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84화 (8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4화

눈앞이 새파랗게 점멸되면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돌풍이 몰아쳤다.

“읏.”

칼리스토를 따라 가까스로 암석의 끄트머리에 올라섰던 나는, 몰아치는 바람에 일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아래로 떨어질 듯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을 때였다.

“조심.”

강한 힘이 팔목을 휘어잡았다.

불어치는 바람에 아무런 타격도 없는지, 황태자는 굳건히 선 채로 나를 가뿐히 붙들었다.

휘이이이익-.

휘날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힘겹게 눈을 떴을 때였다.

“이건…….”

시체 주변에 커다란 원 모양이 생겼다.

그 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듯 복잡한 문양이 그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위로 푸른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일렁이는 불처럼,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이 시체 주변으로 미친 듯이 휘몰아쳤다.

강한 돌풍은 그에 의해 발생하는 것 같았다.

유골 위에 걸쳐진 문드러진 천 자락이 거칠게 펄럭거렸다.

“마법진이군.”

묵묵히 지켜보던 황태자가 그것의 정체를 툭 내뱉었다.

‘마법진……?’

생소한 소리에 멍하니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문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얼마 가지 않아 바람이 멈췄다.

일렁이는 무형의 힘도 차츰 범위를 줄이더니 이내 문양과 함께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소란스럽던 동굴 안은 어느새 다시 잠잠해졌다.

“감히 황궁에서 허락 없이 마법을 쓰는 불온분자가 있긴 했군. 이미 오래전에 뒈져 버렸지만 말이야.”

황태자가 밀려나지 않도록 꽉 붙들고 있던 내 팔목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사라진 마법진 한가운 데에 우뚝 선 유골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오래된 것 같았다.

동굴 안은 습한 편이니 저 정도로 오래된 유골은 보통 녹아서 형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마법으로 보존이 된 건가?’

게다가 멀쩡한 사람도 휘청거릴 만큼 거친 돌풍이 몰아치는 환경에서 저렇게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허리 아래는 왜 없어진 거지?”

가끔 꼿꼿이 선 채로 발견되는 미라들이 있었지만, 그건 하체의 피부와 근육이 보존된 상태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유골은 전혀 미라라고 칭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살점 하나 없는 갈비뼈와 절단된 척추뼈의 모습이 꼭, 암석에 융화되기 직전의 모습 같았다.

“석수 때문에 녹은 유해가 암석 틈으로 스며들어서 붙은 건가?”

흥미로운 눈으로 유골을 관찰하던 중이었다.

“남은 마력 때문에 형체가 아직까지 유지되는 것이다.”

“네?”

“영혼을 이 장소에 묶기 위해 마법진에 필요한 제물로 본인의 신체를 쓴 것 같군.”

문득 황태자가 입을 열어 답했다.

나는 그제야 의문을 소리 내서 중얼거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골바가지를 몇 번 본 적이 있나 보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그는 유골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보통은 동물로 대신하곤 하는데…… 저자는 마법 시전 중에 산 채로 몸뚱이가 반쯤 갈리다가 버티지 못하고 죽은 듯하군.”

“몸뚱이가…… 반쯤 갈렸다고요?”

나는 한발 늦게 경악했다.

칼리스토가 고개를 까딱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마법진을 발동할 땐 강한 생명력을 공급해야 하니까.”

“……강한 생명력?”

마법진의 발동이고 생명력이고, 나는 그런 거 하나도 모른다.

‘뭐야. 노멀 모드에서는 이런 거 자세히 안 나왔단 말이야.’

게다가 내가 추측하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라 퍽 당황스러웠다.

‘무슨 판타지 영화도 아니고, 영혼을 대체 어떻게 묶어 둬?’

그러나 나는 바로 납득했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라, 마법이 실생활에서 자행되는 게임 세상이라는 것을.

“……저 사람은 영혼을 왜 이 장소에 묶어 놓으려고 한 걸까요?”

“죽은 후에도 이 마법진이 계속 시전되게 하려고 그랬나 보지. 어떤 마법을 걸려고 했는지, 아주 지독하군.”

칼리스토는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덧붙였다.

“황궁으로썬 이 새끼가 중간에 뒈진 것이 천만다행이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황궁 내부에 있는 숲 깊숙한 곳에서 은밀히 마법을 시행하려고 한 것이 꽤 섬뜩하게 느껴졌다.

황태자는 마법진의 원형 테두리가 새겨졌던 자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유골의 상태를 확인했다.

“묶어 두려던 영혼은 소멸했고 신체에 있던 마력만 남아서 마법진에 붙들려 있는 모양새인 듯한데…….”

“…….”

“아직까지도 그것으로 마법진이 발동할 정도이니, 살아생전에 한가락 했던 놈인가 보군.”

대략 마력이 아직 남아 있어서 유골이 저만큼 보존될 수 있었단 소리로 이해했다.

‘잡다한 화학물질 없이 마력 하나만 있으면 유골을 보존할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편리한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미약한 진동과 함께 또 한 번 푸른빛이 암석 위에 선명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다시 발동되려는 듯했다.

“위험하니 잠시 물러서 있어, 공녀.”

칼리스토가 나를 향해 팔을 뻗어 제지하며 명령했다.

나는 착실히 단 아래로 물러섰다.

휘이이이이익-.

시체에 남은 마력이 마법진에 의해 요동치기 시작한 찰나.

스르릉, 콰직! 칼을 빼든 황태자가 무형의 소용돌이 위로 가차 없이 칼을 내리꽂았다.

콰앙-! 요란한 파열음이 동굴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뭉쳐 있던 마력과 그를 썰어내려는 검기가 격돌했다.

마구 불어치는 거센 바람 때문에 찬란한 금발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황태자는 검을 바닥에 꽂아 넣은 채 시뻘건 눈을 허공을 향해 번뜩였다.

그의 주변으로 푸른 스파크가 ‘파즛, 파짓’ 튀었다.

콰직, 콰즈즈즉, 콰직-.

얼마 안 가 그가 칼을 꽂은 곳을 기점으로 암석 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는 실금은 곧 깊은 틈새가 되어 마법진 전체에 걸쳐 파죽지세로 뻗어 나갔다.

콰지직, 콰지직-.

그와 함께 거친 바람이 점차 잦아들었다.

정신없이 요동치던 마력과 마법진이 어느 순간 ‘팟’ 하고 사라졌다.

“후…….”

황태자가 꽂아 둔 검을 뽑아냈다.

꽤 많은 힘을 쓴 건지,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다 된 거예요, 전하?”

나는 굉음 때문에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물었다.

“완전히 파훼했다.”

칼리스토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제 무슨 마법을 시전하려고 한 건지 한번 알아나 볼까.”

그는 손에 검을 그대로 든 채 금이 간 암석 위를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두꺼운 스크롤을 각각 들고 있는 유골의 앙상한 팔 쪽이었다.

“흠.”

그 앞에 멈춰서 잠시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던 그는 불현듯 들고 있던 칼을 번쩍 쳐들었다.

필시 유골을 썰어 낼 태세였다.

그제야 그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나는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저, 전하!”

“……음?”

칼리스토가 멈칫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허겁지겁 그가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지금 뭐 하시게요?”

“팔뼈를 썰게.”

“왜요?”

“스크롤을 봐야 무슨 연유로 황궁 안에 마법진을 새기려 들었는지 단서를 얻을 거 아니야.”

“굳이 유골을 훼손하면서 꺼내지 않아도 되잖아요.”

황태자는 내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럼 공녀가 시체를 만져서 저걸 빼 줄 건가?”

“네.”

“……뭐?”

“제가 꺼내 드릴게요.”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사실 인골 발굴도 해 보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게다가 황태자가 휘두른 검 때문에 한순간에 유골의 형체가 무너지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특이한 형태로 오랜 시간 보존된 유골이 아닌가.

“잠시 물러서 계세요, 전하. 특히 그 칼부터 어서 치우시고요.”

나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황태자를 은근슬쩍 뒤로 떠밀었다.

“허.”

황태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스르릉-. 그러면서도 순순히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삐딱한 눈빛이 ‘어디 한번, 네가 뭔 짓거리를 하는지 보자.’ 이런 것 같았다.

나는 놈이 완전히 물러선 것을 확인하고, 유골 앞에 정면으로 섰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짧게 묵례했다.

‘죄송합니다. 손 좀 댈게요.’

고고학자들은 인골이나 무덤을 발굴할 때, 가장 긴장감을 가진다.

믿기지 않지만, 생각보다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여 발굴 작업 착수 전에 고사를 지내거나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유골을 향한 묵념을 막 마쳤을 때였다.

물러섰던 황태자가 어느덧 바짝 옆에 붙어 나를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골을 건드리는 거니까 약간의 예를 차리는 거예요.”

“그걸 왜 해?”

“고인의 명복도 빌 겸, 유품을 빼내도 별 탈 없도록 기원할 겸요.”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하는군.”

황태자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노려보며 미간을 좁혔다.

“공녀가 이렇게 미신을 맹신할 줄은 몰랐어.”

“…….”

나는 놈의 빈정거림을 바로 무시했다.

발굴 직전에는 우선 상태 조사가 필요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스크롤과 그것을 쥐고 있는 손가락뼈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붙잡은 상태로 사망해서 그런지, 스크롤의 종이와 뼈가 닿은 부분이 거멓게 썩어 있었다.

그 주위로 먼지와 모래 같은 이물질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붓 같은 거 없나?’

이 삭막한 동굴 안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주변을 둘러보며 도구를 찾던 중, 머릿속에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들고 있던 석궁을 바닥에 내려놓고, 챙겨 온 단검을 품에서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그리고 머리칼을 한 움큼 집고 서걱, 잘라 냈다.

그때였다.

“공녀!”

휙-. 단도를 든 손이 잡힌 채 몸이 거칠게 돌아갔다.

“지금 뭐 하는 짓거리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