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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74화 (7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4화

‘2’
‘1’

장신의 남자 너머로 카운트다운이 모두 끝났다.

〈SYSTEM〉 제한 시간 초과로 인해 [칼리스토]가 등장하여 [거대한 곰]을 처치했습니다.

〈SYSTEM〉 [거대한 곰 사냥하기] 퀘스트 실패!

‘망할, 제한 시간이 남주 등장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냐고!’

나는 얕게 숨을 헐떡이며 황태자 너머로 떠오른 흰 네모 창을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보고 있는 거지?”

마침내 한 치 앞까지 도달한 황태자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픽, 웃었다.

“왜. 이제 와서 새삼 다시 반하기라도 했나?”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요.”

“내가 구해 주기까지 했는데 서운하군, 공녀.”

황태자가 전혀 서운하지 않은 표정으로 잘도 읊조렸다.

그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에 이상하게도, 빠르게 뛰는 심장이 찬찬히 진정됐다.

‘……하. 진짜 곰한테 후려 맞아 죽는 줄 알았어.’

구슬이 텅 비어 있는 홈과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던 곰의 거대한 앞발.

다시 한번 그 가슴 철렁이던 순간을 떠올리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천천히 호흡하며,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각해 보면 돌발 퀘스트를 실패했다고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게 더 당연했다.

그건 노멀 모드는 물론 하드 모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데릭 혹은 레널드와 함께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를 실패했다고 죽지는 않았으니까.

‘사냥 대회’는 게임의 주 에피소드 중 하나일 테니, ‘곰 사냥 실패’ 같은 위급 상황에 남주들 중 하나와 엮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근데 왜 하필 이놈이냐고…….’

나는 인사를 가장한 채 고개를 숙여 구겨진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 억지로 감사 인사를 짜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어요.”

“홀로 맹수 구역을 돌아다닐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용기가 대단해.”

짝, 짝, 짝. 황태자 놈은 감사 인사에 대한 답변 대신 뜬금없이 박수를 쳤다.

“머리통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야.”

“…….”

“하지만 공녀가 아무리 미쳐 날뛴다더라도 저 정도 크기의 곰을 여인 홀로 잡을 수는 없어.”

철부지 어린아이를 훈계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나는 불쑥 억울해졌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퀘스트가 시켰다고, 퀘스트가!’

답답해서 가슴을 치며 버럭 외치고 싶었지만, 놈의 머리 위 [호감도 12%]가 나를 막았다.

“저도 알아요.”

대신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황태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과장되게 놀란 행동을 취했다.

“안다고?”

“네.”

“오, 알고도 그랬던 거군. 내가 괜히 나서서 공녀의 사냥감을 가로챈 건가?”

“사냥감으로 잡으려던 게 아니라……!”

성질을 박박 긁는 놈의 어투에 버럭 반박하려던 나는 재차 참을 인을 새겼다.

“하…… 갑자기 곰이 나타나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

“원래는 여우를 쫓다가 길을 잃어버린 거라고요…….”

나는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쫓던 여우는 결국 놓쳐 버렸다.

사냥은커녕 미쳐 날뛰는 곰 잡다가 죽을 뻔한 것도 모자라, 사냥 대회 경계 대상 1호까지 만났다.

그러니 어찌 우울하지 않을쏘냐.

‘이게 다 이클리스 그 발칙한 놈 때문이야.’

그 망할 놈의 호감도 좀 얻어 보겠다고 이게 무슨 개고생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처지에 한탄하며 찔끔 나오는 눈물을 삼켰다.

“아무튼 구해 주셔서 황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그럼 전 이만.”

나는 서둘러 인사했다.

죽음에서 호감도가 멀어진 것과 관련 없이 어쨌든 황태자 놈이랑 엮여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었다.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던 순간.

“잠깐.”

황태자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저건 가져가.”

“무슨…….”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볼 때였다.

잡은 팔을 놓은 황태자는 불현듯 죽은 곰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곰의 두터운 목에 박아 넣었던 장검의 손잡이를 잡더니, 아래로 힘껏 잡아당겼다.

우득, 우드득-.

뼈가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얼마 후 곰의 머리가 몸통에서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미친…….’

나는 입을 벌린 채 그 엄청난 광경을 막연히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피가 잔뜩 묻은 칼을 한 번 털어 낸 후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뒹구는 곰의 커다란 대가리를 한 손으로 집어 든 채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아직 굳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져 흙 위에 점선을 그렸다.

“자, 받아.”

황태자는 대뜸 들고 온 괴물 곰의 머리를 내게 건넸다.

나는 마구 흔들리는 눈으로 놈이 건넨 것을 바라보았다.

황태자에게 급살당하는 바람에 눈도 감지 못한 곰의 대가리가, 아직도 살아서 나를 형형하게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이건…… 게임에서 설명해 주지 않은 결투 신청 방식인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죽인 동물의 목을 잘라 건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짧은 새 안간힘을 쓰며 기억을 되살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에서 이와 같은 장면을 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황금빛 정수리 위를 연신 곁눈질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에게는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검이 없어서…….”

검이 없으니 너와 결투는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영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니 내 친히 잘라 줬지 않나.”

“……네?”

“몸통은 무거워서 당장은 못 끌고 가니, 이거라도 가져가서 보여 준 후 시종들에게 끌고 가라 시켜.”

나는 그제야 그가 곰의 머리를 주는 이유가 ‘결투 신청’ 따위가 아님을 인지했다.

내가 그만 간다고 하니, 아무래도 내게 심부름을 시키고 본인은 사냥을 지속하려는 모양이었다.

‘못돼먹은 자식.’

어떻게 가녀린 레이디한테 이런 짓을 시켜 먹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피가 뚝뚝 흐르는 커다란 곰의 머리를 도저히 들고 갈 자신이 없었다.

“굳이 제가…… 해야 할까요?”

하여 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지?”

그러자 그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그대가 가져가야 곰을 직접 잡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네?!”

나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휘둥그레 떴다.

‘내가 가지고 가야 직접 곰을 잡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린지 한참을 되뇌던 나는, 그가 내게 사냥감을 양보하려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너무 뜻밖의 말이라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떨떠름하기만 했다.

“저는 별로 안 그래도 되는데요.”

지금도 가는 길마다 나를 향한 수군거림을 듣기 바쁜 마당에, 저 커다란 곰 대가리를 들고 가서 ‘홀로 곰을 때려잡은 공작가의 미친 침팬지’라는 악명까지 떨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리고 그게 왜 제 거예요? 황태자 전하께서 잡으신 거잖습니까.”

“그대가 기운을 거의 다 소진시켜 놓은 상태에서 숨통만 내가 끊은 것이지. 그러니 공녀가 잡은 것이나 진배없다.”

‘이놈이 이렇게 정상적인 말을……?’

나는 좀 전보다 더 새삼스러워진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다가,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전 정말로 필요 없어요. 제가 잡은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고요.”

“그럼 아까 전 받은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답례 얘기인지 어리둥절하던 중.

-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내 친히 공녀에게 어울리는 사냥감을 잡아다 주지.

놈이 내게서 애뮬릿을 강탈해 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찡그려지는 눈가에 억지로 힘을 줬다.

“보답도 괜찮아요.”

“그깟 여우보다 훨씬 값이 나가는 것이다. 멍청한 고집 부리지 말고 가져가.”

“멍청한 고집이 아니라…… 저기요, 조심 좀!”

내가 통 받지 않자 황태자는 짜증이 났는지, 사납게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강제로 떠넘기려는 듯 귀를 붙잡고 달랑달랑 흔들며 한 걸음 다가왔다.

아직 굳지 않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화다닥 물러섰다.

“옷에 피가 튀잖아요, 전하!”

“사냥꾼이 옷에 피가 묻으면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인 줄 알아야지.”

“저는 그런 자랑 필요 없다니……!”

“설마 피를 무서워하나? 의외인걸?”

그런 게 아니라고 답할 틈도 없었다.

놈이 히죽 웃으며 일부러 들고 있던 사체의 머리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악!”

나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놈에게서 물러났다.

재빠르게 피했음에도 재킷 안에 입은 와이셔츠에 핏방울이 튀었다.

비린내가 훅 풍겼다. 이래 봬도 비위가 엄청나게 약한 편이었다.

단순한 피만의 문제가 아니라, 놈이 들고 있는 동물의 머리 자체가 몸서리치게 싫고 무서웠다.

나는 한껏 경악을 담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어서 가져가래도.”

“악! 그만하시라고요!”

또다시 달랑달랑 머리를 뒤흔드는 미친 짓거리를 하는 놈의 행동에, 결국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

후다닥 거리를 벌리고 나무 뒤로 숨었을 즈음.

“하하.”

뒤쪽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황태자의 입가에 퍽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그 순간, 놈의 머리 위가 반짝이더니.

[호감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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