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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76화 (7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6화

날카롭고 튼튼한 화살을 막기에 애뮬릿은 너무 얇았다.

하지만 정말로 방어 마법의 효능이 발동되긴 했는지, 그것은 본래의 황금빛을 잃고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나는 묘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물었다.

“이거…… 안 버리셨어요?”

당연히 버릴 줄 알았다. 날 골리기 위해 억지로 빼앗아 간 것이라 여겼기에.

의아하다는 내 표정에 황태자가 한쪽 눈썹을 위로 휙 쳐들었다.

“버리다니? 한때 연모의 감정을 나눈 이가 준 정표를 그리 다루면 쓰나.”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퍽!

또다시 어디선가 화살이 비를 가르며 날아와 앉아 있는 머리 위 나무 밑동에 박혔다.

“악!”

나는 놀라서 반사적으로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황태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비가 또 지랄병이 도졌나 보군. 어서 일어나, 공녀. 피해야 해.”

“네?”

그가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따라 일어나면서도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는 왜요?”

“그럼 여기 가만있다가 화살 맞고 뒈지고 싶은 건가?”

“황비마마가 보낸 사람들이라면 전하를 노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전하만 다른 곳으로 가시면…… 꺄악!”

나는 ‘나를 놓고 너만 가라’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황태자가 나를 망토로 둘둘 만 채 번쩍 안아 들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화살을 맞고 말 위에서 떨어진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힘이었다.

놈은 나를 짐짝처럼 말의 안장 위에 턱 얹었다.

철퍽. 그 바람에 올려 두었던 곰 대가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황당해서 따져 물었다.

“헛소리 좀 작작 해, 공녀. 황태자를 암살하러 온 놈들이 하나뿐인 목격자를 보고 퍽이나 고이 돌려보내 드리겠군.”

황태자가 짜증스럽게 뇌까리며 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랴!”

그리고 그는 두 팔 사이에 나를 가둔 채 말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히이이이잉-!”

적마가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휘익, 휘이이익- 퍽, 퍽.

그와 동시에 이번엔 옆쪽에서 표창 2개가 교차되어 날아왔다.

“쯧.”

황태자는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숙여서 그것들을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나를 보호하듯 품 안에 더 꽉 껴안았다.

급박한 상황 때문인지, 그게 썩 감동스럽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망할…… 이젠 하다못해 암살에까지 휘말리는 거냐고.’

나는 이 미친 게임의 개연성에 이제 그냥 울고 싶었다.

먹구름이 낄 때,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놈의 곁에서 멀어졌어야 했다.

두두두두, 거세게 내달리는 말과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황태자의 등 너머로 쫓아오는 한 무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휘익, 휘익, 그쪽으로부터 연달아 화살과 표창이 날아왔다.

챙캉-!

황태자가 엄청난 반응 속도로 검을 빼내 날아오는 화살과 표창을 쳐 냈다.

“제기랄.”

계속해서 퍼부어지는 공격을 쳐 내며 도망을 치기가 여의치 않은지 황태자가 나지막이 욕설을 뇌까렸다.

“위험하니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 공녀.”

챙-!

칼리스토가 또 한 번 화살을 쳐 내며 낮게 읊조렸다.

맞닿은 그의 몸이 긴장으로 조여진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바짝 긴장했다.

아무리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죽지 않을 만큼 다칠 수는 있었기에.

‘게다가 이거, 퀘스트도 아니야.’

리셋이 없는 이상 내게는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서서히 두려움이 발끝을 적시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비 내리는 숲길에서 치열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점점 정체 모를 습격자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검은색 복면과 암복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인간들. 누가 봐도 암살자들이었다.

문득 일전에 2황자의 탄신 연회 때 황태자가 끌고 온 암살자의 목을 베었던 경악스러운 장면이 떠올랐다.

‘……황태자는 이런 일이 잦은 건가? 노멀 모드에선 전혀 안 나왔었는데.’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지더니,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냥제의 퀸이 되어 보자!~

[두 번째. 암살자로부터 황태자 지키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목표물 : 암살자 20명, 보상 : 암살자의 증표, 칼리스토의 호감도 +10%, 명성 +50.)

[수락 / 거절]

황태자의 등 뒤로 느닷없이 하얀 네모 창이 나타났다.

“하…… 하하…….”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초탈하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노했다.

‘난 퀸 같은 거 되기 싫다고! 게다가…… 20명?!’

당장이라도 [거절]을 수없이 연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호감도가 무려 ‘10%’였다.

노멀 모드에서는 말만 몇 번 섞으면 올릴 수 있지만, 하드 모드에서는 상상도 못 할, 무려 10%.

〈SYSTEM〉 메인 퀘스트이므로 5초 후 자동 수락됩니다.

〈SYSTEM〉 5

〈SYSTEM〉 4

나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석궁을 앞으로 둘러메며 쏠 준비를 했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품에서 꿈틀거리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황태자가 딱딱하게 주의를 줬다.

“……전하.”

나는 음울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저 석궁 있잖아요.”

나는 망토 자락을 슬쩍 들춰 보이며 어느새 가슴 앞으로 돌려 멘 석궁을 보여 줬다.

“제가 쫓아오는 놈들 다 쏴죽일 테니까 엄호만 좀 해 주세요.”

“공녀, 그게 무슨…….”

칼리스토가 무어라 말을 건네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는 그것을 들을 틈이 없었다.

마침내 5초의 유예가 지나 버렸기에.

〈SYSTEM〉 퀘스트가 자동 수락됩니다.

‘(0/20)’

네모 창 안의 흰 글씨가 숫자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황태자의 품에 안온하게 움츠려 있던 몸이 벌떡 솟구쳤다.

이어서 그의 넓은 어깨를 팔꿈치 지지대로 삼은 후,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크랭크를 마구 돌려 장전했다.

달칵. 방아쇠에 도르레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기 무섭게 한쪽 눈을 감고 암살자를 조준했다.

장대비가 쏟아져 시야를 가리는 것과 말의 움직임으로 인한 들썩거림은 내게, 아니, 시스템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암살자 한 놈이 솟아오른 나를 보고 활을 마주 조준하려는 찰나.

철컥, 방아쇠에 걸쳐진 검지가 곧장 움직였다.

타앙-!

“윽!”

조준했던 암살자가 말 위에서 휙 사라졌다.

‘맞았다!’

구슬은 오차 없이 적중했다. 말에서 굴러떨어진 놈이 충격에 덜덜덜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희열을 느낄 새도 없었다.

철컥, 탕-! 탕, 타앙-!

내 몸은 곧장 다른 놈들을 저격하여 쏘기 바빴기 때문에.

“윽!”

“아악!”

“억!”

‘(7/20)’

방아쇠를 당기는 족족 쫓아오던 놈들을 맞췄다. 순식간에 7명을 처치했다.

바싹 추격하던 놈들이 말 위에서 우르르 떨어져 땅을 기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암살자 놈들이 당황한 걸까.

휘이익, 휙-. 화살이 떼거지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퍽, 퍽!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간 화살들이 나무에 살벌하게 꽂혔다.

하지만 통제를 잃은 몸은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도 굴하지 않고, 마구 석궁을 쏴 댔다.

철걱, 탕! 탕, 타앙-!

‘(10/20)’

아슬아슬하게 화살이 관자놀이를 스치는 순간, 나는 3명의 암살자를 추가로 처단했다.

‘작작 해-!’

그쯤 되자 나는 이 퀘스트가 정말로 암살자를 처치하려는 건지 나를 처치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불현듯 옆쪽에서 싸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시스템에 점령된 몸이 그쪽으로 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철컥, 탕-!

“으악!”

대열을 나눠 사방에서 접근하는 중이었는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나무 위에서 한 놈이 바닥으로 확 떨어졌다.

그 순간.

“공녀!”

황태자가 와락 내 허리를 끌어 내려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휘익-!

“윽.”

황태자가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의 왼 어깨에 표창이 꽂혀 있었다.

“전하!”

옆쪽으로 접근하던 암살자 중 한 놈이, 황태자가 칼을 들고 있지 않은 왼쪽을 노려 표창을 던진 것이다.

타앙-!

마저 그놈을 쏴 맞힌 후 다시 허리를 번쩍 일으키며 석궁을 조준했다.

“괘, 괜찮으세요, 전하?”

정신없이 석궁을 쏴 대면서도 나는 솔직히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상처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쉴 새 없이 휘둘리는 몸에 의해 그럴 수 없었다.

“안 괜찮으면 어쩌게?”

꽤 고통스러운지, 황태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곧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신경 쓰지 마. 경량 갑옷을 입고 있어 깊게 박히지는 않았다.”

챙-!

황태자가 한 번 더 날아오는 표창을 칼로 쳐 내며 대꾸했다.

나는 깊게 안도했다. 그리고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 엮이게 만든 원망을 조금 털어 냈다.

방금 전에 그가 나를 끌어안지 않았다면, 표창을 맞는 것은 내 머리통이 되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감사해요.”

나는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그나마 입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황태자가 삐딱하게 지껄였다.

“어떻지? 이 정도면 공녀가 원래 내게 답을 주기로 했던 연모의 연유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나?”

“전 한 번 아닌 건 아니라서요.”

“그거 참 애석하군.”

칼 같은 답에 놈이 혀를 찼다.

또 헛소리하는 걸 보니 멀쩡한 듯했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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