표해 준 영애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나중에 난감한 일이 없도록 외우는 것도 있었지만, 공작의 말마따나 또래 영애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앉아 있는 여자들이 나를 주제로 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에카르트 공녀가 어찌나 활을 잘 쏘던지, 쏘는 족족 마물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이 장관이었어요!”

“정말요? 아, 너무 보고 싶다아…….”

“맞아요. 아리스 영애는 어제 일찍 연회장을 빠져나간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거예요.”

“그런데 공녀, 어쩜 그리 활 솜씨가 빠른 시일 내에 상승할 수 있었던 거죠?”

입을 여는 것은 대부분 나이가 좀 있는 귀부인들이었다.

어느새 그네들이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나를 은근히 하대했다.

그것을 곧바로 눈치챘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어디에나 있는 텃세였다.

‘그간 평판도 최악이었는데 뭐, 이 정도면 양반이지.’

괜히 기분 나쁜 티를 내어 잘 흘러가는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었다.

하여 나는 적당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좋은 스승을 두고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석궁 실력은 금방 늘기 마련이에요.”

“어머나…… 이번엔 또 누굴 맞추시려고 연습까지 하셨을까?”

그때 대각선 쪽에 앉아 있는 여자가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퍽 조롱기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네?”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파란 머리칼이 인상 깊은, 내 나이 또래의 영애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인사라도 하듯, 그녀의 눈매가 예쁘게 휘었다.

‘뭐지?’

방금 들은 말이 나를 향한 비아냥거림이라는 생각을 못 할 만큼 유순한 얼굴이었다.

“아하하, 켈린 영애는 어제 공녀님의 활약을 보았나요?”

그때, 주최자가 잠시 얼어붙은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켈린 영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그러는 와중 켈린 영애란 여자는 활짝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물론이지요, 부인.”

“어떠셨어요, 영애? 자세히 말 좀 해 주세요!”

아리스 영애가 다시 방방 몸을 들썩이며 마구 졸랐다.

분명 내 이야긴데 어째, 점점 주체는 내가 아니게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다들 찬찬히 떼지는 켈린 영애의 입술에 시선을 집중했다.

“사실 저는 공녀님이 석궁을 쏘는 내내 안심했답니다.”

“어떤 안심을요?”

“아, 그러고 보니 켈린 영애는 작년부터 공녀님의 활 솜씨를 무척이나 찬사해 왔죠?”

귀부인들이 연달아 켈린 영애의 말을 받아 응수했다.

‘내 활 솜씨를 찬사했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말도 안 되는 귀부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번뜩 어떤 사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헐.’

나는 그제야 저 파란 머리가 누군지 깨달았다.

내가 직접 한 일도 아닌 데다가, 마주칠 일이 전혀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작년에 걔……!’

석궁으로 쏴 죽이겠다고 날뛴 페넬로페 덕분에 사냥제의 퀸이 된 바로 걔.

‘망했다.’

등줄기로 섬뜩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이 자리가 페넬로페, 아니, 내게는 썩 좋지 못한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작년 사냥 대회 때의 공녀님이 떠올라서요.”

그렇게 내적 폭풍을 맞고 있을 적, 켈린인지 켈로근지는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제 근처에 날아다니는 모기를 화살로 잡는 묘기를 보여 주신다며, 제게 석궁을 겨누셨거든요.”

“세상에!”

그녀의 말에 모든 이들이 나를 곁눈질하며 감탄 비슷한 소리를 하나 씩 내놓았다.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단 말이에요?”

도르테아 부인이 호들갑을 떨며 되물었다.

“어떤 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공녀님은 절대로 몰상식하고 품위 없는 이유로 제게 석궁을 겨눈 것이 아니에요. 오해들 마세요. 모기를 잡아 주겠다고 친절을 베푸신 것이죠.”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하는 파란 머리의 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야. 그냥 대놓고 욕해 달라고 해라.’

면전에서 배배 꼬아 험담하는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나도 이렇게 부아가 치밀진대, 작년의 페넬로페는 대체 얼마나 열이 받았으면 물불도 안 가리고 쏴 죽이겠다고 난리를 쳐 댔을까.

“작년의 일로 공녀님에 대해 좋지 않은 말들이 돌아다녀 마음이 많이 무거웠는데, 참 다행이에요.”

그러나 험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란 머리는 나를 바라보며 쐐기를 박았다.

“어제는 작은 모기도 아닌 집채만 한 마물을 맞춘다고 나선 것이니, 사람을 잘못 맞출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겠어요?”

“…….”

“공녀님이 장님도 아니고 말이에요.”

직역하면, ‘장님도 아닌 이상에야 그 커다란 마물을 못 맞추는 게 말이 안 된다.’라는 소리였다.

왜 불안한 예감은 한 번도 빗겨 나가질 않는 걸까.

이 모임에 나를 참여시키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공작에게 직접 하녀를 보냈던 취지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쩐지. 웃는 것들이 영 묘하다 싶더니…….’

파란 머리를 필두로 덫을 놓는 데 성공한 여자들이, 오늘의 사냥감을 향해 신나게 독침을 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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