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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78화 (7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8화

멍하니 칼리스토의 머리 위를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전말을 물었다.

“우리…… 어떻게 된 거예요? 절벽에서 떨어졌잖아요.”

“절벽 아래 폭포가 있었다. 강물에 빠진 덕에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지.”

황태자는 나뭇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기절한 그대를 둘러메고 나오니, 근처에 이 동굴이 있더군.”

나는 그제야 주변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았다.

우리는 현재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은 상태였다.

어느새 비는 멈춘 것 같지만, 입구 밖은 해가 저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청량한 물소리만이 폭포가 있다는 말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꽤 깊은 굴인지, 안쪽 너머로 컴컴한 어둠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 맹수의 영역이면 어쩌지? 아니면 뱀이라든지…….’

꽤 현실적인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손을 더듬어 옆에 놓여 있던 석궁을 찾았지만, 곧 암살자들을 죽이느라 구슬을 다 쓴 사실이 떠올랐다.

“동물의 은신처는 아니야.”

퍽 불안한 얼굴로 보고 있었는지, 황태자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그대가 잠든 사이 대충 훑어봤는데 이상할 정도로 텅 빈 곳이더군.”

“……여기가 어디쯤인지 아세요?”

나는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해가 저물어 이동하지 못한다 치더라도, 날이 밝으면 빨리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황궁 출신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그는 무참히도 고개를 내저었다.

“매번 사냥 대회를 북쪽 숲에서 개최했지만, 이런 곳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난리가 났겠네.’

사라진 나와 황태자로 인해 뒤집어졌을 숲 밖을 예상하며, 착잡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볼 때쯤이었다.

모닥불에 비친 그의 한쪽 어깨 위에 핏자국이 말라붙은 상처가 보였다.

표창에 맞은 곳이었다.

그와 동시에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그가 암살자의 검에 찔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놈 때문에 가만있던 나까지 휩쓸려 암살당할 뻔한 것이지만……

그래도 나를 대신해서 다친 것이 신경 쓰였다.

“이제야 묻는 건가? 퍽이나 일찍도 물어봐 주는군. 눈물 나게 고마워.”

빈정거리는 놈의 말에 좀 민망해졌다.

사실 남주가 죽을 리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크게 다치셨어요? 어디 좀 봐요.”

“됐어.”

상흔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를 놈이 쌀쌀맞게 저지했다.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깊게 박히지 않았다. 피만 조금 본 것뿐이야.”

다행이었다. 하지만 피가 났다는 말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빨리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

“걱정이 되긴 하나 보지?”

“당연하죠.”

나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물론 놈을 향한 걱정은 아니었다.

“제 앞에서 죽지 마세요.”

내가 걱정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기에.

‘죽으려면 딴 데 가서 죽어. 내 앞에서 죽지 말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그가 묘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뒤늦게 내 말이 그에게 이상하게 들릴 여지가 있음을 깨닫고,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꼭 절대 죽지 말란 소리처럼 들리잖아!’

나는 당황해서 허겁지겁 말을 돌렸다.

“그리고…….”

“…….”

“늦었지만,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쨌든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빌어먹을 퀘스트와는 별개로 칼리스토가 나를 대신해 다쳤다는 것을.

게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에도 내팽개치지 않고 나를 여기까지 구해 온 것 또한.

‘……이제 만나면 큰일 나는 수준에서는 좀 벗어난 건가?’

목에 칼을 들이밀며 마지막 인사를 하라던 미친놈 같았던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던 중, 시뻘건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놈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좀 멋쩍어져서 먼저 시선을 돌리던 찰나였다.

[호감도 27%]

호감도가 상승했다. 그가 입꼬리를 픽, 비틀어 올렸다.

“그렇게 감사하면 내게 다시 반하도록 해.”

나는 또 시작된 놈의 집요함에 와락 오만상을 찌푸렸다.

“또 그 소리세요?”

“이번에야말로 공녀가 날 좋아하게 된 연유에 딱 알맞은 계기가 아닌 가?”

“전혀요.”

나는 즉답했다. 그러다가 너무 답답해서 되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제 연유를 듣는 것에 집착하시는 거예요?”

‘연유를 말해 주기로 하는 약속을 잊지 말라’는 협박 편지까지 보낼 정도로 놈의 집착은 끝을 달렸다.

내 물음에 황태자는 나보다 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말로 공녀가 왜 그날 뜬금없이 날 쫓아와 사랑 고백을 했는지, 궁금해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그, 그건…….”

‘리셋 버튼’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한번 죽어 보려고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한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그런 헛소리를 한 내 과거에 피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땐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죄송해요, 전하.”

“허.”

황태자가 차게 조소했다.

“그 연유 하나 듣자고 쇳독이 낫기를 몇 주나 기다려 주었더니, 갑자기 낯을 바꾸고 싫어졌다는데 공녀 같으면 안 억울하겠나?”

그 쇳독이 대체 누구 때문에 걸린 줄 아느냐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날의 그 끔찍한 기억을 더는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놈의 과도한 매도만 정정했다.

“……싫다고는 안 했어요.”

“그럼 아직 좋다는 건가?”

“아니요!”

나는 치를 떨며 다시 말을 바꿨다.

“그럼 갑자기 싫어지게 된 연유도 같이 물어봐 주세요.”

‘그 연유에 대해선 온종일 네놈과 얘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황태자가 이를 드러내며 귀신처럼 씨익 웃었다.

“황족 모독으로 황궁 지하 감옥의 고문실에서 단둘이 대화 나누기 딱 좋은 주제야. 그렇지?”

‘무서운 새끼…….’

나는 아연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한차례 동굴 안에 서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일렁이며 춤을 추는 모닥불 끝을 멍하니 바라보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왜 싫어진 건데?”

고요했던 황태자가 불쑥 물었다.

“……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냐고.”

“황족 모독이라면서요.”

“이번 한 번은 봐줄 테니까, 어디 한번 지껄여 봐.”

나는 얼떨떨하게 놈을 바라보다 이내 찬찬히 얼굴을 구겼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그렇다면 이놈은 천하의 몹쓸 놈이었다.

“절 죽이려고 하셨잖아요.”

봐준다고 했으니, 나는 과감하게 그 이유를 쏴붙였다.

애당초 ‘엑스’를 수도 없이 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나를 죽이려 드는 미친놈을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황태자는 내 대답에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내가, 언제……?”

이렇게 황당할 수가 없었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나는 버럭 외쳤다.

“그날요, 2황자님의 탄신 연회 날! 미로 정원에서 황태자님이 칼로 제 목을 치려고 했잖아요! 그것 때문에 제가 얼마나……!”

온갖 악몽을 꾸며 며칠을 끙끙 앓았었다.

목에 붕대를 둘둘 감고 다니는 모습이 오죽 병자 같았으면 공작도 데릭도 큰 꾸지람 없이 넘어갔다.

“그건…….”

내 말에 황태자가 드물게 당황한 낯을 했다.

“……진짜 죽이려고 한 건 아니다.”

‘X랄 마.’

나는 차마 입으로는 내뱉을 수 없어, 내 생각이 여과 없이 드러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게임을 할 때 미로 정원에서 하도 죽어서 황태자 루트를 진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땐 기분이 정말 개 같았을 때였다. 눈에 뵈는 게 없던 상태라, 앞에 나타난 게 누구라도 칼을 뽑아 들었을 거야.”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황태자가 변명하듯 읊조렸다.

“그래도 공녀가 날 좋아한다는 소리에 흥미가 생겨서 잘 살려 놨지 않나?”

“……정말이지 손발이 벌벌 떨리고 눈물이 줄줄 날 만큼 황송하네요, 전하.”

“비꼬는 건가?”

“그럴 리가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대화를 단절하려는 내 태도에도 황태자는 도무지 끝이란 걸 몰랐다.

“그럼 왜 반하게 됐는지도 말해 봐.”

“하…… 그때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외모가 출중하시고, 용맹하고, 칼을 잘 쓰셔서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내가 눈이 없는 병신인 줄 아나?”

내 성의 없는 태도에 황태자가 붉은 눈을 번뜩였다.

“내 얼굴만 보면 그따위 표정을 지으면서,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제 표정이 어때서요?”

“개똥이라도 씹은 얼굴이잖아.”

“…….”

너무 제대로 봐서 할 말이 없었다.

말을 잃은 나를 보며 황태자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설득했다.

“솔직히 말해 봐. 누가 내게 그런 고백을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했나?”

나는 생각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내가 그때 왜 그따위 막말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연유를 자꾸 추궁해 봤자 대체 무슨 대답을 하냔 말이다.

“…….”

나는 거의 나를 쏴죽일 듯 들끓는 눈으로 바라보는 황태자를 황망하게 마주 보다가, 체념조로 아무 말이나 털어놨다.

“……머리 색이 예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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