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6화
이어지는 황태자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탄압의 시작이요?”
“그래. 마법이 이렇게까지 상용화 되지 않았던 시절, 몇몇 마법사 놈들이 발타라는 나라를 세워 세계를 점령하려 들었었지.”
“…….”
“치열한 전쟁 끝에 승리를 거머쥔 고대인들은 발타를 지도에서 지우고, 마법사를 배척했다.”
“…….”
“그냥 고대 신화 중 하나라고 여겼는데 말이야…… 이걸 보니 그게 모두 사실이었군.”
황태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두 개의 스크롤을 팔락팔락 흔들었다.
“발타에서 황궁까지 바로 올 수 있는 포탈을 새기려 했던 모양이야. 거리 때문에 스크롤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나는 조금 아연한 눈으로 하체가 없는 유골을 돌아보았다.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 마법을 시전하는 도중 저 고대 마법사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의 잉카 제국은 황궁을 점령당하여 마법사들의 속국이 되었을지도…….’
머릿속에서 뷘터와 그가 숨기고 있는 동물 가면들의 얼굴이 동동 떠올랐다.
역사의 흔적은 언제 봐도 참으로 경이롭고 신기했다.
나는 그래서 고고학을 좋아했다.
한 끗 차이로 인간들의 처지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곤 했으니까.
“……시동어를 안다면 이 스크롤을 사용해서 바로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결론적으로 이건 그냥 오래된 지도 쪼가리에 불과하군.”
황태자가 애석하다는 혀를 차며 덧붙였다.
“그래도 보면서 길을 찾을 수는 있겠군. 이건 필요 없어.”
그는 들고 있던 고대 발타 지도를 내버리듯 재킷 위에 대충 던졌다.
그때까지도 시스템 창은 여전히 떠 있었다.
나는 네모 창과 보상이랍시고 주어진 스크롤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과연 쓸모가 있을까……?’
하지만 밑져야 본전 아닌가.
이 미친 게임에선 뭐든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았다.
나는 고민하다 [예.]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창 안의 글씨가 바뀌었다.
〈SYSTEM〉 [고대 마법 지도 스크롤] 2개를 획득했습니다. 마법 스크롤은 각 3회씩 사용 가능합니다.
〈SYSTEM〉 사용을 원한다면 지도 안의 이동할 장소를 짚으며 시동어를 외칩시오. (시동어 : 예타 뚜 따시 빠시)
‘발음이 왜 저래.’
나는 괴상한 시동어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숲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에.
“……그 스크롤, 제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놈이 들고 있는 북쪽 숲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공녀가?”
“네.”
“그대가…… 고대 마어를 할 줄 안다고?”
황태자는 기괴한 것을 들은 사람처럼 나를 돌아보았다.
‘네 주제에 어떻게.’ 하는 뜻이 뻔히 내포돼 있는지라 나는 좀 기분이 나빠졌다.
“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아니……. 공녀는 마력이 쥐뿔도 없지 않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고대 마어 시동어를 몇 개 배워 뒀습니다. 다행히 이동 마법은 보편적인 편이잖아요.”
나는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지어 냈다.
실제로도 보편적인지, 아닌지 알 게 뭔가. 나가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이 정도는 귀족의 기. 본. 소양이죠.”
하지만 무시하는 듯한 놈의 눈빛만은 참을 수 없었다.
‘기본’에 빡 힘을 주며 말하자, 황태자의 얼굴이 묘해졌다.
“……내가 전쟁에 나간 사이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 바뀌었나 보군.”
그는 떨떠름한 음성으로 종용했다.
“어디 한번 시도해 보시지.”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이것들에 대한 건 다른 놈들에게 되도록 알리지 않는 게 좋으니, 사람들이 있는 초입에서 좀 떨어진 곳이 좋겠군.”
그는 지도를 펼쳐 든 채 신중히 확인하다 한 곳을 짚었다.
“여기로 가지.”
그가 손으로 짚자마자 종이 안이 휙휙, 확대되었다.
얼마 안 가, 흑백 선으로 그려진 숲 속의 정경이 나타났다.
문득 그 위를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갔다.
다시 봐도 놀라운 장면이었다.
“소동물 사냥 구역이다.”
황태자가 짚은 곳이 어딘지 덧붙였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인 곳이었다.
나는 발타 지도 스크롤을 둘둘 말아 묶고 바닥에 깔아 뒀던 재킷을 빠르게 입었다.
잊지 않고 석궁도 챙겼다.
“그럼 해 볼 테니까 계속 거기 짚고 계세요.”
칼리스토 놈은 영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내 덕에 빠져나가는 줄 알아라.’
나는 떼 놓고 가고 싶은 놈을 향해 속으로 불퉁대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예타 뚜 따시 빠시.”
우습기 그지없는 주문을 마지못해 외쳤을 때였다.
〈SYSTEM〉 [고대 마법 지도 스크롤]을 1회 사용하여 해당 지역으로 이동하겠습니까?
[예. / 아니오.]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예.]를 눌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앞이 환하게 점멸하더니…….
“……정말이었군.”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어느덧 망할 동굴을 빠져나와 한적한 숲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SYSTEM〉 [고대 마법 지도 스크롤 : 북쪽 숲]을 사용하여 이동하였습니다. (1/3)
“공녀가 이렇게 쓸모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 항간에서 떠들어 대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걸?”
황태자가 정말로 놀랍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호감도 35%]
그와 동시에 호감도가 소폭 상승했다.
‘칭찬인지, 욕인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나는 이른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는 금발 위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식으로 조사를 해야 하니 이것들은 내가 가져가겠다.”
황태자는 펼쳐져 있던 북쪽 숲 지도를 직접 둘둘 말아 챙겨 들었다.
“그러세요.”
나는 내가 들고 있던 발타 지도도 순순히 넘겼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봤자, 딱히 쓸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내가 길을 잃어버렸던 소동물 사냥 구역을 가로지르는 길이 보였다.
“그럼 이제 돌아가요, 전하.”
헤매지 않고 빨리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품에 스크롤들을 챙긴 황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순간.
“윽.”
막 몸을 일으킨 황태자가 돌연 머리를 붙잡고 휘청거렸다.
“전하!”
나는 깜짝 놀라 그의 팔을 와락 붙잡고 부축했다.
동굴 안은 어두컴컴해서 알아차릴 수 없었다.
환한 햇살 아래에서 다시 본 황태자의 안색이 백지장 같았다.
“전하, 괜찮으세요?”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던 걸까. 하얗게 질린 칼리스토의 얼굴선을 따라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흥건한 물기를 닦아 주었다.
손바닥에 닿는 그의 피부가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새벽녘에 깨웠을 때 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그의 모습과 겹쳤다.
“다친 데 잘못된 거 맞죠, 네?”
“……앞에서 죽지 말라더니, 시체 치우기는 싫은가 보지?”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요?!”
나는 빽 고함을 질렀다.
황태자가 창백한 낯빛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 안 죽어.”
“안 되겠어요. 저한테 기대세요. 어서 돌아가요!”
“공녀.”
그를 끌고 황급히 걸음을 재촉하던 나를 황태자가 문득 저지했다.
“악녀처럼 매정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가서 아무나 날 데려가라고 말 좀 전해 주도록 해.”
“그게 무슨…….”
“안 그러면 내가 깨어났을 때 후회하게 될…….”
그때였다. 힘없는 목소리로 끝까지 협박을 하던 황태자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저, 전하!”
나는 비명을 지르며 덩달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하! 전하!”
칼리스토의 몸을 세게 흔들었지만, 굳게 내리 감긴 적안이 다시 보이는 일은 없었다.
나는 겁에 질려 허겁지겁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아침과는 달리 들리는 고동 소리가 느리고 작았다.
남주는 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더럭 겁이 났다.
“이대론 안 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금방 사람들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알았죠?”
대답 없는 황태자를 뒤로한 채 나는 이를 악물고 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아무나 데리고 와야 해!’
그나마 다행인 점은 소동물 사냥 구역이 숲의 초입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스크롤로 이동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처음 사냥터에 들어설 때 봤던 갈림길에 이르렀다.
근위병들이 엄청나게 포진해 있는 공터에 도달하기까지는 삽시간이었다.
“이봐! 헉, 허억…… 숲에, 숲에 황태자님이……!”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장 가까이 있는 기사 두 명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난데없이 나타난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던 두 기사가 덥석 내 양팔을 붙들었다.
“공녀님이 돌아왔습니다!”
기사들은 사냥 대회를 주관하는 천막이 있는 쪽으로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순식간에 나를 둘러쌌다.
‘뭐지? ……꼭 죄인이라도 포박하는 모양샌데.’
불길한 예감이 다리 끝을 타고 올랐다.
“이봐.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숲 속에 황태자 전하께서……!”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내 양팔을 단단히 붙든 근위병들에게 다시 한 번 외쳤다.
그때였다.
나를 둘러싼 기사들을 헤치고 누군가 빠르게 걸어왔다.
엊그제 일면식이 있던 근위대장이었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녀. 귀족 시해 미수로 당신을 긴급 체포합니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분위기 체포요?’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고 적중했다.