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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73화 (7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3화

“크르으…….”

내 키의 족히 두 배는 돼 보이는 커다란 맹수는 인간을 알아보고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경계했다.

동물이 아니라 괴물이라 해도 믿을 만큼 엄청난 크기였다.

‘대체…….’

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들고 맹수와의 거리를 재었다.

곰과는 석궁을 쓸 수 있을 만큼 꽤 떨어져 있었다.

물론 거리와 관계없이 야생 곰이 얼마나 빠르고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돌발 퀘스트’를 위한 게임의 안배가 있긴 있는지, 곰은 어깨와 다리에 화살이 하나씩 꽂힌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른 사냥꾼들에게 쫓기다가 하필 최약체인 나를 맞닥뜨린 것 같았다.

“크허어엉-!”

화살과 피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곰이 살벌하게도 우짖었다.

살기등등한 눈이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 같았다.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는 게 보였지만, 나는 그게 조금도 다행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X발…….’

나는 좌절했다.

‘무슨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곰 사냥까지 해야 되냐고요!’

눈물을 머금고 [수락]을 눌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SYSTEM〉 가지고 있는 무기로 [빨간 점]을 타격하십시오!

~START!~
‘30’

“크우워어어어!”

네모 창에 새로운 글이 뜨는 것과 동시에 곰이 내게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악!”

나는 글을 제대로 읽어 볼 새도 없이 허겁지겁 석궁을 겨눴다.

다시 보니 네 발로 달려오는 곰의 머리, 몸, 다리 세 곳에 축구공만 한 빨간 점이 깜빡거렸다.

그리고 허공에 막 ‘29’로 떨어진 숫자가 보였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노멀 모드에서도 이러한 게임 속 ‘미니 게임’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기껏해야 틀린 그림 찾기나 퍼즐 맞추기였잖아!’

악녀로 빙의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왜 하드 모드는 주어지는 퀘스트마저 우악스럽기 그지없단 말인가!

천만다행이게도 다리의 부상이 큰지 곰이 달려오는 속도가 느렸다.

나는 그동안 연습해 온 것들을 되살려 깜빡이는 빨간 점을 겨눴다.

과녁의 크기가 커서 다행이었다.

우선 가장 맞추기 쉬울 것 같던 몸통 쪽부터.

철컥, 타앙-!

“쿠오오오오!”

달려오던 곰이 우뚝 멈춰서더니 괴성을 지르며 경련했다.

구슬이 적중해 충격이 가해진 탓이었다.

‘맞췄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장을 쓸어내렸다.

“하아, 하아…….”

나도 모르는 새 어찌나 긴장했는지 뒷목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이제 다 끝난 거겠지?’

나는 숨죽인 채 곰이 쓰러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맞췄는데도 성공했다는 퀘스트 창이 뜨지 않았다. 게다가.

‘21’

커다란 숫자가 여전히 허공에 뜬 채 카운트되고 있는 게 아닌가.

“크르으…….”

나는 허겁지겁 시선을 내렸다.

비틀거리던 곰이 조금 멍한 표정으로 한차례 투레질을 했다.

그러더니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크르르르!”

눈이 마주쳤다. 쓰러지긴커녕, 곰은 마주한 먹잇감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거대한 몸통에 있던 빨간 점 하나가 사라지고 남은 두 개가 계속 깜빡거렸다.

“설마…….”

식은땀 한 줄기가 이마를 타고 흘렀다.

‘세 개를 모두 맞춰야 되는 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즈음.

“쿠오오오오-!”

곰이 다시금 뛰어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구슬에 걸린 마법 때문에 찰나의 기억이 지워져, 순간적으로 다리의 고통을 잊은 것이다.

“어, 어…….”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에 나는 겁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침착함을 잃은 손이 자신도 모르게 마구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탕, 탕!

구슬이 몇 발 더 쏘아져 나가 맹수의 몸에 적중했다.

“크르르, 쿠워어어!”

방금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됐다.

충격으로 잠시 경련을 하던 곰은 몽롱한 표정으로 투레질을 한 후 나를 발견하고 다시금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육중한 무게로 인해 미약한 진동이 울렸다.

‘뭐야! 어떡해!’

이제 제한 시간은 ‘14초’가 남았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또다시 돌진하려 드는 곰을 예의 주시하며 빨간 점에 석궁을 겨눴다.

‘이거 좀 위험한 것 같은데.’

두려움이 슬금슬금 다리를 타고 올랐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화살 끝이 흔들렸다.

나는 숙련된 궁사가 전혀 아니었다. 때문에 과녁을 맞히려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나는 곰과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지는 것을 감수하고 뒷걸음질 치는 것을 멈췄다.

철컥, 타앙-!

간신히 머리 쪽에 있는 빨간 점 하나를 맞췄다.

“쿠워워어어!”

이번에는 타격이 컸는지, 곰이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쿠우우우웅-!

“하아!”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후다닥 몇 발자국 물러섰다.

‘9’

카운트다운은 어느새 채 10초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다리 쪽에 있는 빨간 점 하나만 맞추면 끝이었다.

헐레벌떡 석궁을 다시 쳐들었다.

그사이 곰이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 몇 번을 구슬에 맞았는데도, 참으로 괴물 같은 맷집이었다.

‘5’

이제 5초. 급박한 상황이었다.

나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서둘러 석궁을 겨눴다.

이제 마지막 한 번만 더 맞히면 되는데, 마지막답게 고난이도였다.

거대한 덩치의 곰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계속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빨간 점이 깜빡이는 다리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탕, 타앙-!

발사된 구슬이 아슬아슬하게 두터운 다리를 빗겨 나 땅에 맞았다.

‘3’

그사이 제한 시간이 끝나기 일보 직전이 됐다.

‘……그런데, 시간이 다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섬뜩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게임 시스템상 곰의 약점이 되는 [빨간 점]을 모두 맞춰야만 곰을 죽일 수 있는 거라면.

‘……퀘스트 실패한 후에도 저 망할 곰 새끼가 계속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시스템 창과 달리 내가 직접 겪고 구르는 이것은 현실이었다.

석궁에 몇 번을 맞아도 거대한 맹수는 죽지 않았다.

‘1’

그리고 마침내 카운트다운이 완료됐다.

타앙-!

머릿속을 점령한 생각 때문에 집중하지 못해 결국, 마지막 일격마저 빗겨 갔다.

〈SYSTEM〉 [거대한 곰 사냥하기] 퀘스트 실패!

또 한 번 도전하시겠습니까?

(제한시간 : 10초, 보상 : 거대한 곰 가죽과 쓸개, 명성 +50, [???]의 호감도 +5%)

[수락 / 거절]

퀘스트가 실패했다. 그리고 재도전의 제한 시간이 10초로 확 줄었다.

나는 그것에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빠르게 [수락]을 눌렀다.

“쿠워어어-!”

곰이 입을 쩍 벌리며 내게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시도에 이어 진행되는 건지 깜빡이는 빨간 점은 못 맞춘 마지막 다리 지점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전혀 다행스럽지 않았다.

‘저거 못 맞추면 죽는다.’

확실한 죽음의 예감이 목 밑까지 잠식했다.

석궁을 겨누는 데 집중하느라 곰과의 거리를 많이 벌리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다급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

“……어?”

그러나 아무것도 발사되는 것이 없었다.

볼트가 장착되는 홈이 텅 비어 있었다. 구슬을 다 쓴 것이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주머니에 여분의 구슬들이 담긴 천을 챙겨 왔지만, 꺼낼 수 없었다.

“쿠으어어어-!”

거대한 괴수가 한 치 앞까지 다가왔기에.

날카로운 발톱이 삐죽삐죽 달린 곰의 앞발이 높이 쳐들렸다. 그 크기가 내 얼굴보다 컸다.

당장 피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몸이 얼어붙기라도 한 양 꿈쩍도 하질 않았다.

후웅-!

거대한 앞발이 묵직하게 바람을 가르고 엄청난 속도로 내게 활강하던 그 찰나.

“히히이이잉-!”

“허리 숙여.”

어디선가 구원처럼 말 울음소리와 남자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에 최면에서 풀려나듯 몸이 움직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고, 간발의 차로 곰의 앞발이 정수리를 스쳐 지나갔다.

허공을 후려치는 맹수의 풀 스윙에 머리카락이 서늘하게 들썩였다.

스르릉, 푸욱-!

무언가를 쑤석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꾸워억-!”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짧은 단말마와 함께 거대한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쿠웅-!

온 숲을 뒤흔드는 듯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육중한 곰의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진 탓이었다.

땅바닥에 물처럼 주르륵 퍼지는 피가 내 신발 코를 적셨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괴물 곰의 목 한가운데에 커다란 장검이 깊게 꽂혀 있었다.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지?”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황금빛 머리카락이 찬란히 반짝였다.

“공작가의 미친개라더니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군.”

“…….”

“혼자서 이 큰곰을 잡으려 한 건가?”

타악-. 제 눈처럼 붉은 적마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내게로 다가오는 남자.

황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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