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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81화 (8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1화

일화의 끝을 들은 나는, 아연해졌다.

‘대체 어떤 사고를 거치면 그 자리에서 죽은 곰의 목을 잘라 갈 수가 있지?’

잘 흘러가던 이야기가 갑자기 거센 폭풍을 만나 방향이 확 꺾인 것 같았다.

황태자는 말이 없는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여긴 건지 실실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공녀는 참으로 용기가 가상하지 않나? 기회주의자인 나와는 달리, 거기서 곰을 직접 상대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어느새 그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기분 나쁜 웃음이 가득한 황태자의 낯짝을 멀거니 바라보자니…….

어쩌면 그는 나를 조롱하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의 자신을 조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궁 실력이 생각보다 상당하더군.”

“…….”

“웬만큼 숙련된 사냥꾼들도 갑자기 곰을 맞닥뜨리면 그대만큼 침착하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면, 얼마 가지 않아 곰에게 따라잡혀 사지가 찢겼을 테니까.”

“…….”

“그러니 쓸데없는 상념은 집어치우고, 본인의 직감과 대처 능력을 자랑스럽게만 여겨.”

뜻밖의 위로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칼리스토를 응시했다.

확실히 비슷한 상황을 겪어서 그런 걸까, 무뚝뚝하고 성의 없기 짝이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진정됐다.

동시에 그런 말을 해 주는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칭찬 감사합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어색하게 답했다.

“전하께서도 어린 나이에 용기가 무척 대단하셨네요.”

그리고 나름대로 칭찬을 돌려주었다.

황태자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해서는 딱히 그것 말고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 안타까움이 들긴 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죽은 곰의 머리를 잘라 가서 우승해 먹었다는 대목부터 생각이 뒤바뀌었다.

‘이 자식은 이미 그때부터 글러 먹었던 거야.’

그런데 칭찬을 해 줬음에도 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그 순간 황태자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게 끝인가?”

“네? 뭐가요?”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었다.

황태자의 미간의 골이 더 깊어졌다.

“내 이야기에 대한 감상 말이다.”

“네. 끝인데요?”

“공녀는 감정이란 게 없나?”

“……예?”

난데없는 디스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자 황태자가 시뻘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대뜸 내뱉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못 돼 먹었어?”

“뭐라…… 고요?”

나는 생소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흰 눈을 떴다.

‘허! 지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야?’

기가 막혀서 연신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놈은 제가 더 기분 나쁘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전장에서 벌벌 떠는 병사들에게 이런 얘길 해 주면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울던데.”

“…….”

“공녀는 어린 시절의 내가 가엽지도 않나?”

뭐가 불만인지 토로한 놈의 말에 나는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안 가여워. 하나도 안 가여워!’

대체 어느 부분을 가엾이 여겨야 하는 거란 말인가.

이 망할 게임 속에선 내가 제일 가엽고 불쌍했다.

적어도 황태자 놈은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는 인간의 호감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비굴하게 굴 일은 없을 테니까.

답을 기다리듯 빤히 나를 응시하는 붉은 동공을 향해, 나는 그 모든 것을 적당히 에둘러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멀쩡히 잘 살아 계시잖아요. 원래 슬픈 이야기는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거예요.”

내가 그 새드엔딩 피하려고 얼마나 개고생하고 있는지, 이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허.”

내 대답에 놈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과연 소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군.”

“지금 누가 할 소리를……!”

다른 남주 놈들은 다 참아도 이 자식의 매도만은 참을 수 없었다.

기어코 버럭 터지려던 분노는 ‘어디 더 해 보라며’ 흥미롭게 빛나는 놈의 적안에 곧장 길을 잃었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들이쉬며 참을 인을 새겼다.

‘개XX.’

입을 꾹 다물고 놈을 노려보며 눈빛으로 쌍욕을 되뇌는 중이었다.

“하…….”

놈이 느닷없이 살벌한 표정을 풀고 헛바람을 터뜨렸다.

“공녀와 있으면 정말이지, 지루할 틈이 없어.”

그리고.

[호감도 34%]

놈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웃음 조각과 함께 호감도가 올랐다.

내 눈이 서서히 커다래졌다.

5%. 꽤 큰 상승 폭이었다.

나는 멍하니 금빛이 부스러지는 그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노멀 모드에서 기본으로 주어지는 호감도 ‘30%’를 넘겼다.

이제 황태자의 호감도는 죽음에서 꽤 멀어졌다고 할 수 있을 수준에 이르렀다.

그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안도해서 그런 걸까.

나를 보며 웃는 놈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떨림이 멎었군.”

그때, 등 뒤를 옥죄던 사슬이 탁 풀렸다.

덥석 껴안을 때와는 달리, 칼리스토는 퍽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놓아주었다.

“이제 진짜 자도록 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모닥불 저편으로 돌아갔다.

뜨끈하게 주위를 감싸던 온기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의 말처럼, 어느새 몸을 점령했던 떨림이 정말로 잦아든 후였다.

* * *

“아버지.”

“돌아왔느냐?”

초조하게 탁상을 두드리던 에카르트 공작은 막 카바나 안으로 들어서는 장남을 보고 반색했다.

그러나 고개를 젓는 데릭의 모습에 와작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인 게야?”

“레널드가 사냥개들을 데리고 다시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곧 소식이 들릴 겁니다.”

“마지막으로 본 자는.”

“소동물 사냥터로 가는 길을 묻기에 답해 주었다는 기사 한 명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갔다더냐?”

데릭은 이번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쾅-!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주먹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이제 해도 다 저물었는데, 아직 성년도 안 된 여자애가 대체 숲에서 홀로 어쩌려고……!”

사냥터를 구경하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정말 그러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페넬로페는 원래 변덕이 심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소동물 사냥 구역은 사냥 대회를 주관하는 천막이 있는 공터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주둔하고 있던 근위병들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문제는 맹수들을 풀어 놓은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공작은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황태자 쪽은.”

그 순간, 데릭의 미간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머리를 주무르느라 딱딱하게 굳는 아들의 입매를 공작은 미처 보지 못했다.

“……황궁에서도 이제 막 수색대를 파견했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때, 공녀 하나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모일 시간이 다 됐음을 알리는 각적 소리가 울린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황태자 또한 돌아오지 않았다.

“찾으면 이쪽에도 알려 달라고 언질을 해 뒀으니,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설마 그 망나니 같은 자식이 페넬로페를 또 베어 죽인답시고 어디로 끌고 간 건…….”

“아버지.”

데릭이 공작을 막아섰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그 또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이곳은 에카르트만의 영역이 아닌 온갖 귀족들이 몰려든 사냥제의 중심.

누가 어디에 귀를 심어 놓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먼저 수색을 나섰던 레널드가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합니다.”

데릭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맹수를 풀어 놓은 금색 표식 구역에서 목이 잘린 불곰의 사체가 있었답니다.”

“……곰의 사체?”

심각한 사안에 공작은 덩달아 목소리를 죽였다.

“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잘린 머리는 몸뚱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음.”

“또 몸뚱이에는 털이 군데군데 그을려 살이 드러나 있었다고 합니다. 동그란 구슬 모양으로 말이죠.”

“뭐, 뭐라고!”

동그란 구슬 모양. 틀림없이 페넬로페에게 준 석궁의 볼트였다.

데릭이 뭘 말하는지 알아차린 공작이 입을 떡 벌렸다.

“혹시 그 곰이 인간을 공격한 건…….”

“그런 흔적은 없었다고 단언했습니다.”

데릭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공작은 한시름 놓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서. 그 곰의 사체는 어떻게 처리했다느냐.”

“엘렌 후작가의 시종들이 먼저 도착해서 수습하고 있던 상태인지라, 사체 확인만 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답니다.”

“엘렌 후작가?”

뜻밖의 이름에 공작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엘렌 후작이 그 곰을 잡은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태자 전하의 악취미로 포악하게 개량된 개체임이 분명할 텐데요.”

“하긴, 활도 제대로 못 쏘는 노친네가 곰을 잡을 수 있을 리 없지…….”

“게다가 잡았다면 돌아올 때 자른 머리를 가져왔을 겁니다.”

하지만 엘렌 후작의 사냥감은 고작 노루 두 마리뿐, 거대한 맹수의 머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공작은 통 골치가 아픈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페넬로페, 그 애는 또 왜 맹수를 풀어 놓은 구역까지 가서! 그놈의 석궁을 다시 쥐여 주는 게 아니었는데…….”

“아버지.”

잠자코 그의 중얼거림을 듣던 데릭이 불쑥 물었다.

“페넬로페에게 준 석궁, 무슨 마법을 새기신 겁니까?”

“…….”

“무슨 마법을 새겼기에 그 애가 천지 분간도 못 하고 곰까지 쏘게 만든 겁니까.”

“……크흠!”

공작은 바뀐 주제가 불편한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부친을 바라보는 데릭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설마, 살상용 무기인데 마력을 눈속임한 겁니까?”

“살상용이라니! 그런 거 아니다.”

공작이 휙 고개를 돌리며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맞아 봤자 잠시 기절하는 정도일 뿐이야. 사냥용으로 적합하니 검문에도 통과했겠지.”

“정말 그것뿐입니까?”

예리한 놈 같으니라고.

도통 쉽게 넘어가지 않는 첫째 아들의 모습에 공작이 끄응, 침음했다.

“……거기에, 맞기 전의 기억을 잃는 마법을 추가로 걸어 놓았다.”

“…….”

무표정했던 데릭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한동안 천막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데릭은 한참 후에서야 입을 열었다.

“……왜 그 애에게 그런 걸 주셨습니까?”

공작은 흘긋 아들을 곁눈질하며 태연히 답했다.

“정 쏘고 싶은 사람이 생기거든 끌고 가서 몰래 쏘라고 달랠 겸 주었다.”

“그 애 성격을 알면서, 그런 위험한 물건을 손에 쥐여 주셨습니까?”

분노를 억누르는 듯, 데릭의 음성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작년처럼 날뛰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쏘고 다니면요.”

“…….”

“석궁에 맞고 기억을 잃는 자가 수두룩하게 나오면, 그 뒷수습은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스읍, 앞서 나가지 마라.”

공작이 혀를 차며 변명하듯 말했다.

“만약을 대비한 것뿐이야. 충분히 반성했다고 하니 저도 알아서 조심하겠지.”

“켈린 백작 하나도 모자라, 이번에는 여러 귀족들에게 남은 광산들마저 다 넘겨줄 생각이십니까?”

“데릭 에카르트.”

공작이 단호히 데릭의 말을 끊어냈다.

페넬로페의 행패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난리를 치는 켈린 백작에게 다이아몬드 광산 하나를 통째로 넘겨주었던 일은, 기실 에카르트로서도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엄연히 계보에 정식으로 입적된 공녀.

그것도 어린애가 철모르고 저지른 일로 감옥에 투옥되는 것을 어찌 가만 보고만 있는단 말인가.

“……그만하거라. 줄 만했으니 주었겠지. 요즘 집안에서 일어난 잡다한 일 때문에 기가 팍 죽어 다녔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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