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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72화 (7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2화

“허, 허억……!”

근처에서 날카롭게 숨을 집어먹는 소리가 들렸다.

멍청해 보이기 그지없던 작년과는 썩 다른 기세 때문일까.

“가서 불러와 보라니까? 응?”

당장이라도 근위병을 부르러 갈 것처럼 흠칫대던 하녀들 또한 아무도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속.

따가악……. 내 손가락이 천천히 방아쇠를 더듬는 소리만 음산하게 울렸다.

“고, 공녀님! 이, 이러시면……!”

켈린 영애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공작가의 미친개가 정말로 사람을 쏴 죽이려 한다.’

이제야 심각성이 좀 느껴지는지, 끝까지 침착했던 파란 머리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완전히 젖어 든 채 마구 흔들렸다.

그리고, 철컥.

누가 들어도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흐으……!”

켈린 영애를 포함한 여자들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을 무렵.

“빵.”

나는 입으로 총성을 흉내 냈다. 당연하게도, 쏘아져 나가는 구슬은 없었다.

“농담이에요.”

나는 씨익 웃으며 겨누고 있던 석궁을 내렸다.

“딸꾹.”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리스 영애가 딸꾹질을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멸시와 조롱이 가득했던 얼굴들이 어느새 짙은 공포로 잠식되어 있었다.

‘나 진짜 천상 악년가 봐.’

그 꼴이 불쌍하기보단, 꽤 볼만하게만 느껴졌다.

“뭘 그렇게들 겁을 먹고 그러실까.”

“…….”

“장전도 안 했어요, 여러분.”

나는 석궁을 한 손으로 쳐들고 방아쇠를 두어 번 더 딸깍딸깍 잡아당겨 보였다.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일 뿐인데, 그때마다 가녀린 어깨들이 퍼뜩퍼뜩 떨렸다.

나는 석궁을 다시 등 뒤로 둘러멨다.

그리고 테이블을 둘러보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었다.

“표정들 풀어요, 응?”

마치 짓궂은 장난을 친 후 반응이 시원찮아 보이자 입술을 삐죽이는 말괄량이 소녀처럼.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반응이 이래서야 내가 꼭 티 파티를 망치러 온 악당 같잖아요. 여러분께 정식으로 초대받아서 온 건데.”

“…….”

“안 그래요, 도르테아 부인?”

주최자를 돌아보며 묻자, 그녀가 불현듯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 그럼요, 공녀님!”

빠르게 정신을 되찾은 그녀가 황급히 소리쳤다.

“여, 여러분, 모두 웃으세요. 고, 공녀님이 저희에게 웃음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재미있는 장난도 쳐 주신걸요?”

그러나 그 장난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는 이제 진짜 사냥을 하러 가야 해서 먼저 일어날게요.”

나는 의자 뒤편으로 빠져나왔다.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얼어붙었으니, 민폐를 끼친 사람이 응당 자리를 피해 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떠날 채비를 마친 나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과녁을 맞히는 모습은 보여 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제 석궁의 볼트는 화살이 아닌 마법이 걸린 구슬이라서요.”

“…….”

“다음에 기회 되면 꼭 보여 드리죠.”

몸을 돌려 걸어가려던 찰나.

“아참.”

나는 깜빡 잊고 전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처럼, 다시 걸음을 멈추고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마법일지 궁금해하실 분들이 계실까 봐 특별히 말씀드리는 건데…….”

“…….”

“제 석궁의 구슬은, 맞는 것들을 백치로 만드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태연하게 거짓을 내뱉으며, 이 일을 꾸민 주범을 시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췄다.

“누구 덕분에 1년간 사냥을 못 해서 몸이 퍽 근질거렸거든요. 사냥감을 잔뜩 잡기 위해 이런 구슬을 따로 제작할 만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파란 머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물론 소동물용으로 제작한 거라 맞아도 죽지는 않겠지만…….”

“…….”

“사람에게도 마법이 통할지 좀 궁금하네.”

그리고 켈린 영애의 얼굴이 졸도할 사람처럼 퍼렇게 변해 가는 것을 배경 삼아 뒤돌았다.

입조심하라는 협박을 마치고 중앙 공터로 이어지는 길에 막 올랐을 때였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평판 하락으로 인해 명성이 -10 되었습니다. (total : 80)

명성이 떨어졌다.

나는 잠시 입술을 삐죽이다가 대수롭지 않게 시스템 창을 지나쳤다.

호감도처럼 목숨과 직결된 게 아니고서야…….

평판이든 명성이든 마구잡이로 떨어져도 내 알 바 아니었다.

* * *

“이봐. 소동물 사냥 구역은 어디로 가야 하지?”

지나가던 근위병 하나를 붙잡고 길을 물은 나는, 대답을 들은 후 아침에 생각했던 본 목적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사냥터의 초입을 지나면 바로 갈래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길이 내가 가려는 목적지였다.

‘뭘 잡아다 주지?’

무기질적인 잿빛 눈동자를 떠올리며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길을 거닐었다.

하지만 막상 가 본 길 저편은 내가 상상하던 소동물 사냥터가 전혀 아니었다.

“이게 뭐야…….”

나는 끝없이 펼쳐진 울창한 나무와 풀숲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당연히 시종들이 소동물만 따로 모아 일정한 구역에 울타리를 쳐 두고 가둬 두는 것이었다.

초보자도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아이들도 잡을 수 있는 곳이라며. 이건 그냥 숲이잖아.”

그렇다. 이건 그냥 숲이었다.

사방을 샅샅이 둘러보아도 소동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다.

갈림길을 기점으로 대형 동물과 소형 동물을 따로 풀어 놓는 식으로 대충 구색만 맞춰 둔 듯했다.

어차피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들도 드물고, 여성 귀족들은 대부분 참여하지 않으니.

“하…… 이 게임은 뭐가 이렇게 하나씩 이상한 거야.”

나는 불만을 구시렁대며 터덜터덜 숲길을 따라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길이 잘 다져져 있어 길을 잃을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과연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재빠른 동물들을 잡을 수 있을지.

아니, 발견이나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산책이나 하고 간다고 생각하자.’

나는 깔끔하게 사냥을 하겠다는 다짐을 포기하고 길을 거닐었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그것은 섣부른 포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 토끼다!’

눈처럼 새하얀 토끼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많이 풀어 놓긴 했는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네 마리나 됐다.

‘귀여워…….’

사실 나는 태어나서 강아지나 고양이 외의 동물은 처음 보았다.

남들은 지겹도록 갔다 왔다던 동물원을 한 번도 못 가 봤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대하던 사냥감을 발견했음에도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 돼! 가지 마!’

미적거리는 사이, 인간의 기척을 기민하게 알아챈 토끼 무리들이 빠른 속도로 도망가 버렸다.

나는 시무룩해져서 다시 길을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방금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됐다.

다람쥐, 청설모, 너구리, 닭, 살쾡이, 작은 사슴까지.

소동물을 풀어 둔 구역이 맞긴 맡는지 걸음을 옮기는 족족 사냥감을 마주쳤다.

슬프게도, ‘마주치기만’ 했다.

구경하거나 석궁을 돌려 메는 사이에 사냥감들은 빠르게 도망가 버렸다.

‘아씨…… 사냥 초보 티 너무 나잖아.’

주변에 나 혼자뿐이라 다행이었다.

괜한 객기로 공작을 따라 사냥에 정식으로 참여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몰려오는 자괴감에 나는 반쯤 해탈한 채 아예 석궁을 바로 쏠 수 있는 자세를 취한 채 걸었다.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나는 이제껏 만난 그 어떤 것보다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발견했다.

‘대박.’

이클리스의 눈동자 색과 똑 닮은 잿빛 털의 여우였다.

‘저거다!’

단번에 확신했다. 저것이 내가 오늘 잡아서 가져가야 할 사냥감이라는 것을.

잿빛의 여우는 경사 아래 작은 개울가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다.

희귀한 종류이긴 한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딱 한 마리뿐이었다.

‘놓치면 국물도 없는 거야.’

나는 신중히 발을 옮겼다.

비탈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겨눌 수 있는 각도를 미묘하게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가까이 가야 했다.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움직이던 나는, 이윽고 목표했던 나무까지 당도했다.

나무 기둥에 반쯤 몸을 숨긴 채 천천히 크랭크를 돌렸다.

그 순간 여우의 귀가 쫑긋거렸다.

하지만 기척을 느낀 것은 아닌지 여전히 물을 할짝대는 중이었다.

철컥. 마침내 장전이 끝났다.

나는 천천히 석궁을 들어 활을 겨눴다.

활 몸의 정중앙에 목표물이 완벽하게 들어왔을 무렵.

한가로이 물을 마시던 여우가 갑작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내가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앙-!

한 끗 차이로 발사된 구슬이 빗나갔다.

위협을 감지한 여우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놓치면 안 돼!’

다 잡은 사냥감을 코앞에서 놓친 사냥꾼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나는 여우의 뒤를 쫓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간발의 차로 잡지 못한 게 너무 아깝고 안달 났다.

‘금방 다시 잡을 수 있어!’

안타깝게도 그것은 내 오만이었다.

여우는 엄청나게 빨랐다.

저 작은 몸집에 어떻게 저런 속력과 체력이 나오는지 믿기지 않을 만큼.

뒤따라 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약한 몸뚱이는 얼마 뛰지 않아 금방 지쳐 버렸다.

“헉, 허억…….”

나는 결국 여우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놈의 여우가 문제가 아니었다.

사냥감을 쫓느라 정신없이 달린 탓에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니 잘 다져 있던 길마저 찾을 수 없었다.

“하…… 일단 표식부터 찾자.”

숲이라 해 봤자 어차피 황궁 내에 있다.

혹시 모를 실로(失路)를 방지하기 위해 사냥터 곳곳에 표식들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용케 떠올렸다.

사냥에 완전히 실패한 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나무에 묶인 황금색 천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나는 안도했다. 이제 저것을 따라 걷다 보면 다른 이들을 만나거나,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나의 패착은, 표식의 색깔이 무엇을 뜻하는지까지는 기억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크으, 크워어-.”

얼마 걷지 않아 나는 또 다른 사냥감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주객이 바뀌어 나를 사냥할 사냥꾼이라 칭할 수 있는 동물을.

“크워어어-!”

“악! 뭐야!”

예고 없이 갑자기 수풀 저편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곰을 보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나는 그제야 기억해 냈다.

황금색 표식이 사자와 호랑이 같은 맹수들을 풀어 놓은 구역을 뜻한다는 것을.

그 순간이었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흥분한 거대 불곰이 나타났다!

[거대한 곰을 사냥하여 [퀸]이 되기 위한 초석을 다지시겠습니까?]

(제한시간 : 30초, 보상 : 거대한 곰 가죽과 쓸개, 명성 +50, [???]의 호감도 +5%)

[수락 / 거절]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며 나는 기가 막혀서 부들부들 떨었다.

‘이 미친 게임아, 전개가 왜 이렇게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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