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1화
“저도 소싯적에 활을 좀 배웠었는데, 다음에는 공녀님처럼 커다란 마물을 과녁 삼아 연습해 봐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공녀님! 오늘 입고 오신 의복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기어코 의복 얘기까지 나왔다.
“감사합니다.”
내 쪽으로 훅 쏠리는 눈빛들에 나는 그냥 모르는 척 대꾸했다.
“푸흐!”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명백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짜증은 났지만, 사실 나와 직접 관련된 일은 아니기에 참을 만했다.
이 몸이 과거에 저질러 놓은 일인 것을, 이제 와서 뭘 더 어쩌겠는가.
‘괜히 더 난리 쳤다가 공작이나 데릭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때 가선 생명과 직결하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당사자보다 더 기대감 서린 눈으로 티 파티 초대를 전하던 공작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 흠이 잡히지 않을 만큼만 자리나 지키다 갈 생각이었다.
비웃음에도 별 동요 없는 내 모습에 조금 안달이 났는지, 파란 머리가 또 한 번 입을 털었다.
“공녀님은 오늘도 마물 사냥을 나서려는 모양이신가 보죠?”
“어? 그러고 보니 그 석궁, 어제 마물을 처치한 석궁 맞죠?!”
아리스 영애가 손가락으로 등에 멘 석궁을 가리켰다.
이 모임의 취지를 알아서인지 그조차 무례하게만 느껴졌다.
“네.”
나는 성의 없이 답했다.
표정 관리용으로 얼굴에 은은히 피고 있던 미소 또한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어머, 잘됐어요!”
아리스의 말을 들은 도르테아 부인이 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공녀님, 아리스 영애가 어제 공녀님의 모습을 보지 못해 무척이나 아쉬워했지 뭐예요. 이왕 석궁까지 메고 오셨는데, 활 솜씨 좀 뽐내 주세요, 네?”
“마침 걸맞은 의복도 차려입으셨겠다, 그거 괜찮겠네요!”
켈린이 말을 받았다.
“사실 제가 얼마 전에 생일 선물로 커다란 곰 인형을 받았거든요. 오늘 티 파티에 참석하신 분들께 보여드 리려고 부러 챙겨 왔는데, 그것을 과녁으로 사용하면 딱이겠어요.”
“어머, 켈린 영애! 소중한 선물에 구멍이 나면 어쩌려고요?”
“어제의 마물보다는 훨씬 작아서,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호호호호, 맞는 말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귀부인들이 다시금 부채를 살랑거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준비해 놓은 것을 가져오렴.”
“네, 아가씨.”
내게 허락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켈린은 멋대로 무대를 꾸미기 시작했다.
‘오호라. 과녁까지 이미 준비해 두셨다?’
나는 어디까지 하는지 구경이나 하자 싶어서, 등받이에 한껏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점점 거만하게 흐트러지는 내 태도에 눈초리들이 뾰족해졌다.
얼마 후 자리를 떴던 하녀가 본인의 몸통만 한 커다란 곰 인형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그리고 켈린의 뒤쪽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선 채 물었다.
“과녁은 어디 다 두는 게 좋을까요, 아가씨?”
“공녀님, 어느 거리가 괜찮으시겠어요? 저는 이 정도 거리면 적당할 듯한데.”
켈린은 쿡쿡 터져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얼굴로 서 있는 하녀를 가리켰다.
“코앞이니 작년처럼 사람을 쏠 뻔한 위험도 적을 테고요. 안 그런가요, 여러분?”
그녀의 물음에 여자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켈린 영애의 말이 맞네요. 그 정도가 적당하겠어요. 괜히 너무 멀리 떨어졌다가 눈먼 화살이 잘못 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어서 일어나서 저희에게 솜씨 좀 뽐내 보세요, 공녀.”
“와아! 너무 기대돼요!”
아리스 영애가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짝짝’ 마주쳤다.
소녀의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호기심으로 착각했던 조금 전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호기심은 호기심이지.’
그건 마치, 동물원의 침팬지나 묘기를 부리는 광대를 구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맨 처음 바람잡이로 그녀를 이용했기에 내가 사양할 수 없게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일 터였다.
굳이 더 돌아볼 것도 없었다. 모두가 아리스와 비슷한 조롱 어린 눈빛으로 날 보고 있을 테니까.
때문에 나는 귀족들을 부추겨 이 자리를 계획했을 주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표정이 사라진 나를 보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걸쳤다.
‘어디 작년처럼 또 날뛰어 보시지.’
경멸과 희열이 뒤섞인 눈이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게임 속 페넬로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광대놀음에 어울려 주거나 아니면, 작년처럼 광분해서 다 쏴 죽인다고 날뛰거나.
‘진짜 페넬로페였다면 짜증 날 만한 선택지뿐이네.’
바라는 바대로 석궁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은 어려울 것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내일쯤 ‘티 파티에서 열린, 공녀의 우스꽝스러운 석궁쇼’가 일파만파 퍼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감히 날 조롱하는 것이냐며 화를 내고 뒤엎는다면…….
‘또 여론몰이를 하여 동정표를 얻어서 사냥제의 퀸이 되려 하겠지.’
아마 켈린이 원하는 것은 이것에 가까울 것이다.
겸사겸사 꼴 보기 싫은 공녀를 재기조차 못 하게 사교계에서 완전히 짓밟는다면 더 좋을 테고.
어느 쪽을 선택하던 그녀에게는 하등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둘 다 선택하면 되지, 뭐.’
내가 팔짱을 낀 자세에서 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켈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불렀다.
“공녀님?”
나는 그녀를 마주 보다가 돌연 픽, 웃음을 터뜨렸다.
“곰 인형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네?”
내 대답에 그녀는 일순 당황했다.
바로 괴성을 터뜨릴 줄 알았던 공녀가 잠잠한 것이 영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보였다.
“왜, 왜죠?”
“안타깝게도 저 크기로는 제 실력을 보여 드리기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나는 흘끔 곰 인형을 곁눈질하며 나른하게 읊조렸다.
“세상에!”
도르테아 부인이 호들갑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럼 대체 어느 정도 크기여야 공녀님의 실력을 볼 수 있는 것이죠?”
“어제 맞추신 마물 크기의 과녁이라도 필요하신 걸까요?”
타인의 지원에 힘입은 파란 머리가 과도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쩌죠, 공녀님? 수소문을 해도 그렇게 커다란 인형을 제작하는 장인은 없을 듯한데…….”
“오호호호, 그러게요. 너무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글쎄.”
드르르륵-.
나는 그 우롱들을 묵살하듯 시끄럽게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드럽고 유려한 손길로 석궁을 앞으로 돌려 메었다.
“네 주둥이 근처에 날아다니고 있는 날파리 정도는 맞춰 줘야 꽤 괜찮은 소문이 나올 것 같은데.”
철컥.
마침내 한 명에게 활을 겨누기까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눈을 내리깔고 주위를 쭈욱 둘러보았다.
직전까지 깔깔거리던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아무도 내가 일어나자마자 켈린 영애에게 석궁을 겨누리라고는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런 예고조차 없었으니까.
켈린을 비롯해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귀족들이 눈을 홉떴다.
그중 부채를 살랑이며 아까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나이 많은 귀부인 하나가 호통 치듯 소리쳤다.
“에, 에카르트 공녀! 이, 이 무슨……! 어찌 또다시 사람에게 활을 겨눌 수……!”
“공녀?”
나는 차갑게 여자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마주 볼 가치도 없다는 듯, 눈동자만 스르륵 옮긴 채 무참히 짓밟았다.
“언제부터 에카르트의 이름이 얼굴도 모르는 노파의 입에까지 함부로 오르내리기 시작했을까?”
“그…… 그런…….”
얼굴도 모를 만큼 한미한 가문이란 말이 퍽 수치스러웠는지 귀부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내게 차마 더 반발하지 못했다.
티 파티 내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존중받았을지 모르나, 제국은 철저한 계급주의였기 때문이다.
다과회가 열린 소담스러운 숲속에 어울리지 않는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녀님, 진정하세요.”
켈린 영애가 생각보다 침착한 얼굴로 지껄였다.
“자꾸 이러시면 저번처럼 근위병을 부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공녀님의 입지도 곤란해지시지 않을까요?”
도발이었다. 나를 빡 돌게 만들려는 심산인.
티 파티가 열리는 숲 바로 옆 공터에 근위병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작년의 페넬로페가, 쏠 줄도 모르면서 석궁을 든 채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을 것이 안 봐도 뻔했다.
소란을 들은 근위병들이 바로 뛰어오기 충분할 만큼.
그녀가 느닷없이 무기를 졸랐던 이유가 위협용이자 자기방어용이란 것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속성으로 석궁을 배우던 나는, 이 몸이 무예에 소질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활을 쏠 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손가락이 매끈하고 팔 근육이 전무할 리 없었다.
‘바보 같은 계집애.’
조금만 머리를 쓰면 손쉽게 기를 꺾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던 걸까.
근위병을 들먹거렸음에도 고요하기만 한 내 모습에, 여자의 얼굴 위로 스멀스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번에는 작년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제게 겨눈 석궁을 내리…….”
“그럼 가서 불러오든가.”
나는 다시 한번 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턱짓했다.
그런 내 반응에 여자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경악이 서렸다.
‘악을 지르고 길길이 날뛰어도 진즉에 날뛰었을 공녀가, 제 입으로 근위병을 불러오라 한다.’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는지 파란 머리는 생경함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다시 보았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근위병을 불러오는 게 더 빠를까, 아니면 내가 움직이는 것들을 쏴 맞추는 게 더 빠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