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5화
‘허…….’
3%나 오르는 호감도가 기가 막혀서 멍하니 놈과 놈의 머리 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을 부릅뜬 곰 대가리를 든 채 나를 응시하며 휘어진 빨간 눈매.
칼리스토의 몰골은 꼭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악마 같았다.
“……그게, 재밌습니까?”
“응. 에카르트의 미친개가 질겁을 하며 도망가는 꼴도 다 보고. 꽤 재밌는걸?”
“하. 죽은 동물의 사체로 굳이 그런 장난을 치셔야겠어요?”
“죽기 직전까지 석궁을 쏴 대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망할 놈.’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그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이마에 차가운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응?”
쿠르르릉-. 불현듯 사위가 어두컴컴해졌다.
황태자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하늘이 심상치 않게 변해 있었다.
먹구름이 순식간에 몰려와 해를 가렸다.
“소나기로군.”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그 불길한 말이 현실이 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뚝, 뚝.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방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전하, 다시 한번 구해 주신 건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황태자에게 허겁지겁 대충 인사를 건넸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숲속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이 빌어먹을 사냥터에 한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저벅저벅, 놈이 여전히 곰의 머리를 붙들고 그런 내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어딜 가는 거지?”
“사냥터 밖으로요.”
“곧 비가 쏟아질 텐데?”
“그러니 오기 전에 나가야죠.”
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놈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공녀는 여기가 맹수들을 잔뜩 풀어 놓은 깊은 숲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벌써 잊었나 봐.”
“…….”
나는 그를 무시하고 그냥 내 갈 길 가려 했다.
‘게임 제작자가 양심이란 게 있으면 이런 미친 돌발 퀘스트는 한 번만 배치해 뒀겠지.’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스치듯이 무언가가 떠올랐다.
[보상 : 거대한 곰 가죽과 쓸개, 명성 +50, [???]의 호감도 +5%]
‘[???]의 호감도……?’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를 만났지만, 보상에 황태자의 호감도가 적혀 있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놈이 날 구해 주리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고.
‘……그럼 숲을 빠져나갈 때까지 또 이런 돌발 퀘스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 아냐.’
게다가 보상 대상이 특정되지 않은 이상 황태자 말고도 또 다른 남주와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미친…….’
맹수를 잡는 돌발 퀘스트보다 놈들을 차례대로 만날 생각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야말로 진저리를 치며 우뚝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허겁지겁 여분의 구슬을 담은 천을 꺼낸 후 석궁을 돌려 메어 홈에 구슬을 끼워 넣었다.
또르르, 달칵. 또르르르, 달칵…….
“뭐 하는 거지?”
그런 내 모습에 황태자가 옆으로 바싹 다가와 물었다.
‘신경 끄고 네 갈 길이나 가라’라고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애써 내리 누르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볼트 장착 중입니다.”
“왜?”
“혹시 모르잖아요. 전하의 말씀처럼 가는 길에 맹수가 또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허.”
황태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조잡한 무기로는 대형 동물들을 상대할 수 없어, 공녀. 방금 겪어 보고도 모르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알아서 해 볼게요, 전하.”
나는 놈과 동행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차피 퀘스트대로만 하면 될 것이다.
게다가 숲을 활보하는 맹수들도 쏟아지는 비는 피할 것이니, 이건 어디까지나 대비용이었다.
“어제 운 좋게 마물 좀 잡았다고 기고만장해져 있나 본데.”
그러나 속사정을 모르는 황태자는 이런 내 행동이 퍽이나 무모해 보이는 듯했다.
“그 석궁은 소동물 혹은 인간에게나 먹힐 만한 무기야. 살상용은 더더욱 아니고.”
“…….”
“이번에야말로 진짜 산 채로 곰 밥이 되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겠어. 그러려면 나도 공녀를 따라가야 하는 건가?”
히죽 웃으면서 덧붙이는 놈의 잔인한 말에 오만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다 문득 놈이 석궁에 대해 낱낱이 꿰뚫어 본 사실에 좀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뭐가?”
“제 석궁이 살상용이 아닌 거요.”
“느껴지는 마력이 그 정도뿐이니까. 그러니 황궁 반입도 허용될 수 있었던 거겠지.”
새삼스럽게 그를 보던 중이었다.
쏴아아아-.
거짓말처럼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
나는 기가 막혀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야…….’
비가 많이 오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겠다는 계획은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럴 새도 없이 굵직한 장대비부터 쏟아져 내렸으니까.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보자니, 다시 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비 맞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이도 저도 못 한 채, 그저 우두커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는 찰나였다.
풀썩- 머리 위에 묵직한 무언가가 덮어 씌워졌다.
“그거 쓰고 이리 와.”
불현듯 손목에 온기가 느껴졌다. 남은 몇 걸음마저 따라잡은 황태자가 내 손목을 살며시 붙들었기 때문이다.
“어…….”
황태자는 자신의 말이 있는 곳까지 나를 이끌었다.
말은 똑똑하게도 가지가 무성한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기어이 말의 안장 가장 앞에 자른 곰 대가리를 올려 두었다.
그리고 이어서 저 또한 훌쩍 그 위로 올라탄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타.”
젖은 금빛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입고 있던 붉은색의 망토를 벗어 준 탓에, 그는 어느새 비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걸어서 가다가는 맹수 밥이 되기 전에 고뿔부터 들릴 거야.”
“…….”
“그건 방수와 방한 마법이 걸려 있는 망토이니, 쓰고 같이 돌아가지.”
나는 내게 내밀어진 남자의 커다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 내 위에 대충 올려진 그의 붉은색 망토로 시선을 내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 머릿속에 황태자와 같이 말을 타고 돌아가는 선택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기에.
“저한테…… 주셔도 돼요? 전하께서는요?”
“쥐새끼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건가? 싫으면 석궁 쳐 들고 걸어오든지.”
놈이 팩 고개를 돌리며 싸가지 없이 말했다.
‘두 번 권하면 입에 가시라도 돋니?’
나는 속으로 비꼬면서도, 허겁지겁 석궁을 뒤로 돌려 메며 황태자가 씌워 준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신장 차이가 꽤 난다고는 생각했지만, 놈의 망토는 무슨 이불이라도 덮은 것처럼 컸다.
때문에 잘 여미지 않은 상태로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다 보면, 펄럭거리다 어디 걸릴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침내 목 아래 그의 망토를 잘 묶은 나는 작게 감사 인사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내게 내밀어진 황태자의 손은 여전히 거둬지지 않은 상태였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커다란 손을 맞잡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이익-.
숲 저편 어딘가로부터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퍼억-!
그리고 그것은 오차 없이 황태자의 가슴에 꽂혔다.
“히히이이잉-!”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말이 앞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나를 향해 뻗어져 있던 손이 사라졌다.
“……전하?”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황태자.
그를 바라보는 내 눈이 서서히 커졌다.
“저…… 전하!”
마침내 그가 바닥에 처참하게 처박혔을 때, 나는 정신없이 그에게 달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눈이 감겨진 황태자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사람이 죽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곰을 맞닥뜨렸을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공포가 눈앞을 엄습했다.
“전하! 전하, 눈 좀 떠 보세요!”
나는 미친 듯이 황태자의 몸뚱이를 흔들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미동이 없었다. 그의 왼 가슴에 꽂힌 커다란 화살.
무서워. 무서워.
이건 게임이잖아. 게임일 뿐인데, 대체 왜……!
울음이 튀어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잔혹한 장면은 사고를 정지하게 만들었다.
“전하! 제발, 제발 정신 좀……!”
“……시끄러워.”
천만 다행히도 아직 죽은 것은 아닌지, 눈꺼풀이 움찔움찔하더니 붉은 동공이 드러났다.
“호들갑 떨지 마. 아직 안 죽었으니까.”
“저, 전하!”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뒤늦게 남주가 죽을 리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칼리스토가 화살에 맞는 모습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서, 그 순간엔 그가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아무리 엑스 친 놈이라도 내 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울먹이는 나를 바라보며 황태자 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대가 준 것이 효과가 아예 없진 않은 모양이야.”
그러더니 왼 가슴에 박힌 화살을 쑥 뽑아내어 건넸다.
“이건…….”
얇고 동그란 작은 토큰 모양의 장식.
화살촉에 박혀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놈이 내게서 강탈해 간 황금색의 애뮬릿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