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3화
“누가…… 있다고요?”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깜빡였다.
동굴 저편에 누군가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보단 그걸 알아차린 황태자가 더 놀라웠다.
‘귀신같은 놈…….’
눈을 번뜩이는 칼리스토와는 달리, 나는 딱히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위험한 에피소드가 진행 중인 거라면 빌어먹을 시스템 창이 먼저 알려 줬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여, 진짜로 스토리를 벗어난 돌발 상황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지 않는 황태자가 검으로 모두 썰어 버릴 테니까.
“확인을 좀 해 봐야겠어.”
어느새 망토까지 모두 차려입은 황태자는 옆에 둔 칼을 챙겨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이었다.
“으윽…….”
그가 불현듯 짧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저, 전하!”
나는 이번에야말로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황태자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다시 보니 그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전하, 정말 어디 편찮으세요? 다시 앉아 보세요.”
“됐어.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이다.”
“혹시 어제 다친 곳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안색이 너무 창백해요.”
걱정스러운 내 목소리에 황태자가 돌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내 뺨을 내리치던 걸 보니 내가 죽으면 춤이라도 출 기세던데.”
“아…… 알고 계셨어요?”
“궁 근처였으면 그대는 황족 시해범으로 지하 감옥에 끌려갔을 거야.”
“황족 시해범이라니요!”
나는 펄쩍 뛰며 부정했다.
“그건 전하를 깨우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
우우우우웅-.
그때, 내 민망한 변명을 막듯 또 한 번 동굴 안쪽에서 진동음을 동반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우뚝 말을 멈췄다.
날카로운 눈으로 동굴 저편을 바라보던 황태자는 바람이 멈추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꺼진 모닥불이 있는 자리로 다가간 그가 부싯돌을 몇 번 어루만지더니 능히 불을 피웠다.
그리고 장작으로 가져온 것 중 가장 길고 굵직한 나무토막에 불을 옮겨 붙였다.
금세 횃불 하나가 탄생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그대는 여기 남아 있어. 금방 갔다 오지.”
“저, 전하!”
나는 횃불을 들고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황태자의 망토 자락을 황급히 붙잡았다.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요?”
황태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위험할지도 모르잖아요. 차라리 먼저 숲을 빠져나간 후에 기사들을 데리고 와서 확인하는 게…….”
그 순간이었다.
황태자의 뒤쪽에 자욱이 깔려 있는 어둠 위로 선명한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히든 퀘스트 발생!
[수상한 동굴]을 탐색하시겠습니까? (보상 : 알 수 없는 무언가)
[수락 / 거절]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위험한 에피소드가 진행 중인 거라면, 빌어먹을 시스템 창이 먼저 알려 줬을 것이다.’란 생각이 그야말로 씨가 됐다.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
“그 전에 사라지면 어쩌려고.”
황태자는 갑자기 말을 멈춘 내가 이상한지 흘깃 뒤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황궁 내에서는 맹약으로 엮인 마법사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마법을 쓸 수 없다. 불온분자는 즉결 처분이 원칙이지.”
“…….”
“마력이 크지 않은 걸 보니 여러 명은 아닌 것 같군. 금방 죽이고 올 테니 기다려.”
스르릉-. 그가 검집에서 칼을 빼 들며 당장이라도 뛰어갈 것처럼 굴었다.
깊이 고민할 새도 없었다.
“그,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나는 눈물을 머금고 [수락]을 눌렀다.
[거절]을 누르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괜히 황태자 혼자만 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호감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게다가 지금껏 완료한 ‘히든 퀘스트’의 보상들은, 돌아보면 모두 도움이 되는 것들뿐이었다.
“볼트가 다 떨어졌지 않나, 공녀?”
바닥에 놓여 있던 석궁을 챙겨 드는 나를 보며 황태자가 삐딱하게 지껄였다.
마치 석궁이 없다면 나란 존재는 별 볼 일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요?”
“짐만 될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이젠 쏠 볼트도 없으니, 암살자를 마주쳐도 저는 알아서 잘 도망칠 테니까요.”
“하! 무엄하기가 아주 이루 말할 수가 없군. 에카르트에서는 황족에 대한 예법을 그따위로 가르치는 건가?”
황태자가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혀를 찼다.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나는 속으로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석궁을 줍느라 숙였던 허리를 펼 때였다.
‘……응?’
문득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눈길을 끌었다.
석궁이 놓여 있던 자리 옆에 낯선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피 묻은 표창과 단도였다.
“이건…….”
나는 그것이 어제 황태자의 몸에 박혔던 무기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짝거리는 것은 날카로운 표창의 날이 아닌, 투박한 단도의 손잡이였다.
‘이게 왜…….’
마치 내가 집어 주길 바라듯 가까이 다가가니 반짝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단도를 집었다. 그와 동시에.
〈SYSTEM〉 보상으로 [문양이 새겨진 단도]를 획득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시스템 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이게 암살자의 증표?’
미심쩍은 얼굴로 단도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언제까지 거기 죽치고 앉아 있을 거지? 가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황태자가 신경질적으로 재촉했다.
“가, 가요!”
거참, 성질 급하긴.
나는 단도도 같이 챙겨 들며 서둘러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그건 왜 들고 오는 거지?”
“석궁을 쓸 수 없으니, 호신용으로 쓰려고요.”
“검술도 할 줄 아는 건가?”
황태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할 줄 몰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제 들어가요.”
나는 그렇게 황태자와 같이 [수상한 동굴] 탐색을 떠났다.
동굴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폭이 좁아지고, 구불구불해졌다.
그리고 간간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로 인해 축축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 또한 점차 거세졌다.
우우우우웅-.
또 한 번 불어오는 바람에 칼리스토가 든 횃불이 ‘화르륵’ 흔들렸다.
‘뭔가 있긴 있나 봐.’
나는 내키지 않은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오싹한 귀곡성 때문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퀘스트 수락에 대한 약간의 후회가 들 때마다 나는 간절한 눈으로 황태자의 뒤통수 위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별일 없기를…….’
나한테는 귀곡성보다 호감도가 폭락하는 게 더 무서웠다.
구불구불한 동굴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문득 앞서 걷던 황태자가 걸음을 멈췄다.
“공녀, 저길 봐.”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까마득히 먼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저기에 있나 보군. 마력이 전보다 강하게 느껴져.”
후우우웅-.
그 순간, 확실히 아까보다 더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슬아슬하게 일렁거리던 횃불이 기어이 ‘훅’ 꺼졌다.
좁은 동굴 안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바람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멀리서 새어 나오던 빛마저 사라졌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어서 저기로 가 봐요!”
나는 황태자를 재촉했다. 빨리 퀘스트를 깰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뛰어가고 싶었지만, 한 명도 버거울 만큼 동굴의 폭이 바짝 좁아진 터라 황태자를 앞지를 수 없었다.
“공녀는 대체…….”
황태자가 떨떠름한 음성을 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귀족 여식이 맞긴 한 건가?”
“그게 무슨 소리세요?”
“보통 이런 때 다른 영애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품에 뛰어들기 마련인데 말이야…….”
놈이 뭘 비꼬는 건지 알아들은 나는, 코웃음을 쳤다.
‘꿈 깨시지.’
“애석하게도 길이 좁아서 그럴 수가 없네요, 전하. 다음에 널찍한 대로변에 있으면 잊지 않고 꼭 안길게요.”
“기대하지.”
황태자가 비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기대는 무슨, 숲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네놈과 단둘이 있을 일은 꿈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지런히 황태자의 뒤를 따라 걷던 중.
마침내 우리는 빛이 새어 나오는 근원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굴의 폭보다 훨씬 좁은 틈새였다.
“벽면이 날카로우니 쓸리지 않도록 조심해.”
황태자가 틈새로 몸을 욱여넣다시 피하며 힘겹게 들어갔다.
그보다 체구가 작은 나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막상 틈을 비집고 나오니, 황태자가 훌쩍 아래에 있었다.
‘뛰어내려야 하나?’
당황하는 내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의외라는 심정으로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내밀었다.
강한 힘이 내 체중을 떠받쳐 주었다.
타닥, 그의 도움을 받아 수월히 바닥에 안착했을 무렵이었다.
화악-.
돌연 앞쪽에서 강렬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전에 없던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윽!”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한데 묶은 머리가 풀릴 것처럼 거세게 휘날렸다.
후우욱!
다행히 돌풍은 금세 잦아들었다.
나는 시린 눈을 가물가물 떴다. 어느새 넘실거리던 푸른빛은 사라진 후였다.
황태자는 일언반구 없이 먼저 앞으로 확 나아갔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방금 전까지 걸어온 통로와는 달리 꽤 널찍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생긴 굴이 아닌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간인 듯, 정가운데에 거대한 암석을 다진 듯한 동그랗고 평평한 단이 솟아 있었다.
높이가 웬만한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지라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는 울퉁불퉁한 암석들을 잘도 밟으며 단위로 금방 올라섰다.
그가 밟은 자리를 따라 밟으며 힘겹게 옆에 섰을 때였다.
나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건…….”
평평히 다져진 암석 정중앙에는 놀랍게도, 하체가 없는 해골이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치 만세를 하듯 위로 펼쳐 든 양손에는 알 수 없는 커다란 스크롤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 순간, 시체 주변으로 푸른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화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