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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82화 (8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2화

“아버지!”

데릭이 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이를 악문 턱이 단단해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마법까지 새긴 석궁을……!”

“도나 부인에 이어 연무장에서의 일 때문에 상심이 커 보이더구나.”

반박하려던 데릭의 말허리를 공작이 불쑥 끊었다.

“그 노예 놈이 기사의 목을 조른 것도, 다 보는 데서 대놓고 페넬로페의 험담을 했기에 그렇다던데. 알고 있었느냐?”

“그건…….”

데릭의 입이 다물어졌다.

뒤늦게 전해 들어 알고는 있었다.

집사에게 석궁 연습을 하러 갔다는 언질을 받고 연무장으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감히 공녀를 모욕한 불경한 놈을 파면시켰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지만 노예 새끼에게 반쯤 안긴 채로 석궁을 쏘는 모습을 보니, 순간 눈이 뒤집혔다.

결국, 알려 주고자 했던 말은 아무 것도 전할 수 없었다.

“……욕을 얻어먹고 와서 차라리 근신을 할 테니 사냥 대회에 참석하기 싫다는 애한테 그럼 꾸중을 하겠느냐, 뭘 하겠느냐.”

“…….”

“그래서 석궁을 주면서 달랬다. 언제까지 집에만 박혀 있게 할 수는 없지 않니.”

이어지는 공작의 말에 데릭은 잠시 침묵했다.

“……마크란 놈과 그 패거리들은 바로 파면시켰습니다.”

한참 후 그는 서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나 저에게…… 아니, 하다 못해 집사에게라도 말을 했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

“그런데 매번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것은 누구도 아닌…….”

그 애인데.

“데릭.”

미처 다 내뱉지 못한 말은 공작의 부름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그 아이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

“페넬로페가 그렇게 천방지축이 된 것도 어찌 보면 다 내 허물이다. 내 욕심 채우겠다고 데리고 와서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으니.”

“…….”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철이 좀 들려는 것 같으니 잘 챙겨 주거라. 하나뿐인 여동생이지 않느냐.”

공작의 마지막 말에 데릭이 부서져라 주먹을 쥐었다.

“제게 여동생은 이본 하나뿐입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입술 사이로 이를 악문 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이본은 그만 놔주자꾸나.”

“아버지.”

그는 방금 들은 소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공작을 휙 돌아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구도 아닌, 이본과 자신들의 친부가.

“……이본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

그러나 공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간 단 한 번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목격했다는 사람조차 나타나지 않았지. 이젠 그만 인정할 때다. 그 애가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아버지!”

“페넬로페가 공작저로 온 지도 벌써 6년이다.”

일그러진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빛에 괴로움이 서렸다.

“내 너희들의 의견을 미처 묻지 않고 짧은 판단으로 데리고 온 것은 사실인지라, 그간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

“하지만 언제까지 이본에 대한 죄책감을 그 애를 괴롭히고 증오함으로써 풀 게야.”

그 말에 데릭의 파란 동공이 부릅떠졌다.

차라리 신경을 껐으면 껐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었다.

레널드라면 모를까.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여자애에게 유치한 화풀이 같은 걸 자신이 할 리가…….

“저는…….”

데릭은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한 번도 페넬로페를 증오하고 괴롭힌 적 없습니다, 아버지.”

페넬로페를 싫어하게 된 건 오로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녀의 패악과 행동거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썩 인간다워진 요즘은 딱히 싫어할 만한 일도 없었다.

때문에 그런 티도 별로 내지 않았었…….

그 순간이었다.

- 아니요, 소공작님.

건조한 목소리가 번뜩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 에밀리가 소공작님께 이런 부탁을 하던가요?

- 어떤 벌을 내려주시는 달게 받을게요, 소공작님.

그간 꼬박꼬박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칭하던 그 애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소공작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이의 앞에서는 여전했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철저하리만치 호칭을 구별했다.

그 계집애가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살갑게 부를 때마다 진저리가 쳐질 만큼 짜증이 났었는데…….

- 앞으로는 쭉, 신경 쓰실 일 없이, 쥐죽은 듯 살겠습니다.

이제 자신만 보면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선을 긋기 바빴다.

데릭은 그 깨달음에 새삼 충격을 받았다.

“오히려, 저를 싫어하는 건…….”

그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던 그 순간이었다.

쾅-!

“아버지!”

카바나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사이로 레널드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레널드.”

“페넬로페를 봤다는 목격자가 나왔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사포처럼 쏟아낸 레널드의 말에 공작도 데릭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그게 누구냐!”

“툴릿 남작이요.”

“툴릿 남작? 그자는…….”

“켈린 백작 영애의 약혼자입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는 공작 대신, 데릭이 빠르게 내뱉었다.

공작이 쉽게 떠올리지 못할 만큼 보잘것없는 자였다.

엘렌 후작가의 먼 방계로 황비에게 줄을 대어 간신히 작위나 얻은.

그런데 올 초, 갑작스레 남작가와 백작가의 약혼이 성사되어 사교계가 한참 떠들썩했다.

일간에서는 딸밖에 없는 두 가문이 동맹을 위해 먼 인척을 동원하여 억지스러운 결합을 맺은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두 가문 모두 2황자파였으므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툴릿 남작, 그놈이 대체 어디서 페넬로페를 봤다는 게야!”

공작이 다급한 목소리로 레널드를 재촉했다.

레널드가 미묘한 얼굴로 잠시 입을 열기를 주저하다가 말했다.

“숲속에서 페넬로페가 쏜 석궁에 맞고 정신이 나갔답니다.”

“뭐, 뭐라?!”

“발견된 직후부터 백치처럼 침을 질질 흘리면서 계속 진분홍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사냥의 여신을 찾고 있다는데요.”

“하……!”

공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귀족들이 여러 명 속출하고 있답니다.”

데릭이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벌어졌다.

* * *

후우우우웅-.

나는 불현듯 선득함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이른 새벽인 듯, 동굴 안에 푸르른 여명이 가득했다.

밤새 타오르던 모닥불은 어느새 매캐한 연기만 피어오른 채 꺼져 있었다.

그 너머로 벽에 기댄 채 잠이 든 칼리스토의 모습이 보였다.

‘자고 있을 때 얼른 옷부터 입어야겠어.’

망토 아래는 여전히 알몸인지라, 동굴 안으로 불어오는 미약한 바람이 더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소리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모닥불 근처에 널어 둔 옷은 바짝 말라 있었다.

황태자가 깨기 전에 허겁지겁 옷을 막 주워 입었을 때였다.

후우우우웅-.

마치 귀곡성처럼 음산한 진동음과 함께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앞머리가 바람결에 스산하게 흔들렸다.

재킷의 단추를 잠그던 나는 잠에서 깨기 전에 느꼈던 위화감에 멈칫했다.

‘바람이…….’

바깥쪽에서 불어오는 게 아니라, 동굴 안쪽에서부터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어두컴컴한 굴 저편을 응시했다.

그 순간.

후우우웅-.

또다시 불어오는 바람에 나는 흠칫 뒷걸음질 쳤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서늘한 바람이 동굴 내부에서 불어오는 것이다.

‘동굴 반대편이 뚫려 있는 건가?’

반대편에서 부는 바람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면, 동굴의 길이가 짧고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시커먼 어둠뿐.

희미한 빛조차 보이지 않는 동굴 속은 길이가 전혀 짧아 보이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그때 동굴 저편에서 또다시 귀곡성을 동반한 바람이 불어쳤다.

나는 몸을 돌려 황태자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전하, 일어나 보세요.”

깊게 잠든 건지 그는 바로 깨어나지 않았다.

맨 살이라 잡기 꺼려졌지만, 별수 없이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전하.”

그러나 칼리스토는 도통 눈을 뜨지 않았다.

문득 손바닥에 닿는 그의 피부가 섬뜩하리만치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토를 내게 주고 밤새 맨몸으로 자서 그런가?’

게다가 간밤의 황태자는 나름대로 나를 배려해서인지, 젖은 바지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전하, 전하?”

몇 번 더 흔들어도 도통 눈을 뜨지 않는 칼리스토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불현듯 그가 어제 표창과 칼에 맞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서, 설마 죽었나?’

나는 허겁지겁 그의 가슴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두근, 두근. 다행히 죽은 건 아닌지 그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머리를 뗀 나는 여전히 미동 없는 황태자를 깨우기 위해 살짝 뺨을 쳤다.

‘흔들어도 깨지 않으니 별수 없지.’

짝-.

“전하, 눈 좀 떠 보세요!”

짝! 짝, 짜악-!

살짝 두드리는 것에 가깝던 손길이 점점 거세졌다.

절대 사심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살짝 두드렸음에도 황태자가 눈을 뜨지 않았으므로…….

“전하, 전하!”

짝, 짜악!

철썩-!

마침내 제대로 뺨따귀를 갈기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진 순간.

“으음…….”

황태자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그 사이로 새빨간 동공이 드러났다.

“전하,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나는 한 번 더 갈기려고 쳐들었던 손을 허겁지겁 뒤로 숨기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공녀.”

“네, 전하.”

“방금…… 내 뺨을 때리지 않았나?”

“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 시선은 벌게진 한쪽 뺨에 못 박혀 있었다.

“이상하군. 분명 볼을 후려 맞은 느낌이 들었는데.”

“꿈을 꾸셨나 봅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나는 놈이 눈치채기 전에 벌떡 일어나 그의 옷가지와 경량 갑옷을 친히 가져다주었다.

일말의 양심이었다.

“지금 태평하게 꿈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니에요, 전하. 동굴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어요.”

“……바람?”

“네. 분명 짧은 굴도 아닌 것 같은데…….”

후우우웅-.

그 순간, 내 말을 뒷받침하듯 동굴 안쪽에서 또다시 서늘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내게 전달받은 옷을 주섬주섬 껴입던 황태자가 멈칫하고 동굴 저편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왜…… 그러세요?”

“마력이 느껴져.”

그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동굴 안에 누가 있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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