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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85화 (8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5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납게 얼굴을 굳힌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자르는데요?”

“왜 위험하게 멀쩡한 머리를 칼로 자르는 건데?”

“솔로 쓰려고요.”

“솔……?”

나는 행동 하나하나에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묻는 황태자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전하.”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억지로 빼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저 이제 바쁘니까 방해하지 마시고 옆에서 기다리세요.”

“……무례하군. 감히 제국의 황태자에게 방해라니.”

손가락으로 물러서야 할 곳을 찌르듯 가리키며 말하자, 놈이 불퉁하게 지껄이면서도 순순히 물러섰다.

나는 꺼내었던 단도를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길게 잘라 낸 한 움큼의 머리를 손에 잘 말아 쥐었다.

진분홍빛 머리칼이 탐스럽게 구불거렸다.

‘직모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에 황태자의 금발을 슬쩍 바라보았지만, 죽기 싫으면 내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는 다시 유골 앞으로 다가가 왼쪽 손가락뼈를 머리카락으로 살살 쓸었다.

현장 수습 시 솔로 발굴 대상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내 머리칼은 너무 보드라워서 털어 내는 것보단 오물을 닦아 내는 것에 가까웠지만, 닦기 전보단 훨씬 나았다.

얼마 후 완벽히는 아니나, 대강 눈에 보이는 이물질들이 제거되었다.

하지만 스크롤을 바로 뺄 수는 없었다.

시체가 썩으며 나온 진물과 축축한 동굴의 습도 때문에, 뼈와 종이 부분이 거의 붙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어떡하지?’

억지로 빼냈다가는 종이가 찢어질 가능성이 컸다.

‘우선 수분부터 제거해야 돼.’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스크롤을 빼낼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지류 문화재는 손상되기 무척 쉬운 부류였기에 조심히 다뤄야 했다.

원래는 무균실로 옮긴 후 방부 처리하고 건조시켜야 마땅했으나, 여기선 턱도 없는 소리였다.

나는 수분 제거에 쓸 만한 것이 없는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황태자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꺼진 횃불을 발견했다.

‘저거다.’

나는 자른 머리카락을 바닥에 대충 털어 버리고 그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이어서 나무토막을 주운 후, 끝부분을 암석 위에 마구 짓뭉겠다.

불이 붙어 새까맣게 타 숯이 된 부분은 쉽게 으스러졌다.

어느 정도 숯가루가 모이자 나는 나무토막을 내팽개치고 쭈그려 앉아 손으로 박박 긁어모았다.

그리고 다시 유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숯가루를 스크롤 겉면에 살살 문질러 발랐다.

“그건 또 뭐 하는 거지?”

홀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말없이 지켜보던 황태자가, 아니나 다를까 또 다가와서 대뜸 물었다.

“뼈에 붙은 부분을 쉽게 뗄 수 있게 수분을 제거하는 중이에요.”

황태자는 애매한 얼굴로 내 행동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굳이 그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냥 뼈를 자르면 되잖아?”

“유골도, 종이도 최대한 안 상하게 하려면 이 방법뿐이니까요. 핀셋이나 포셉 같은 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황태자의 괴팍한 소리를 흘려들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쭈그려 앉아 처량 맞게 맨손으로 덕지덕지 숯가루를 바르고 있자니, 그 흔한 라텍스 장갑이 절실히 그리웠다.

“고고학을 배웠었나?”

문득 칼리스토가 물었다.

움직이던 내 손이 우뚝 멈췄다.

“그냥…….”

나는 곧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움직였다.

“집에서 책 몇 권 읽어 본 게 다예요.”

“공녀는 참으로 특이해. 귀족 여식들이 안 하는 짓만 굳이 골라 하는 것 같아.”

“칭찬 감사합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답한 후 마침내 유골의 양손에 숯 바르기를 끝마쳤다.

이제 숯이 수분을 빨아들이기를 잠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검댕이 잔뜩 묻은 손이 엉망이었다. 난감한 얼굴로 지저분한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자.”

불쑥 무언가가 들이밀어졌다.

“닦아.”

황태자가 손수건을 꺼내 내게 내밀고 있었다.

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걸 내려다보다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선선히 받아 들었다.

“이런 것도 다 가지고 다니시네요?”

별생각 없이 한 질문이었는데 황태자가 찔리는지 코웃음을 쳤다.

“허. 공녀는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야 당연히…….”

‘미친 또라이.’

머릿속에 선명한 단어가 떠올랐다.

“……용맹하신 황태자 전하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고 변명처럼 읊조렸다.

“……손수건은 사냥처럼 역동적인 활동에는 보통 잘 안 들고 다니잖아요. 저희 오라버니들도 자주 깜빡하시는걸요.”

그 두 놈이 진짜 손수건을 자주 깜빡하는지는 사실무근이었다.

황태자는 내 변명에도 수상쩍은 시선을 보내다가 툭 내뱉었다.

“선물 받으려고 안 들고 오는 거겠지.”

“……네?”

“그거, 출전 전에 어떤 영애한테서 받은 거야.”

놈이 실실 웃으며 덧붙인 말에 나는 멍하니 닦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셨던 손수건은 어느새 시커멓게 더러워져 있었다.

뒤늦게 끝자락에 수놓아진 수선화를 발견했을 때였다.

“아아. 공녀 때문에 이제 그 손수건은 못 쓰게 되었군. 본의 아니게 그 영애의 성의를 무시한 게 되어 버렸어. 안 그런가?”

황태자 놈이 과장되게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필시 나를 골려 먹기 위함이 분명했다.

나는 손을 닦던 손수건을 곧장 돌려주었다.

“빨아서 다시 쓰세요.”

“새로 손수건을 선물로 주겠단 소린 절대로 안 하는군.”

황태자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내게서 저 말을 듣기 위해 손수건을 빌려줬다는 소리로 들렸다.

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냉정하게 답했다.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못 돼 먹었어?”

못마땅한 얼굴로 손수건을 받아 든 황태자가 또 다시 막말을 지껄였다.

‘네가 제일 못 돼 처먹었어, 이 자식아!’

발끈하는 것도 잠시였다. 이제 스크롤을 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섬주섬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오래된 종이를 온기가 있는 맨손으로 잡고 빼내다간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좀 찝찝했지만, 별수 없이 재킷의 얇은 부분으로 스크롤을 감싸 쥐고 조심조심 뽑아냈다.

다행히도, 수분을 빨아들이기 위해 숯을 이용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다소 뻑뻑하긴 했지만, 나는 마침내 유골의 손가락뼈 사이에서 스크롤을 빼낼 수 있었다.

“휴…….”

혹여나 종이가 부스러지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호흡을 참고 열중했는지 모른다.

두 개의 스크롤을 감싼 재킷을 바닥에 내려놨을 땐, 안도의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끝났나?”

“네.”

“뭘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그러지? 대충 확인만 하면 될 것을.”

구겨진 재킷을 조심스럽게 펼쳐 드는 내 모습에, 황태자가 혀를 차며 다가왔다.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은 나는 스크롤의 상태를 신중히 살폈다.

두 개의 스크롤은 각각 빨간색과 파란색의 삭은 가죽 끈으로 묶여 있었다.

가운데 거멓게 썩어 들어간 자국 빼곤 종이의 상태는 꽤 양호했다.

곰팡이나 벌레가 낀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시체처럼 마법 때문에 어느 정도 보존이 된 건가?’

열어 봐야 알겠지만, 종이가 여러 겹으로 견고하게 배접(褙接)된 상태라 의외로 썩은 부분의 안쪽도 멀쩡할지 모른다.

무사히 빼내는 데 성공했으니, 나는 당연히 이것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갈 줄 알았다.

수습한 유물이란 보존 처리 이후에 연구 자료로 쓰기 마련이니까.

“뭐 해, 어서 열어 보지 않고.”

하지만 황태자 놈이 제 앞쪽에 있는 파란색 끈을 냅다 잡아당겼다.

“자, 잠깐……!”

막을 새도 없이 매듭이 풀리면서 말려 있던 스크롤이 저절로 촤르륵 펼쳐졌다.

“그렇게 함부로…….”

나는 유물을 그렇게 무식하게 다루면 안 된다고 화를 내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히든 퀘스트 [수상한 동굴 탐색] 미션 완료!

〈SYSYEM〉 보상으로 [고대 마법 지도]를 획득했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어…….’

느닷없이 나타난 시스템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건…… 북쪽 숲의 지도로군.”

지도를 샅샅이 살피던 황태자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시스템 창에서 시선을 돌려 스크롤 안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종이 안에 움직이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황태자가 지도의 이곳저곳을 누르자, 그 지역이 확대되었다.

그러더니 빛바랜 종이 위에 산들산들 움직이는 나무와 풀숲이 비쳤다.

무슨 흑백 잉크로 그려진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다.

‘대박. 무슨 태블릿PC 같잖아?’

나는 신기한 마법 지도에 까무러칠 듯 놀랐다.

하지만 황태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읊조렸다.

“저 뒈진 놈은 황궁 안에 이동 포탈을 새기려 했던 모양이야.”

“포탈이요?”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황태자는 손을 뻗어 옆에 고이 놓여 있던 빨간색 스크롤도 덥석 집어 들었다.

그리고 뭐라 할 새 없이 매듭을 풀고 펼쳐 들었다.

다른 스크롤 안에 그려진 것 또한 알 수 없는 곳의 지도였다.

“이건…… 고대 발타의 지도다.”

그를 샅샅이 훑던 황태자의 날카로운 적안이 천천히 커졌다.

“발타의 흔적이라니, 이거 꽤 놀라운데?”

“발타……?”

“그래. 지금의 아르키나 제도이지. 그대는 잘 모르겠군. 발타에 관한 역사는 대부분 지워졌으니까.”

나는 지금의 아르키나가 어딘지도 몰랐다. 대충 옆 나라 어딘가 싶어서 그냥 아는 척했다.

“그렇군요.”

“그대도 마법사들이 배척받는 것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문득 황태자가 물었다. 뷘터로 인해 꽤 신경 쓰고 있던 주제였다.

“발타는 마법사 탄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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