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0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꽉 주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맞닿은 몸으로 진동이 전해진 듯했다.
‘개 떨듯이 떤다니!’
나는 놈의 저질스러운 언어 선택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러다 화낼 힘도 없어 무기력하게 대꾸했다.
“……추워서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황태자 놈이 득달같이 물었다.
“그냥…….”
“그냥?”
대충 얼버무리려 했지만 집요함이 남다른 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황태자의 커다란 망토 아래에서 간헐적으로 벌벌 떨리는 차가운 손을 맞잡고 문지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눈을 감으니까…… 아까 일이 자꾸 생각나서요.”
“아까 일?”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곧 뭔가를 떠올렸는지, ‘아’ 하는 소릴 냈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 아, 떨어지자마자 바로 졸도했으니 그건 아니겠군.”
“…….”
“겁도 없이 나서다가 곰에게 후려 맞을 뻔한 일을 말하는 건가?”
“하…… 네.”
이젠 뭐 일일이 반응하기도 지쳤다.
“겁도 없이 나서다가 곰한테 후려 맞을 뻔한 게 떠올라서 몸이 계속 개 떨듯이 떨리네요.”
나는 두려워서 떠는 사람치곤 버석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깊은 한숨과 함께 과장되게 인정하자, 황태자에게서는 더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분명 ‘미친개가 그럴 때도 있냐’ 어쩌고 하면서 빈정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모닥불이 피어오른 아늑한 동굴 안에 잠시간 평화가 찾아왔다.
확실히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차차 의식을 차리다 보니, 머리끝까지 엄습했던 추위와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대신하듯 묵직한 피로감이 찾아왔다.
나는 귀 옆을 감싼 두꺼운 타인의 팔뚝에 대놓고 머리를 턱 기댔다.
‘동의도 없이 먼저 껴안았으니까, 배게 역할 정도는 해야지.’
감을 듯 말 듯 눈꺼풀만 느릿느릿 껌뻑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 말이야.”
문득 머리맡에서 한숨과도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는 것도 귀찮아 스르륵 눈동자만 돌려 확인했다.
황태자는 미묘한 얼굴로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아홉 살인가, 열 살 때쯤이었던 것 같군.”
“…….”
“이 숲에서 오늘 공녀가 마주쳤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곰을 마주쳤던 적이 있다.”
“……곰이요?”
“그래.”
뜬금없이 그런 얘기를 왜 꺼내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2황자의 탄생일과 사냥 대회가 겹치던 때가 한 번 있었지. 나는 그때 아우를 처음 보았다.”
그때를 떠올리는지 황태자의 눈빛이 조금 아련해졌다.
그 모습이 그를 아주 조금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칼리스토는 바로 입매를 비틀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였던 내가 갓 태어난 애새끼를 해치기라도 할 줄 알았는지, 황비가 몇 년간 꽁꽁 싸맨 탓에 머리털 하나 구경 못 했었거든.”
“…….”
“모든 귀족들이 사냥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이었지. 2황자에게 바칠 선물이 대회 기간 내내 줄을 이었다.”
“…….”
“그 자리에 빈손으로 참여한 것은 나뿐이었지.”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이 일순 공허해졌다. 다시 보니 조금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하나뿐인 동생에게 멋들어진 선물을 주고 싶었다.”
“…….”
“그래서 부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활을 들고 사냥터에 숨어들었지.”
“…….”
“그대처럼 토끼 같은 작은 소동물을 잡아다가 선물로 줄 생각이었거든.”
칼리스토는 언제 허탈함을 느꼈냐는 듯, 금방 기세를 회복했다.
나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이 짓궂기 그지없었다.
‘이놈한테 그런 순진무구하고 서글픈 시절이 있었다니…….’
어쩐지 그 사실이 퍽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내게 이야기를 해 주는 황태자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어쨌든 죽기 바빠서 하드 모드 시절의 남주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주워 듣고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때문에 나는 황태자가 제 입으로 털어놓는 유년 시절을 진중히 새겨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찾긴 찾았는데, 너무 재빠르게 도망을 쳐서 화살이 영 맞지를 않더군. 사냥감을 쫓다가 나도 모르게 깊은 숲속까지 들어와 버렸다.”
“…….”
“그리고 곰을 맞닥뜨렸지.”
나는 좀 놀랐다. 내가 오늘 하루 겪은 일과 무척 흡사한 일화였기에.
내가 흥미를 갖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황태자는 쉼 없이 바로 말을 이었다.
“나는 공녀와 달리 달려오는 곰에게 화살조차 쏘지 못했어.”
“…….”
“지랄 맞게 무서웠거든. 그저 앞발에 후려 맞기 직전에 간신히 몸을 피한 것이 다였지.”
“……지금의 저와는 달리 전하께선 훨씬 더 어렸을 때 마주친 거잖아요?”
자조적인 칼리스토의 어투에 나는 눈을 껌뻑이다가 대꾸했다.
성인식을 앞둔 나 또한 곰을 맞닥뜨린 공포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 벌벌 떨고 있는 건데.
고작 아홉, 열 살.
그 어린 나이에 거대한 맹수를 마주했을 황태자의 두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어쩌다 보니 위로의 말을 건네는 양상이 되었지만, 칼리스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위를 이을 자에게 그깟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황제는 언제나 무결해야 하지.”
“그렇지만…….”
“게다가 그도 완전히 피한 것이 아니라 멍청하게도 발톱에 팔이 스쳐 버렸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찢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이쪽 팔이 날아갔을 테지. 운이 좋았어.”
“흐으…….”
왼팔을 들어 보이며 서슴없이 하는 잔인한 묘사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운지 황태자가 피식 입꼬리를 당겼다.
“쫓아오는 괴물을 피해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는데 말이야……. 갑자기 반대쪽에서 화살이 날아오더군.”
“근위병들이 온 거예요?”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지.”
황태자가 불현듯 미간을 좁혔다.
“막상 그쪽으로 죽자 사자 뛰어가니까, 검은 옷을 입은 암살자들이 나에게 활을 쏘더군.”
“아, 암살자요?”
“고작 10살짜리 아이 하나를 죽이려고 바글바글하게도 보냈어.”
나는 그의 담담한 설명에 입을 떡 벌렸다.
지금의 황태자라면 모를까, 어린아 이를 죽이기 위해 사냥터에 수십 명의 암살자를 푸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건가?
오늘 맞닥뜨린 20명의 암살자들이 떠올랐다.
‘……자주 겪는 일이구나.’
어쩐지, 느닷없이 사냥터 한가운데에서 암살자를 마주한 황태자는 놀라울 만큼 침착하고 담담했다.
게임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던 폭군의 어린 시절은 생각보다 더 불우했다.
“……누가 보낸 건데요?”
“글쎄. 결국, 조사가 흐지부지 마무리돼서 암살을 사주한 자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다가, 문득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황비나 그 외척이 보낸 것이겠지. 그때 2황자는 글도 제대로 못 뗀 부진아였으니까.”
스스럼없이 하나뿐인 아우를 ‘부진아’라 칭하는 그 목소리에는 한 줌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불쑥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얘기…… 저한테 이렇게 막 하셔도 돼요?”
“뭐 어떤가? 그대가 지금 와서 2황자와 붙어먹을 것도 아니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군.”
분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건 왜일까.
‘어렸을 때부터 이 모양이었으니, 인성이 철저하게 파탄 날 수밖에…….’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그의 성격 형성에 깊이 납득하며, 이야기를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요?”
“아무튼 곰을 피해 나를 죽이러 온 암살자들 쪽으로 도망가고 있는데, 별안간 놈들이 쏜 활에 가슴을 맞고 비탈로 떨어졌다.”
“가, 가슴을요?”
“그래. 다행히 목에 걸고 있던 어마마마의 유품 덕에 죽진 않았지.”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려 칼리스토의 목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품은커녕 천 자락 하나 걸치지 않은 단단한 맨 가슴뿐이었다.
“지금은 없다. 그때 이후 못 쓰게 돼서 따로 보관해 뒀거든.”
황태자가 비식 웃으며 조롱했다.
“이제 내외하는 모습은 집어치우기로 했나?”
“크흠!”
뒤늦게 얼굴이 화끈해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는데요? 쫓아오던 곰은요?”
애써 화두를 돌리자 황태자는 픽, 조소하면서도 순순히 어울려 주었다.
“웃기게도 비탈 아래로 떨어진 덕분에, 쫓아오던 곰이 그대로 나를 지나쳐 암살자들에게 달려들더군.”
그는 그때를 떠올리는지 다시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피 튀기는 혈투였다. 그 곰, 지능이 아주 대단했어. 무기를 든 인간 열댓 명을 상대로 능히 싸우더군.”
‘크워어어억-!’
어디서 곰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미쳐 날뛰는 거대한 괴물 곰.
그런 곰이 휘두른 발에 쓸려나가는 암살자들을 숨죽인 채 지켜보는 어린 날의 황태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서 누가 이겼어요?”
황태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즉답했다.
“둘 다 전멸했다.”
“둘…… 다요?”
“암살자 놈들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흔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근접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
“반대로 곰은 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승리했지만, 화살에 발라진 독이 퍼져 끝내 죽어 버렸지.”
결국, 그 엄청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건 어린 황태자뿐이었다.
“그대는 살아남은 내가, 그다음 어떻게 했을 것 같지?”
이번에는 황태자가 돌연 내게 질문을 던졌다.
“…….”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아무런 답도 못 했다.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였다면 곰과 암살자들이 격돌했을 무렵에 필사적으로 도망쳐 이미 숲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나는 죽은 곰의 목을 잘라 갔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듣는 어린 시절의 황태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행동을 저질렀다.
“그리고 당당히 사냥 대회의 우승을 차지했지.”
“…….”
“시상식이 끝나고, 가지고 온 곰 대가리는 2황자의 생일 선물이 쌓여 있는 곳에 던져두었다. 아직 식지 않은 피가 질질 흐르는 꼴이 꽤 장관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