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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77화 (7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7화

탕, 타앙! 탕! 탕-!

이후로도 나는 황태자의 엄호를 받으며 정신없이 석궁을 왔다.

재빠른 암살자들은 커다랗고 움직임이 둔했던 마물과는 달랐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의 위력이란, 석궁을 쏘는 족족 백발백중이었다.

20개를 장착했던 구슬이 착실하게 줄어들수록 암살자들의 수 또한 착실하게 줄었다.

이제 남은 것은 4명.

‘(16/20)’

타앙!

“공녀. 수가 얼마나 남았지?”

불현듯 황태자가 물었다.

막 한 명을 추가로 더 맞추며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 세 마리쯤 남은 것 같은데…… 왜요?”

“막다른 길이야.”

“히이이잉-!”

그 순간, 쉴 새 없이 내달리던 말이 급정거했다.

눈을 굴려 주변을 확인하니, 좁다란 절벽 끝이었다. 말을 돌리기도 힘든 폭이었다.

“어차피 근접한 상태에선 저놈들도 활을 쏘기 어려울 테니 나머지는 내려서 처치하는 게 좋겠어.”

황태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번쩍 들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본인 또한 훌쩍 뛰어내렸다.

보이는 암살자가 없으니, 시스템에 강제됐던 몸이 잠시 풀렸다.

그러나 아직 세 명이 남았기에, 나는 석궁을 바짝 쳐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위험하니 뒤에 있어.”

황태자가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뜻밖의 남주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퀘스트는 무려 [암살자로부터 황태자 지키기]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뒤에서 나와 대등하게 옆에 섰다.

“괜찮아요. 제 몸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전하께서는 옥체 보전하시는 데 전념하세요.”

놈이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나만 노리는 것이니 가 버리랄 땐 언제고, 퍽 든든하군 그래.”

“…….”

나는 좀 뜨끔해서, 그냥 무시하고 숲 쪽을 바라보았다.

숲은 고요했다.

어느새 약해진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를 제외하고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물기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잔머리들을 떼어 내며 허공에 떠 있는 흰 글씨를 노려보았다.

‘(17/20)’

빨리 나머지 세 명을 마저 처치하고 이 지긋지긋한 퀘스트를 끝내고 싶었다.

그때였다.

휘익-!

낭떠러지 바로 앞 수풀에서 황태자 쪽으로 여러 개의 표창이 날아왔다.

챙, 챙-! 황태자는 능히 날아오는 것들을 쳐 냈다.

그러나 교란 작전이었는지, 그것들을 쳐 냄과 동시에 두 놈이 수풀에서 확 튀어나왔다.

단검을 빼든 놈들은 곧장 표창들을 아슬아슬하게 모두 쳐 낸 황태자 쪽으로 달려갔다.

“전하!”

깜짝 놀라 외치기 무섭게, 시스템에 점령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철컥, 타앙-!

“으윽!”

구슬에 맞은 한 놈이 고꾸라진 채 벌벌 경련했다.

챙-! 그러나 나머지 한 놈과 황태자의 칼이 맞부딪혔다.

나머지 놈마저 쏴 맞추기 위해 곧장 이어 조준을 하던 중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격돌에 남아 있는 놈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일부러 시차를 둔 것인지, 한 놈이 쓰러지자마자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지막 암살자가 기다란 검을 빼 들고 튀어나왔다.

“죽어라, 계집!”

그런데 놈이 노리는 것은 황태자가 아니라 나였다.

시스템이라고 모든 변수에 최적화 된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와 겨루고 있던 놈을 조준 중이었던 내 몸은 한 박자 늦게 나를 덮치는 괴한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제길! 피해, 공녀!”

황태자의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철컥, 탕-! 방아쇠를 당겼다.

구슬이 쏘아져 나가는 그 찰나, 암살자가 휘두르는 칼 또한 한 치 앞으로 다가왔다.

놈은 분명 내가 쏜 구슬에 맞고 쓰러지겠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운 상태였다.

이미 한 번 겪었지만, 시스템은 내가 죽든 말든 석궁을 쏘기만을 실행할 뿐이다.

때문에 허공을 가르며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예리한 칼을 피할 수 없었다.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그러나 그 순간, 단단하고 커다란 것이 나를 와락 감싸 안았다.

강한 힘과 묵직한 무게에 거칠게 뒤로 떠밀릴 즈음.

푸욱-.

“으윽.”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빗물에 젖은 금발이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검을 겨루던 놈을 내팽개치고 달려와 나를 감싸 안은 황태자의 것이었다.

그의 등 뒤에 꽂혀 있는 칼과 내가 쏜 석궁에 맞아 쓰러지는 암살자.

“이제 끝이다-!”

그리고 완전히 끝을 내기 위해 달려오는 또 다른 놈의 모습이 차례대로 보였다.

그 모든 과정들이 영원처럼 천천히 진행됐다.

“아…….”

나는 다급히 나를 덮치느라 힘 조절을 하지 못한 황태자의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내 몸은 절벽 끝으로 속절없이 밀렸다.

“공녀, 미안한데.”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바짝 껴안은 황태자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우리 지금 떨어지기 직전인 것 같군.”

머리끝이 쭈뼛 섰다.

등 뒤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찔한 감각이 온몸을 엄습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그 찰나에도, 석궁을 든 내 손은 자동으로 움직여 황태자의 어깨 너머를 겨눴다.

탕-!

“으악!”

‘(20/20)’

마지막 남은 놈마저 처치했을 무렵.

〈SYSTEM〉 ~메인 퀘스트 : 사냥제의 퀸이 되어 보자!~

[두 번째. 암살자로부터 황태자 지키기] 퀘스트 성공!

〈SYSTEM〉 보상으로 [암살자의 증표], [칼리스토의 호감도 +10%], [명성 +50]을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130)

‘미친.’

하늘 대신 하얀 글씨들을 배경 삼은 채, 나와 황태자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쏜살같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 * *

타닥, 타닥.

어디선가 장작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으…….”

나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제일 먼저 일렁이는 불꽃이 보였다.

그 뒤로 낯선 암벽 또한.

“여기가 어디…….”

나는 두 팔에 힘을 주고 비척비척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그 순간 내 위에 덮여 있던 천이 흘러내리면서 피부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헉.”

무심결에 고개를 내리던 나는 훤히 드러난 어깨에 눈을 부릅떴다.

허겁지겁 천 안을 살펴보니 나는 속옷만 입은 채로 벌거벗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위에 덮여 있는 천은, 황태자의 붉은 망토였고.

“이, 이게 무슨…….”

“깼나?”

그때, 저편에서 묵직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곳저곳 흉터가 새겨진 단단한 가슴, 울퉁불퉁한 복근.

그렇다. 황태자가 상체를 벌거벗은 채 이쪽으로 당당히 걸어왔다.

“꺄악! 뭐, 뭐 하는 거예요!”

나는 뒤늦게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경악했다.

“뭐가?”

“왜 옷을 홀딱 벗고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그는 들고 온 장작들을 피워 놓은 모닥불 옆에 우르르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럼 젖은 옷을 입은 채로 계속 돌아다녀야 하나? 난 그러기 싫은데 어쩌지.”

슬쩍 내게 눈짓한 놈이 히죽거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홀딱 벗은 건 공녀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이, 이 저질스러운……!”

“그렇게 손가락 다 벌리고 보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그냥 대놓고 보지 그래?”

“크흠!”

나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러자 놈이 비웃음 담긴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억울해졌다.

‘혹여 눈 가린 사이에 네놈이 흑심이라도 품을까 봐 그런 거라고!’

절대로 놈의 상체를 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절. 대. 로.

나는 황태자의 망토를 바짝 여미며 놈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제, 제 옷도 전하께서……?”

“뭐.”

놈이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했다.

“덕분에 이제 볼 거 다 본 사이가 됐지.”

“제발 그런 끔찍한 소리 좀 그만하세요.”

나는 놈의 대꾸에 진저리를 쳤다.

황태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힘들게 살려서 데리고 온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러게 왜 허락도 없이 레이디의 몸에 손을 대고 그러십니까?”

“그럼 고뿔에 걸려서 뒈지든 말든 가만 내버려 뒀어야 했나?”

“네.”

“뭐?”

“신사의 도리를 지키며 그냥 내버려 뒀어야죠. 아니면 깨우시든가요.”

“허.”

당당한 내 대답에 놈이 헛웃음을 짓다가 툭 내뱉었다.

“볼 것도 없으면서.”

“지금…… 뭐, 뭐라 하셨습니까?”

나는 놈의 어마어마한 발언에 기가 막혀서 말을 더듬었다.

“볼 것도 없다고 했다.”

“보, 볼 게 없긴 왜 없어요!”

“그럼 볼 거 많이 있나? 사실 동굴이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는데, 지금이라도 같이 확인해 볼까?”

“이……!”

나는 튀어나오는 욕설을 가까스로 삼켰다.

‘참아야 하느니……. 놈은 엑스 친 황태자야, 황태자. 황태자가 누구냐면 호감도 2%…….’

‘참을 인’을 새기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문득 눈에 띈 흰 글씨에 눈이 커졌다.

[호감도 25%]

변한 황태자의 호감도에 잊고 있었던 퀘스트가 떠올랐다.

〈SYSTEM〉 보상으로 [암살자의 증표], [칼리스토의 호감도 +10%], [명성 +50]을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130)

황태자의 호감도가 죽음으로부터 꽤 많이 멀어졌다.

결국, 그 빌어먹을 퀘스트를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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