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9화
황태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
“……전하의 귀환 축하 연회에서 봤을 때 말이에요.”
나는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용케 첫 만남을 바꿔 말했다.
기실 내가 황태자를 처음 본 것은 2황자의 탄신 연회 때였지만.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날의 황태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레드 카펫을 당당히 가로지르던 장신의 남자.
“머리카락이 샹들리에 빛에 반사돼서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게 꼭 황금 가루가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그가 질질 끌고 오던 암살자를 발견하기 전까진, 참으로 황족다운 외모라고 생각했다.
일러스트로만 보던 황태자의 현실 모습은 충격적일 만큼 고결하고 위압감 넘쳤다.
나는 그때 내가 느꼈던 감상을 여지없이 내뱉었다.
“게다가 눈은 꼭 상등품 루비를 박아 놓은 것 같아서, 부티가 나 보였어요.”
“부…… 티?”
내 말에 황태자가 기가 막힌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그게, 내게 첫눈에 반한 이윤가?”
“사람이 돈 좀 있어 보이면 좋잖아요.”
진짜 반한 것은 전혀 아니었으므로 나는 긍정대신 적당히 에둘러 답했다.
“제가 원래 보석을 좀 좋아해요. 물론 황금도요.”
“허.”
그토록 고대하던 연유가 황당하기 그지없었는지, 황태자는 연신 헛바람을 터뜨렸다.
“그대는 정말…….”
황태자는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상한 여자군.”
“……?”
“정말 이상해.”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 위가 반짝였다.
[호감도 29%]
이상하다면서 호감도가 오르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네가 더 이상하거든?’
괜히 욕을 얻어먹은 것 같은 찝찝함에 나는 뚱하게 물었다.
“이제 됐죠? 전 다 말했으니까, 이제 더 묻지 마세요.”
“……하.”
황태자는 한참 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턱짓하며 말했다.
“……동이 트면 바로 숲을 빠져나가야 하니 그만 잠자리에 들지.”
내가 지어낸 연유에 대해 대충은 납득한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전하.”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나는 바로 등을 돌리고 누웠다.
뒤에서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체했다.
‘드디어 해방이다!’
나는 마침내 놈의 집착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내가 황태자의 망토를 덮고 있었으므로, 뒤늦게 그는 바지만 입은 채 맨몸뚱이로 자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알 바 아니지.’
기절했다가 깨어난 상태였음에도 나는 몹시 피곤하고 지쳤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엄청나게 스펙터클했다. 이른 아침부터 대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매일 이런 식으로 게임을 진행하다가는 호감도를 얻기도 전에 요절할 것 같았다.
‘아냐! 요절은 무슨!’
나는 불길한 상념들을 마구 털어내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애써 눈을 꾹 감고 초원에 널려있는 양을 상상하며 개수를 셌다.
‘9, 10, 11, 12…….’
양의 수를 셀수록 점점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던 중이었다.
‘11…… 10…… 9…….’
초원 위에 뿅뿅 생겨나던 양들이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둑, 우드두둑-.
거대한 무언가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양부터 하나하나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잔디밭을 거닐던 양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 들어갔다.
마침내 양을 모두 잡아먹고 거대한 무언가가 피를 뚝뚝 흘리며 내 앞에 다가왔다.
그것은 곧바로 내 위로 손을 번쩍 쳐들었다.
후웅-.
시시각각 앞발이 다가온다.
나를 먹어치우기 위해 입을 쩍 벌린 채 울부짖는 것은 바로…….
괴물 곰의 대가리였다.
- 쿠워워어어억!
“헉.”
나는 몸을 퍼덕이며 번쩍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눈알을 굴려 이리저리 확인했지만, 괴물 곰은 온데간데없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
여전히 어두컴컴한 동굴 안이었다.
‘다행이다.’
나는 얕은 숨을 헐떡이며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 주무세요, 전하?”
아까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는 황태자가 갑자기 일어난 나를 잠시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퉁명스레 대답했다.
“둘이 같이 자다가 사이좋게 짐승 밥이 되면 딱 좋겠군, 그래.”
불침번을 서겠다는 소리를 저렇게 배배 꽈서 말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었다.
생각지 못한 놈의 듬직한 모습에 일순 멍해졌다.
그때, 황태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잠이 안 오는 건가?”
“네? 아, 네…….”
이미 자다가 악몽을 꾸고 일어났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의 변함없는 자세나 어두컴컴한 시야로 보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잠이 완전히 깬 상태인데도, 머리가 몽롱했다.
‘추워…….’
문득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다.
연약한 몸뚱이에 장대비를 맞고 강물에 빠지기까지 한 것이 썩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듯했다.
나는 망토를 단단히 여미며 모닥불 앞에 쭈그려 앉았다. 불을 쬐기 위해서였다.
“…….”
황태자는 그런 나를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 뿐 별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 앞에 앉아 있음에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왜 이러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느끼기에도 몸이 덜덜 떨렸다. 주체할 수 없었다.
뒤늦게 이것이 추위 때문만이 아님을 인지했다.
‘……돌아가면 진정제 같은 거라도 먹어야 하나?’
나는 원래 감정의 자각이 둔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후유증도 늦었다.
마치 전날 마수를 처치하고 뷘터 앞에서 바르르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할 때처럼.
나도 모르는 새 크게 놀랐던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가 지금에서야 후폭풍처럼 찾아온 것이다.
사실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이상한 하루였다.
앞발을 휘두르는 곰, 화살에 맞아 쓰러지던 황태자, 뒤를 바짝 추격하던 암살자들…….
“……추운가?”
망토에 가려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황태자는 바로 내 이상을 알아차렸다.
“……네? 아니요.”
나는 부정했다. 이런 내 상태를 굳이 알려 봤자 좋을 게 없었으므로.
그러나 황태자는 미심쩍은 얼굴로 옆에 놓여 있는 장작을 모닥불 안에 몇 개 더 집어넣었다.
화아악-. 불의 세기가 한층 더 세졌다.
그러나 여전히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쯧. 번거롭게도 하는군.”
그 순간, 황태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렁이는 불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탄탄한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꺅!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물론 놈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살피기 위해 검지와 중지 사이를 활짝 벌린 상태였다.
황태자는 모닥불을 돌아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 그만하고 옆으로 비켜.”
갑작스러운 놈의 행태에 나는 매우 당황했다.
“왜, 왜 이러세요?”
“안 비켜?”
놈이 눈썹을 휙 치켜들며 무섭게 압박했다.
그러나 내가 영 움직일 생각을 안 하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제 몸뚱이로 우악스럽게 밀어붙였다.
“저기요!”
나는 기겁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원래 놈의 자리였던 반대편으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조차 여의치 못했다.
놈이 내가 걸치고 있는 망토 끝자락을 확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악!”
단말마와 함께 나는 속절없이 쓰러졌다.
딱딱한 바닥 위로 철푸덕 넘어질 거란 생각에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러나 내가 쓰러진 곳은 차가운 동굴 바닥이 아닌…….
‘……응?’
황태자의 품 안이었다.
타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고작 망토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몸이 꽉 밀착됐다.
‘헉. 지,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나무토막처럼 굳었다.
“저,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놔, 놔주세요!”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버둥거리며 놈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허리와 등을 옥죄고 있는 팔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례하군. 감히 제국의 황태자에게, 저기요?”
놈이 낯 하나 바뀌지 않고 잘도 지껄였다.
“버둥거리지 말고 가만있어. 나도 공녀가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그, 그러니까 놔요! 이게 무슨 추행……!”
“머리통에 무슨 엄한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집어치워.”
추행범 취급하는 내 음성에 황태자가 불쾌하다는 듯 낯을 굳혔다.
“전장에서 고립되었을 때는 전우들끼리의 체온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 추위를 가벼이 여기다가 고작 한두 시간 차이로 명을 달리하곤 하지.”
“…….”
나는 그 말에 움직임을 멈칫했다.
난데없이 다가와 나를 덥석 껴안은 이유가 나름 타당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다시 살펴보자니, 정말로 내키지 않는 일인 듯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심기 불편해 보였다.
‘하긴. 얼마 전까지 죽이네, 마네 했는데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그렇게 개막장일 리가…….’
노멀 모드의 여주였다면 모를까.
나와 황태자 사이에 그런 야릇한 기류가 피어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그런데, 갑자기 봉변당한 건 난데 왜 지가 더 싫다는 표정을 지어?!’
놈의 행동이 이해가 가면서도 마지못해 한다는 얼굴이 묘하게 기분 나빴다.
나는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여긴 전장 아니잖아요.”
“그럼 계속 버티다가 1시간 후에 저체온증으로 뒈지시든지.”
“…….”
나는 저주나 다름없는 악담에 힘겹게 입을 꾹 다물었다.
안 그러면 간신히 올려 둔 ‘29%’를 다 깎아 먹을 만한 말을 할 것 같았다.
황태자와 나의 공방이 한차례 지나간 동굴 안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놈의 품에 어색하게 안겨 굳은 채로 모닥불 너머 암벽 어드메를 노려 보고만 있을 때였다.
“……왜 계속 개 떨듯이 떠는 거지?”
놈이 미간을 좁히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그와 동시에, 허리에 둘러진 팔에도 바싹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